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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도 줄 선다 ···죽어가던 회현동 골목식당 살린 ‘이것’

밴조선에디터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1-02-13 16:26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중구 회현역 인근 한식당 '진달래' 윤남순 사장이 제육볶음 도시락을 만들고 있다. /고운호 기자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중구 회현역 인근 한식당 '진달래' 윤남순 사장이 제육볶음 도시락을 만들고 있다. /고운호 기자

주말인 지난 7일 낮 12시, 서울 중구 회현동의 밥집 골목은 한산했다. 우리은행 본점 등 인근 회사들이 문 닫는 일요일에는 식당들도 쉬기 때문이다. 조용한 골목에서 ‘진달래’ 식당은 식사 준비로 분주했다. 10평(33㎡) 남짓한 식당 안에 들어서자, 윤남순(62) 사장은 따끈한 쌀밥과 제육볶음을 도시락에 담고 있었다. 가게 내부엔 손님 없이, 30인용 밥솥과 그 옆에 갈색 도시락 상자 30여개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오후 2시가 되자 진달래를 비롯해 중식당·돈까스집·포장마차 등 회현동 골목식당 12곳에서 만든 도시락 500개가 차곡차곡 용달트럭에 실렸다. 각 도시락엔 식당 이름과 메뉴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트럭이 향한 곳은 2㎞ 남짓 떨어진 명동성당의 무료급식소 ‘명동밥집’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무료급식소 운영이 속속 중단되면서 밥 한 끼가 귀해진 노숙인들에게 이 도시락은 훌륭한 식사다.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중구 무료급식소 '명동밥집'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회현동 골목식당에서 만든 도시락을 받고 있다. / 고운호 기자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중구 무료급식소 '명동밥집'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회현동 골목식당에서 만든 도시락을 받고 있다. / 고운호 기자

◇도시락으로 활로 찾은 남대문 밥집골목

직장인 상대 밥장사로 늘 북적였던 서울 남대문 일대 회현동 밥집 골목은 ‘코로나 직격탄’을 맞았다. 직장인들이 외출을 꺼리며 구내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저녁 회식도 사라진 탓이다. 회현동 골목상인 연합체인 남촌상인회 회장을 맡고있는 윤남순 사장은 “매일 100명 가까이 오던 손님들이 요즘엔 10여명 정도로 줄었지만, 혼자 일하는 가게가 많아 다들 배달은 엄두도 못 냈다”고 했다. 지난달 27일 점심시간에 찾은 포장마차 ‘유포차’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전 11시30분, 점심 손님으로 한창이었어야 할 때지만 18명 좌석 중 5개만 찼다. 김춘자(68) 사장은 “코로나 이전에는 점심 손님이 가득 찼는데, 이젠 많이 와봐야 서너 테이블 정도”라며 “저녁 술장사도 오후 9시 영업제한하면서 손님이 거의 오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죽어가던 식당들을 살린건 ‘도시락’ 아이디어였다. 아이디어를 낸 것은 KBS 다큐멘터리 PD인 이욱정씨. 식당은 손님이 찾지 않으면 답이 없지만, 도시락으로 만들면 손쉽게 배달·포장 판매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란 제안이었다. 회현동 밥집 골목에 있는 식당 7곳이 각 식당의 주력 메뉴를 반영한 도시락을 개발했다. 중국집 ‘유가’에선 마파두부와 유산슬 밥을, 포장마차 ‘유포차’는 점심 메뉴로 팔던 제육볶음과 불고기로 도시락을 만들었다. 작년 10월 열린 ‘회현동 은행나무축제’에 내놓은 상인들의 도시락은 인기리에 팔렸다. 이씨는 이 과정을 담아 ‘코로나19, 이모네밥집 희망가’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중구 회현역 인근 한식당 진달래 윤남순 사장이 도시락에 들어갈 제육볶음을 만들고 있다. /고운호 기자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중구 회현역 인근 한식당 진달래 윤남순 사장이 도시락에 들어갈 제육볶음을 만들고 있다. /고운호 기자

◇”노숙인에 보내달라” 대량 주문

작년 11월 다큐멘터리 방송 이후, 판로(販路)가 열렸다. SK그룹이 ’6000원짜리 도시락을 사서 명동 밥집에 후원하고 싶다'고 남촌상인회에 제안해온 것이다. 3월까지 도시락 1만6200개를 만들어달라는 대량 주문이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차린 명동밥집은 명동성당 안쪽 옛 계성여중 운동장에 위치해있다. 명동밥집에선 이 도시락을 받아다가 매주 수·금·일 오후 3시에 노숙인들에게 나눠준다. 코로나 때문에 자체 식당을 운영하기 어려웠던 명동밥집에서도 골목식당의 도시락을 반겼다.

식당 주인들은 음식 만들기엔 고수였지만, 도시락 만들기엔 서툴렀다. 가게에선 손님들 주문에 맞춰 착착 음식을 준비하면 됐지만, 도시락은 한 번에 많은 양을 미리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유포차의 김 사장은 “가게에선 손님 얼굴을 직접 보며 부족한 찬을 더 내주면 되지만 도시락은 그렇지 않다”며 “처음엔 반찬이나 밥이 부족하진 않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봉돈분식 김봉순(69) 사장은 “이전에 배달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한 적이 있었지만, 도시락 포장은 한 번에 준비하는 양이 훨씬 많아 더 신경이 쓰였다”고 했다.

한산했던 골목식당에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사장님, 도시락 싸느라 정신없으시네.” 지난달 27일 오전 11시 30분, 포장마차 ‘유포차’에 들어온 직장인 손님이 김춘자 사장에게 말을 건넸다. 이미 6석짜리 테이블은 대형 밥솥과 수십개의 도시락 차지였다. 문 앞의 2인 테이블에도 도시락용 밥솥이 올라가 있었다. 김씨는 “새벽 4시부터 나와 불고기와 제육볶음 도시락 110개를 만들었다”며 “도시락 매출로만 거의 70만원을 올렸다”고 했다.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중구 회현역 인근 한식당 '진달래'에서 만든 도시락. 명동성당에 있는 무료급식소 '명동밥집'에서 노숙인 등 취약계층에게 나눠줄 도시락으로, 밥은 1.5인분을 담고 제육볶음과 어묵 볶음, 김장 김치를 반찬으로 넣었다. /고운호 기자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중구 회현역 인근 한식당 '진달래'에서 만든 도시락. 명동성당에 있는 무료급식소 '명동밥집'에서 노숙인 등 취약계층에게 나눠줄 도시락으로, 밥은 1.5인분을 담고 제육볶음과 어묵 볶음, 김장 김치를 반찬으로 넣었다. /고운호 기자

◇꾹꾹 눌러담은 도시락, 노숙인에 인기

회현동 골목식당 도시락은 노숙인들 사이에도 인기라고 한다. 맛은 물론 풍성한 양과 다양한 메뉴 덕분이다. 지난달 24일 오후 3시, 명동밥집에는 도시락을 받으러 온 노숙인들 200여명이 자원봉사자의 안내를 받으며 줄을 서 있었다.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소들이 코로나로 인해 줄줄이 문을 닫은 탓에 타지에서 명동까지 원정 온 노숙인들도 많았다. 오후 2시 40분쯤, 강남역에서 2호선 전철을 타고 왔다는 노숙인 김인식(69)씨는 “아이고, 사람이 꽉 찼네, 꽉 찼어”라고 말하며 서둘러 줄을 섰다. 김씨는 “지난번에는 여기에서 주는 중국집 버섯덮밥을 먹었는데 참 맛있어서 또 왔다”고 했다.

진달래 윤남순 사장은 “처음에는 밥 한 공기 분량을 넣었는데 양이 적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공기반으로 늘렸다”며 “도시락을 미리 만들어놓으면 맛이 없으니까, 급식소 가기 직전에 따뜻하게 만들어 담는다”고 했다. 상인들은 영양이 부족한 노숙인을 위해 도시락에 고기 메뉴도 챙겨 넣었다. 이곳 식당에서 명동성당까지 트럭으로 10분이 채 안 걸리지만, 혹시라도 밥이 식을세라 ‘핫팩’도 함께 넣는다.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 있는 무료급식소 '명동밥집'에서 노숙인 등이 도시락을 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 고운호 기자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 있는 무료급식소 '명동밥집'에서 노숙인 등이 도시락을 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 고운호 기자

◇곳곳에서 도시락 주문

명동밥집에 납품한 도시락이 차츰 입소문을 타면서, 이제 지자체와 기업에서도 도시락 문의가 들어온다고 한다. 지난 9일부터는 강동구 복지센터에 매주 화·목 도시락 120개를 납품하고 있다. 골목 식당들도 점점 도시락 만들기에 뛰어들고 있다. 이달들어 5곳이 추가돼 현재 12곳의 식당들이 함께 도시락을 만들고 있다. 윤남순 남촌상인회장은 “도시락 덕분에 숨통이 탁 트였다”며 “앞으로도 참여가게를 점차 늘려가 다함께 코로나를 이기고, 다같이 잘 되면 좋겠다”고 했다.

조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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