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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98세 노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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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4-02-05 11:54

박병호 / (사)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광교산 계곡에서 출발해 소리 없이 흘러온 물이 수문 앞에 다다라 소용돌이쳤다. 태양이 서포루(화성 서측 성벽 위 2층 누각) 너머로 뚝 떨어지는 순간, 사나운 포성을 질렀다. 기울어지지 않고 평평하던 물이 일곱 홍예(화성의 북쪽 수문)를 지나 수직 낙하하며 갑자기 격정의 폭포수로 변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실개천보다 크고 일반 하천보다 작은 공간에 소망을 추구하는 사람, 우연의 재회를 꿈꾸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꿈들이 모여 방주의 천정, 유일한 창문 밖으로 날아간 비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돌아온 둘째 비둘기가 그들에게 올리브나무 새 잎을 선물했다. 노아의 방주같이 한배에 탄 사람들이 수원천으로 쏟아져 나왔다. 새들은 희망의 기쁨을 7개 무지개에 핀 물꽃에 실어 폭포수 위로 날려보내고 있었다. 연인들은 새파란 하늘에 방패연을 닮은 마음의 창을 날리며 따로 또 같은 소원을 실어 보내고 있었다. 빨간 장화, 하얀 장화가 차고 맑은 물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마른 논에 물대듯 순식간에 삼각대를 설치하더니 젊은 남자와 늙은 여자가 밀회를 즐기고 있는 화홍정을 향해 연신 플래시를 터뜨렸다.
  물결파에 굴절된 불빛들이 바닥을 치고 튀어 오르는 빗줄기처럼 솟아올랐다. 하늘과 땅이 수많은 투명 수직 기둥으로 연결되었다. 작은 텅 빈 공간들로 크고 작은 인연들이 내뿜는 온기가 하늘까지 오른 후 밤안개가 되어 내려왔다. 습기는 기화되어 안개와 연기처럼 스멀스멀 봉돈(수원 화성 성벽에 검은 벽돌을 쌓아 만든 봉화대)에 깔렸다. 뒤따라 안개꽃이 피어나더니 다섯 봉화로가 일제히 불연기를 피워올렸다. 평상용 1개와 비상용 4개 모두가 일제히 타오르는 것은 전란 중에 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사랑은 전쟁이었다. 인간은 싸우며 커간다. 자연에 맞서거나 자신의 한계에 맞선다. 별다른 일이 아닌 것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작은 사고를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의 전조증상으로 믿는다. 그녀는 이런 유의 하인리히 법칙 따위는 믿지 않지만 한 몸 안의 두 사람이 전쟁을 치르며 성장과 성숙의 라이프 사이클을 그렸다. 98세 노인의 가슴에는 큰 바다가 들어와 있다.  
  “할머니, 저녁 약 잡수세요.”
  “멍충이, 또 잊어버렸구나. 내가 어디 아프가니..?”
  “아! 효순 씨, 예방약이에요.”
  예방약이라고 둘러대면 잘 받아먹던 노인이 투명 비닐 약봉지를 하늘로 날려버리며 청년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사진들 찍어대니 대 주자고. 기회는 용기를 먹고 자라는 거야.”
  “우리 찍는 것 아니에요.”
  “바보야, 우리 쪽을 찍으면 우리를 찍는거야.”
  효순은 나이 들수록 원치 않은 사진에 등장하는 것을 싫어하더니, 흰머리가 검어지면서 그것마저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원래는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기다림이 농익어 변했다. 꿈 그리기는 70년 이상의 소리 없는 내전을 표출하는 수단이었다. 불쏘시개가 아궁이의 폐활량을 키우듯 나이 듦이 마음 주머니를 키웠다. 98세에 꿈속에서 맡은 자신의 향기를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다. 사랑은 세상과의 나눔이라는 것을 알았다. 비현실적인 꿈이라 해도 꿈이 없는 사랑은 향기 없는 꽃이었다.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수록 사랑은 영원했다. 기다림은 꽃이 되어 은은한 사랑의 향기를 내뿜는다. 젊은 처녀가 늙은 할머니가 되기까지 한 사람을 기다렸다. 멀찍이서 딱한 번 얼굴을 훔쳐본 사이였는데도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로 그려졌다. 그리움의 대상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늘 부족한 시간이 앗아가거나 의도적 회피가 인식 못 하게 할 뿐이다. 몸 섞어 8남매나 낳은 그녀의 남편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 남자 '한가'는 눈에 선 점 하나 없었다. 가슴으로 품었기에 그랬다. 세상에 완벽한 짝은 없지만 한가는 완벽한 짝이 되었다. 대화 한마디 못 나누었기에 가능했다. 생각이 그림과 글이 되니 그리움이 커갔다. 옷깃 한 번 스치지 않은 사람, 편지 한통 주고 받지 않은 사람인데도 잘생기고 필체 좋고 신념 확실하고 판단력 옳은 남자였다. 효순의 오빠가 보증한 사람이라 더 했겠으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 효순과 한가(성은 한 씨이고 이름은 효순이 잊어버렸다)는 다른 듯 닮고 닮은 듯 다른 환상의 짝이니 나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오빠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다.
  1944년 일본제국 군인으로 바다에 뛰어들며 했던 오빠의 말은 흐르는 강물처럼 그녀의 가슴에서 말라버린 적이 없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고 다른 약속의 표시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랬다.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는데 그랬다. 1년 후 남태평양에서 오빠의 사망 소식이 날아왔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양탄자처럼 단단하고 부드러운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가장 맘에 든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시신 없는 사망 소식에 크게 흔들렸다. 좋았던 생명과 재산은 하루아침에 무너져내렸다. 효순의 마음은 굳건한 아버지라는 기둥을 잃고서도 변하지 않았다. 억이 나서 고봉밥을 먹었고 댓잎 소리 나부끼는 대밭 길을 뛰어다녔다. 오빠와 아빠가 하늘에서 바라보았을 때 보기 좋은 얼굴을 유지했다. 오빠가 떠나기 전에 한가에게 편지라도 한 통 보냈을 거라는 상상이 효순에게 기다림을 평생 간직하게 했다. 그러나 오빠의 영혼이 망망대해에 떠돈다는 망상이 그녀에게서 긴 세월 동안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앗아갔었다.
   “효순, 여자 무릎에 누워있는 남자의 사진을 빨간 장화가 보내왔어요. 여기 화면 보세요”
   “안 보여, 핸드폰 화면을 볼 수 있으면 사람이게?”
   “제목을 '할머니와 증손자'로 하여 정조대왕 기념 사전전에 출품한대요.”
   “하늘에 계신 왕을 땅으로 끌어내리면 어떡해. 제목도 그렇고.”
   “제목을 할머니가 좋아하는 것으로 바꿔라고 할까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도록 정해봐.”
   '화성을 나는 노인', '만리장성보다 높은 성', '기억과 추억' 등 소야가 내놓은 많은 제목들을 마다하더니 노인이 하나의 제목을 던졌다.
   “사랑에 빠진 98세 노인!”
  총각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저었다. 그 시간 하늘에서 정상으로 되돌린 뇌를 더 연장할 수 없다는 신호가 왔다. 소야가 어디론가 문자를 날리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연장시켜 주세요.”
  사람들은 작은 위기로도 절대자를 찾는다. 평소에는 믿음 약한 사람도 그런다.
  “화. 성. 성. 역. 의. 궤, 기억상자를 당할 뇌는 없어, 연명치료 안 한다고..”기억 창고에 들어가지 못하는 생각들이 노인의 해마에서 내려와 두서없는 꿈의 대화처럼 맴돌았다. 남편의 이름도 기억 못 하는 그녀로 돌아왔다. 성곽 공사의 처음과 끝 여섯 자를 방금 전 또박 또박 발음했었는데 그랬다. 변화는 서서히 일어나지 않는다.  빨간 장화가 달려와 제목을 바꿔도 좋다고 했다.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해도 될까요?” 청년이 빨간 장화에게 물었다.
  “왜요? 할머니와 함께 나오는 모습이 창피라기라도 한 건가요?”
  “그건 아니고요, 할머니가 정해주신 제목이 하나뿐이라 선택 여지도 없고요.”
  “사랑이라는 큰 그릇에 못 담을 것은 없는데..”
  소야의 생각이 바뀌었다. 효순이 사진 속 남자는 소야가 아니라 80년 전부터 기다리고 있는, 기준시점이 다른 남자라고 빨간 장화에게 암시했다는 말에 설득되어서였다. 둘 사이의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남과 여는 수원천 물에 발을 담갔다. 물 냄새를 맡으며 기억들이 살아나 효순이 이제 제법 말이 되는 말들로 꼬리를 이었다.  
  “기중기는 어디에 두었는지. 노인들 번쩍 들어 성 위로 올려주면 안 좋아?.” 거중기를 기중기로 발음하며 귀엽게 투덜거렸다.
  효순이 걸음을 멈추고 공심돈(성곽의 포루)을 붙잡으며 연신 날숨을 길게 내뿜었다. 노인의 뇌에서는 오래된 기억일수록 생생하게 일어났다. 기억의 기록들은 회계원리의 후입선출법을 따랐다. 나중 들어온 것이 먼저 나갔다. 그럼에도 50년 전 하늘에 오른 남편의 이름은 되살아 나지 않았다. 소야가 생각하기에 퇴행성 뇌질환은 나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늙어갈수록 필요한 선물인지도 몰랐다. 머리가 복잡하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 공무원 남편의 쥐꼬리만한 봉급이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밀가루 포대로 바뀌어 나가도 남편을 왕처럼 받들며 늘 천사 꿈을 꾸던 그녀였다. 효순의 뜨개질과 재봉틀 솜씨가 경제적 독립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실과 코와 재봉틀로 못 만드는 게 없었고 신혼부부용 원앙 베게와 이불은 걸작이었다. 그녀의 작품에는 소명을 사명으로 여기면서 나오는 향기가 묻어있었다. 섬처녀들은 남편감들보다 효순을 더 기다렸다. 경제를 아들에게 의존할 때까지 그랬다. 그렇게 살아온 그녀의 뇌가 서서히 변하여 뇌 속 베타 아밀로이드(뇌에 손상을 일으키는 단백질)가 날씨에 맞춰 춤을 췄다. 참수 집행을 오래 끌려는 망나니의 칼춤 같았다. 뇌세포 사이사이에 신경을 전달하는 시냅스가 환경 변화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순은 슬픔보다 기쁨, 실패보다 성공을 더 잘 기억했다. 아프기 전에는 젊은이를 만나면 '천국의 사다리를 붙잡고 간절히 원할 때 하늘이 도와준다.'라고 말해온 희망 전도사였다.
  여자와 남자는 수백 계단을 밟고 올라 방화수류정에 다다랐다. 돌출된 툇마루에서 잠들고 싶었다. 용연 방향으로 누웠다. 잠들며 두 팔을 독수리처럼 벌렸다. 수면상태에서 믿음과 소망의 도약대 위에 섰다. 모자를 벗어던지니 사랑 표현을 빗장 지른 것들이 머리에서 발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꿈을 꾸었다.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피어 나왔다.  '날아라 태양을 향해, 날갯죽지가 태양에 타버리지 않을 곳까지' 큰 소리 지르려고 했지만 수면에 빠진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꿈에서, 모든 것을 삼켜도 변치 않는 바다의 하늘을 날았다. 어머니 같은 바다는 높이 올라도 공포감 하나 들지 않았다. 하늘을 향해 오르다 태양을 가린 구름 속에서 커다란 두 날개가 노인을 향해 펼쳐졌다. 하늘 아래 연못이 뿌옇게 흐릿했지만 날갯짓을 포기하지 않았다. 구름을 뚫고 오르니 밝은 숲이 나왔다. 구름 숲 한편에 빗장 지른 두 나무가 서 있었다.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문이 있었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 산 인생, 들어가서 못 나온다 해도 아쉬움이 없었다. 꿈에서도 호기심은 꺾이지 않았다. 백 살 하고도 열여덟 살이 되어 세상에 내려오면 어울릴 사람이 없기 때문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했다. 숲속 가장 높은 곳에 앉았다. 온 세상 사람들의 움직임이 내려다보였다. 절반은 성난 파도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고 다른 절반은 기다림의 설렘에 빠져 나비의 날갯짓으로 잔잔한 해면 위를 날고 있었다. 해가 뜨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 나니 황금색 숲이 나왔다.
  백세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처음 본 남자에게 원래 그랬다. 상대방이 말을 시킬 때까지 들지 않았다. 길고 긴 침묵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도 말이 없자 남자가 사라졌나 싶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못 볼 것을 보았다. 두 번 쳐다보기 민망할 얼굴이었다. 겸연쩍어하며 고개 돌려 성을 물으니 청주 한 씨라고 했다. 그도 효순을 쳐다보지 않았다. 넓지 않은 이마가 누구와 닮은 구석이 있는 늙은 남자를 실눈을 뜨고 보니 남자가 멈칫하며 아들과 하직 인사나 하고 오라며 내쫓았다. 천사의 날개를 타고 내려오다 멀리 아래로 용연이 보였다. 향유고래의 정액으로 가득 찬 듯한 몽환적인 연못이었다. 수컷 향유고래에서 나오는 흙냄새와 사향 냄새가 버무려진 용연향이 유혹했다. 그곳에 몸을 던져 영원한 잠에 빠지고 싶었다. 날개에서 뛰어내렸다. 그 순간 두려움으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사람 살려!”
  소리 지르며 깨어나는 노인을 어깨 넓은 남자가 안아 일으켰다. 아들이 노인에게 소야와 아들의 돌보미 바통터치 상황을 전국체전 이어달리기 중개 방송하듯 반복했지만 소용없었다.  
  “성이 청주 한 씨인가?” 박 씨 아들에게 그녀가 또 물었다.  
  아들이 소야에게 문자로 재확인했다. 한 소야, 청주 한 씨가 맞는다고 노인에게 알려주었다.
   “어머니, 어제는 왜 청주 한 씨를 찾으셨어요?” 상태가 좋아진 노인에게 아들이 물었다.
  “이름은 모르고 성만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이가 한씨 거던..”
  노인의 아들이 전화로 확인하니 소야의 할아버지는 백세를 찍고 돌아가셨는데 그게 한 달 전쯤이었다. 소야가 돌보미 알바를 자청한 것도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던 할아버지와 함께 화홍문에 가고 싶었는데 못 가고 있던 중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다. 과도한 예방주사 때문인지 파킨슨병 때문이지는 알 수 없었다. 2주간 효순이 소야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을 돌이켜보니 할머니가 누군가를 오래 기다려온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요양원에 보내도 괜찮아. 나를 요양원에 넣어두고 너희 가족에게 가거라.”효순의 아들이 최근 그녀가 자주 했던 말을 떠올렸다.
   노인이 당신과 아들의 가족을 분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효순 부부는 금슬 좋은 부부였다.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아들은 어머니와 한 씨의 사연을 더 알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하늘 나라로 가기 전까지 소야와의 소통을 끊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잘 살았던 비결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었다. 70세를 못 넘긴다던 약골 효순이 백세 문 앞에까지 오게 된 비결이 그것이었다. 효순의 아들을 응원하는 천사의 음성이 들렸다.
  "추억은 자세히 들춰내지 말아요. 그리움이 타버리면 사랑의 씨앗도 타서 재가 되어요. 마음 저린 미련은 마음 어린 추억으로 간직해요. 우연을 통해 재회를 꿈꾸지 말아요. 실망밖에 남지 않아요. 만나서 손이라도 잡고 싶을 때는 화홍문 폭포수에서 혼자지만 함께 상상의 탱고를 춰요. 함께 잠이라도 자고 싶으면 방화수류정 툇마루에 혼자지만 둘이서 나란히 누워요. 함께 여행하고 싶으면 혼자지만 함께 플라잉 수원에 올라요. 가슴에 묻을 기억의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리면 화성보다 아름다운 성이 될 거예요. 최후에 성의 보루가 완공되어야 해요. 사랑 없이 살수 없는 인간에게 추억은 현재를 지탱하는 보루니까요”
  멀리 보이는 봉화로의 불이 꺼지고 노인은 다 잊었다. 방화수류정, 화홍정에서 생긴 일들을 아들에게 들려주지 못했다. 빨간 장화의 '사랑에 빠진 98세 노인'도 잊었다. 그래도 자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뇌신경을 되살리는 연구원으로 자란 두 손주의 이름은 잊지 않았다. 아들을 보면 아기가 된다는 주간보호센타 선생님 말씀이 아들의 뇌를 강타했다. 그리움을 잊지 않도록 멀고 먼 요양원으로 보내드려야 하는지에 대해 고심했다. 두려움 없는 바닷새를 닮은 노인을 닮은 독생자 아들은 앞날을 예단하지 않는다. 자기가 만들어가는 미래 외에는 징후 탐험도 하지 않는다. 과거가 연근 마디처럼 끈적끈적하게 현재에 매달려 있지도 않다. 효순의 기억은 조각조각 추억이 되었다. 추억은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동력을 낳았다. 과거의 상처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리움을 견딘 힘은 현재를 사랑하는 힘이 된다. 그것을 먹고 희망이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끝 (coreit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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