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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문학 신춘문예 당선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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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4-03-27 16:04

차상 | <고귀한 분실> 양현석
차하 | <말의 무게를 넘어서> 예종희
차하 | <늙어가는 마음> 반현향
<고귀한 분실>  

해마다 찬바람이 불어오고 단풍 꽃이 필 때면 우리 곁으로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이 있다. 이 고마운 손님은 산란기가 되어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헤치고 목적지인 모천까지 무사히 회귀하는 연어들이다. 알을 낳기에 가장 좋은 장소를 찾아 먼 바다에서부터 거센 강줄기를 거슬러 하천 상류 얕은 물가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은 그야말로 눈물겹다. 연어에게 주어진 태생적 생존 본능이라 하더라도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갸륵하고 사랑스런 일인지 감탄이 저절로 일어난다. 그들의
필사적인 여정 앞에 숙연해지는 것은 산란과 수정 작업이 끝나고 나면 곧바로 기력이 쇠하여 생을 마친다는 점이다. 이윽고 죽은 연어는 주변 생태계에 있는 동물의 먹이와 식물의 거름이 되어준다. 심지어 어미 연어의 임무를 마친 사체들은
물속에서 자잘한 조각으로 분해되어 부화된 새끼 연어들의 먹이까지 되어준다. 연어들의 산란기에는 철두철미한 희생적 투신이 따른다. 여기 친환경 도시임을 자랑하는 광역 밴쿠버에 이런 자연의 착실한 순환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하천이 여러 곳이 있다.

   가을 나무가 단풍으로 물든 오색 꽃잎을 허공 속에 흩날리고 있을 때, 바람에 낙엽이 떨어지듯 산란하려는 어미 연어들의 마라톤 경주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주의를 바짝 기울이게 된다. 가을비에 젖은 낙엽이 쌓여가면 가까운 하천을 찾아 환영식이라도 하듯 마라톤 경기장을 찾아 나선다. 밀레니엄 라인 스카이 트레인 종착지인 Lafarge Lake- Douglas 역이 있다. 승강장 바로 앞에 넓다란 호수가 훤히 펼쳐지는 광경은 마치 호수 가운데 전철역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전망이 빼어나다. 여기서 십 분 정도 걸어가면 가까운 더글라스 대학 쪽에 인접한 Hoy Creek Trail을 만나게 된다. 첫 순간 원시림에 들어와 있는 듯이 도심 속 가까운 곳에 이런 아름들이 고목이 즐비한 숲길을 걸어가는 경이감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숲길은  
남과 북 코스로 나뉘어 이어져 있지만 그리 긴 길은 아니다. 흐르는 하천을 끼고 돌다 보면 바로 옆에 주택가 담장이 연결되어 있으며 다른 한 곳엔 연어 인공 부화장과 치어를 방류하는 Hatchury 시설물도 갖추고 있다. 기상 예보가 늘 적중 하는 것은 아니라서 흐린 날 먹구름으로 덮혔던 하늘이 한차례 가을비로 활짝 개인다. 비 온 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니 나뭇잎에 매달린 은 구슬 방울들이 일제히 반짝거리며 순식간 호젓한 숲길을 빛나는 보석의 방으로 변화시킨다. 가다가 어느 나무 앞에 발길이 멈추어 진다. 커다란 나무 밑둥에서 길다란 뿌리 두 줄기가 돌출되어 보인다.  마치 사람의 양팔이 검은 곰 머리를 움켜잡고 쓰러뜨리면서 포획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아직 숲에는 야생 곰이 출현하고 있다는 현장감이 실감나게 엄습한다. 숲 속에는 온갖 생물들이 집결된 듯, 숨쉬고 있는 자신도 자연의 일부분라는 영혼의 울림이 일어나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는 유기적 생명체이다. 숲으로 가면 자연과 교감하는 생명력에 감싸여 모두가 신선한 행복감을 누리게 된다. 어느 기계화된 도시 문명 안에서 느낄 수 없는, 생명체와 접촉함으로 얻어지는 상쾌하고도 자유로운 기쁨이 있다.  더구나 야트막하게 흐르는 하천에 돌아와 팔딱거리는 연어들을 목격하게 되면 나의 심장은 넘치는 생명력으로 더욱 힘차게 약동하지 않을 수 없다.

   매년 Hoy Creek으로 돌아오는 연어는 보통 첨(chum)과 코호(coho) 두 종류가 있다.험한 물살을 거슬러 오느라 온몸이 찢기고 뜯겨진 상쳐투성이 연어들은 크기가 거의 팔뚝만하다.  마침내 본향에 돌아와 산란을 마치고 어미 연어들은 최후의 순간을 맞이 한다. 나는 이 자연의 순환 속에 내포된 어떤 법칙 같은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어떠한 곤경을 마주해도 또한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기필코 자기 종족을 보존시키겠다는 목적이 담겨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전쟁을 치루어 가면서 인류 역사는 이어져 오고 있으며 지금도 지구촌 한구석에서는 싸움을
그치지 않고 있다. 지불하지 않고 저절로 생겨나는 성취는 없는 법이다.  끊임없는
투쟁 가운데 설령 손실이 생기더라도 희생과 대가를 엄중히 요구하는 질서가 세상속에서 지켜져 오고 있다. 부화된 치어가 성체 연어로 되돌아오는 확률은 매우 극소수이지만 그 상실의 과정에 상관하지 않고 지금도 이 고귀한 분실은 어김없이 진행되고 있다. 나는 거센 물살을 헤치고 솟아오르는 연어의 힘찬 도약과 비상을 보면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밀려와 짜릿한 희열을 느끼곤 한다. 저 거침없는 질주와 점프력은 도대체 어디서, 누구에게로부터 배운 것일까?

   또한 연어는 소처럼 자신의 전부를 머리부터 꼬리까지 아낌없이 제공해준다. 부위별로 회,구이,탕, 튀김과 절임 등 다양한 요리로 즐겨왔다. 초밥집이 유난히 많은 이 도시에서 연어는 사랑 받아 온 국민 생선이다. 오래전부터 원주민의 중요한 양식이 되어 왔고 오늘날에는 여러모로 가공되어 영양제와 화장품으로 그 용도가
다양하다. 일찍이 이런 연어의 유익함을 알아차린 인간들은 서둘러 연어의 회귀를 돕는 시설을 확충하며 더 많은 연어가 돌아오도록 숲과 하천을 보호하는 정책을 펼쳐가고 있다. 연어는 무턱대고 흘러가는 물길에 안주하지 않고 오히려 역행하는 저항적 버릇이 있다. 그것은 바로 번식하고 보존하려는 천성적 모성애 때문일것이다. 상처와 고통을 이겨내는 사랑이 마치 크리스천을 닮았다고 할까? 연어들의 산란 행렬은 고귀한 분실처럼 희생과 헌신이 드려지는 자연의 순환이자  제례와도 같다.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들을 바라보며 나도 어느 덧 본향으로 돌아갈 귀향의 계절에 다가와 있다는 내면의 깨달음이 흐르는 물소리를 타고 들려온다.




<말의 무게를 넘어서> 

말은 만사에 오해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하지만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있고 표현이 가능한 사실이라면 상대가 이해할 수 있게 명확하게 말하여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소통이 되지 않겠는가? 말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는 모호하다. 경계라기보다 하나의 회색지대이다. 그래서 말의 무게는 항상 무겁다. 말하는 게 좋다. 말이 없는 게 좋다는 이 두 판단들은 수시로 일상을 침범하고 넘나든다. 그러면 어떤 장단에 맞춰 살아야 하는 것일까? 

말은 내 입 안에 있을 때만 내 것이다. 말이 일단 입 밖으로 달려 나가면 그것을 잡아와서 다시 매어놓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최소한 중간은 갈 수 있으니 이는 익숙한 중용이란 가치와 비슷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복잡해진 현대에 함께 힘을 합쳐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면 분명한 의사표현이 중요하다. 변화가 빠르고 복잡하며 더 위험해진 현대에 표현하는 게 좋은가 나쁜가는 주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즉 상황변화에 따라 말의 무게도 수시로 변한다. 주위 변화가 빨라지면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적절히 표현하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이래서 메타인지라는 자기 계발의 방법이 유행하는지도 모르겠다. 오해를 받고도 묵묵하게 견디는 것이 그 사람의 그릇이라 하지만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좋지 않을 수도 있다. 오해를 풀어야 하는가 그 오해를 견디는 것이 현명한가는 상황에 따라 그 맥락이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아는 분에게 미친 새끼란 말을 들었다. 그때는 계속 밀려오는 대화로 어색할 수도 있는 분위기를 묻어 버렸다.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민 온 이래 타인에게 처음 들어본 생생하고 험한 단어였다. 그런데 어찌 보면 지나칠 수도 있는 그 순간을 다시 생각하게 된 이유는 나의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내 감정이 상하지 않았을까? 대화의 맥락과 분위기를 생각해 봐도 엄연히 내가 잘못한 일이었고 혼나도 마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무의식적으로 누군가가 나를 호되게 꾸중해 주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원했는지도 모른다. 만일 대화상대가 처음 본 사람이거나 내가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감정이 상해 유쾌한 분위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대화에서 작은 어투. 잘못 선정된 단어보다 서로 간의 분위기 신뢰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깨닫는다. 신뢰가 없는 분위기는 팽팽한 풍선과 같다. 긴장된 분위기에서 날카로운 단어에 스치기라도 하면 감정은 마음안에서 바로 터진다. 작은 실수라도 더욱 조심하게 되고 단어의 선정에 조심하며 그 방향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된다. 서로는 한없이 공손하지만, 마음이 오고 가는 소통은 없다. 같은 곳에 있지만 서로는 듣지 않는다. 듣지 않으면 소통은 없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누구나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에 서로 존중하며 상대의 실수를 넉넉히 소화하려는 여유가 생길 때 비로소 풍선에 바람이 빠진다. 그런 넉넉한 신뢰의 산소가 바닥에 퍼지면 조금씩 즐거운 말의 반찬이 나타난다. 같이 하면 즐거운 농담과 유머가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진다. 나도 질세라 자신있는 말반찬을 내보이며 함께 맛본다. 즐거운 말의 잔치가 열린다. 행복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누구나 쉽게 느끼는 행복은 친한 사람들과 함께 수다 떨며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순간이다. 지금처럼 촘촘하게 발전한 복잡한 현대에 이제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의 문제이다. 어떠한 거대한 시대정신을 수행하는 것보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평화로이 공존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시장 자본주의가 세세하게 분업화되고 더 정교해 질수록 우리는 관계에서 친밀감을 만드는 법을 잊어간다. 개인주의가 팽배할 수록 개인들은 소통하는 법을 잊어가고 있다. 개인들은 소외되고 더 외로워지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상대의 삶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우리가 친밀감을 형성할 수가 있을까? 형성된 관계에서 서로 아무런 기대 없이 친밀한 감정이 유지될 수 있을까? 인권이 시대윤리로 자리 잡은 지금 서로 실수를 주고받지 않고 상대존재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까? 

상대의 실수로 감정을 주고받으면서 상대의 부족함 만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도 깨달아 갈 수 있으리라. 이럴 때 서로 존중할 수 있는 거리를 다시 조정하게 되고 서로를 더 이해하면서 변화하는 관계의 거리를 다시 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말에는 그 사람이 들어있다. 말의 무게가 그 사람의 무게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무게있는 사람만 사는게 아니다. 의미없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신뢰감을 확인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 내가 있는 시공간을 함께 해도 즐거운 누군가가 있다는 것. 이것이 행복한 삶이다. 

새로운 시대에 서로 사이좋게 공존하는 사회를 위해 새로운 대화의 질서가 만들어졌으면 하고 희망해 본다. 비록 그 질서가 완벽하지 않고 군데군데 균열이 발견되어도 그 흠과 결의 모자람이 서로의 이해와 존중으로 잘 메꿔지는 공동체를 꿈꿔본다. 조금 부족해도 다음 기회가 있고 개선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사회를 꿈꾸어 본다. 




<늙어가는 마음> 

누가 부르니 네가 응답했고
낯설게 다가와
마치 나 인양 굴고 있다

너로 인해 노쇠해지고
삶의 마침점이
눈 앞에서 아른거린다

젊은 어깨에 실루엣이 펄럭일때마다
꽃반지 만지며 향기를 훔쳐 댔고

엇박자 짓던 감성이 울부짖던 질풍도
맑은 한지에 비추어진
진다홍 감잎에 봉해 버렸다

살며시 단풍잎에 놓았던 도토리 한톨
다람쥐입에 물린채
커다란 동공이 되어 데굴거린다

주름진 미소에 피어 오르는 너그러움은
비트러진 나리꽃잎에 새겨 놓는다

비바람에 쓸려가버린
마른 꽃잎의 아름다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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