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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칼립투스 나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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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2-08-03 08:51

박병호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노인이 걷는다. 누가 뭐래도, 초원에서는 볏짚으로 만든 신발만을 고집하는 노인이다. 그가 발걸음을 크게 떼면서 위엄 있게 들판을 천천히 걷는다. 오직 한 소년만이 노인의 뒤를 따르고 있다. 소년의 뒤는 작은 반달가슴곰을 닮은 태즈메니아 데빌이 따라 걷는다. 천 주나 되는 배롱나무가 잘 자라도록 잔 가지치기를 한나절 만에 끝낸 뒤다. 열이 난 몸을 식혀야 했다. 청회색을 띤 흰색의 매끄러운 줄기와 회녹색의 둥근 잎을 뽐내는 유칼립투스 나무 그늘에 모여 앉았다. 밀짚모자를 벗으니 노인의 반듯한 이마가 드러난다. 남극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산 정상의 책상 바위, 웰링턴 마운틴에 반사되어 그의 이마에 불어 닥친다. 은은한 미풍으로 선선해진 늦은 오후의 공기였다. 노인은 나무 키우는 노인 농부라기보다는 꼿꼿한 노학자나 반듯한 은퇴 목사에 가까운 풍모다. 노인이 소년의 이마에 남은 땀방울을 손바닥으로 찬찬히 훔치며 묻는다.
“주머니곰은 왜 데려왔니?”
“할아버지의 친구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노인은 청소년이 아닌 다른 친구는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소년은 자신의 나이가 어려서 노인의 진정한 친구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했다. 자기가 데려온 태즈메니아 데빌이 사람의 나이로 치면 노인과 비슷한 연령대라고 하며 그를 새 친구로 맞이할 것을 권했다. 노인이 소년의 작은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저 곰 같기도 하고 너구리 같기도 한 녀석이 여섯 살이라고 했지?”
“네, 할아버지.”
“그렇다면 이미 천수를 다했구나. 나는 나보다 나이 많은 친구는 내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아.”
노인은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친구는 사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누구나 예외 없이 떠나간다는 것을 잘 알지만, 친구가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 모습을 가까이서 적나라하게 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이유는 자기 뇌의 신경전달물질 보호를 위해서였다. 소년은 천사가 악마의 탈을 쓰고 있는 불쌍한 악마에게 노인의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했다. 소년이 태즈메니아 데빌을 바라보면서 노인의 한 손을 자기의 작은 두손으로 포개며 말했다.
“저 녀석, 악마가 아니에요.”
“그가 마리아 섬의 요정 펭귄을 죽이지 않았다는 건가?”
“네, 요정 펭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작은, 슴새 한 마리도 건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섬에 요정 펭귄과 슴새가 한 마리도 남지 않았으니, 살해당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제 발로 사라져갔다는 것인가? 자네가 증명해 낼 수 있겠어?”
소년이 마리아 섬에서 겪은 일을 얘기하기 시작하려는 순간 노인이 물었다.
“증명을 인정 받으려면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은 그 섬에 갔어야 하네”
“네, 랜돌프 형과 함께 마리아 섬에 있을 때였으니 그 요건을 충족하고도 남습니다. 스컹크와 태즈메니아 데빌 중 누가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지 비교하기 위해서 태즈메니아 데빌을 자세히 관찰하게 되었지요.”
“형을 따라서, 아니면 형을 찾아서 그 섬에 간 거네. 형은 왜 그 섬에 들어갔지?”
“냄새측정기와 전자 코를 개발하기 위해 수의학과 전자통신공학 복수전공을 선택한 형이 대학 입학 후 첫 멤버십 트레이닝에 참여했다가 선배들 강압에 의해 독주를 마신 후 바닷물에 뛰어 들어 죽었거든요.”
“따뜻한 봄날에도 남극에서 흘러오는 바닷물은 차갑기가 얼음장 같다는 것을 대학생인 형이 몰랐다는 말인가?”
“모를 리야 있겠어요? 정상을 비정상으로 만드는 술이 문제지요.”
“그런데, 죽은 사람과 함께 마리아 섬에 있었다는 건가?”
“기적이 일어났어요. 백사장 모래 속에 묻힌 후 3일 만에, 형이 스스로 살아 깨어 나왔습니다.”
“형이 예수도 아닌데, 누가 그걸 믿겠는가?”
“그렇지만 분명합니다. 하늘의 눈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무덤 새 새끼들이 깊은 모래 속에 묻힌 알을 깨고 모래 밖으로 올라오는 것처럼 형도 그렇게 깨어 나왔으니까요.”
“자네가 직접 두 눈으로 보았는가?”
“네, 아빠와 함께 보았습니다. 형의 시신을 꺼내서 소렐의 교회 묘원으로 옮겨 오기 위해 아빠와 함께 모래를 파기 시작했을 때였으니까요.”
“깨어 나온 형이 건강한 모습이었다는 말인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기 위해 마리아 섬을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면.”
“이상한 일이예요. 놀란 제가 잠깐 까무러쳤다가 정신 차리고 다시 살펴보아도 살아나온 형은 분명히 죽은 형이 맞는데, 죽기 전보다 더 인상 좋은 모습으로 변해있었거든요.”
“놀랄 일이네! 월남전에서 무수히 죽어 나간 사람들 속에 3년을 살면서도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사건이네. 이제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내 한평생 처음이기도 하고. 이런 괴이한 사건은.”
”미소 지을 때 빼고는 보조개가 없었는데, 말을 할 때도 볼에 보조개가 생기는 얼굴로 변해있었습니다.”
“미소 띤 채 뭐라고 말하던가?”
“아빠에게 삽을 들고 뭐하고 있냐고 물었어요.”
“언제 한번 확인하고 싶네. 랜돌프의 과거와 현재, 두 얼굴을.”
“얼굴만이 아닙니다. 코도 냄새를 잘 맡는 코로 변한 겁니다. 냄새를 못 맡는 자기 대신 냄새를 잘 맡을 전자 코를 연구 분야로 선택할 정도로 자기 코에 심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소년은 형이 모래 무덤 속에서 깨어 나와 태즈메니아 데빌의 냄새가 바람 불어오는 방향에서 불어온다며 그쪽으로 그를 찾아 나섰다고 했다. 형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아빠는 당신 일정상 마리아 섬을 먼저 떠나갔고 형과 소년은 섬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르는 끝과 끝을 살피며 걸었지만, 그 어디에도 요정 펭귄과 슴새의 흔적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태즈메니아 데빌이 그들을 몰살시켰다면 그들의 깃털 정도는 섬 이곳저곳에서 나뒹굴고 있어야 했다. 소년이 형도 일반 사람들처럼 태즈메니아 데빌이 그 귀여운 요정 펭귄을 한 마리도 남겨놓지 않고 다 죽였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형은 이렇게 대답했다.
“마리아 섬, 현장에 들어와서 보고 요정 펭귄은 몰라도 쇠부리슴새를 놓고 보면, 그들이 살해당하지 않고 스스로 떠나갔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다 자라도 3, 40cm에 불과한 작은 슴새는 적이 나타나면 재빨리 모래를 파고들어 숨기 때문에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몰살당할 동물이 아니거든. 그것도 새털 하나의 흔적도 없이.”
해가 어느덧 웰링턴 마운틴 정상을 향해 수직 낙하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어둠의 속도가 몇 배로 빨라지는 시간이라 노인과 소년은 일어나 걸으며 빠르게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태즈먼해가 육지를 파고들어 강과 골짜기를 만들어 놓은 그 강변을 따라 유칼립투스 숲길이 펼쳐져 있다. 그 길을 따라 언덕 위에 올라 온종일 걸으면 웰링턴 마운틴에 닿게 된다. 남극의 찬 바람을 막아주는 마운틴 정상에서 정남 쪽을 바라보면 아스라이 노인의 배롱나무 숲이 내려다 보인다. 멀리 책상처럼 평탄한 모양으로 서 있는 산봉우리에 거의 닿을 것 같은 태양이 마지막 열정을 발산하고, 산 아래로 길게 내리꽂는 햇살이 초록 초원의 숲길에 키 작은 노인과 키 큰 소년의 두 그림자를 시침과 분침처럼 짧고 길게 뿌려댔다. 차양이 큰 노인의 밀짚모자는 키 큰 유칼립투스 숲 사이로 파고드는 햇살을 막아냈고 뒤로는 검고 동그란 그림자를 땅에 그려댔다. 열기를 충분히 식혀 시원해진 노인은 순례자처럼 양손에 지팡이도 없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걸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고요한 눈으로 그가 만든 배롱나무 숲과 소년과 주머니곰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저 태즈메니아 데빌의 나이만큼 키워온 배롱나무 숲, 심은 지 처음 1, 2년, 그들이 자리 잡을 동안, 절반에 가까운 녀석들이 싹을 틔워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주 힘 들었지.“
“그 아픔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할아버지?”
“내가 나를 그곳에 심었지.”
“알 듯 말 듯 하지만 모르겠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내가 그들을 선택해 개량했고, 다행히도 아직은 50%나 되는 녀석들이 잘 자라주고 있는 그곳에 내가 죽으면 화장시키지 말고 내 몸을 그대로 그곳에 묻으려고 한다네. 자네가 지금 내 말의 증인이 될 수 있지?” 내 자식들이 나를 화장하려고 들 때 그들을 가로막으며 지금 내 말을 그대로 전달해 줄 수 있냐고.”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그런데 그들이 제 말을 안 믿어주면 어쩌지요?”
“오늘 밤 자기 전에 오늘 일어났던 일들과 나와의 대화를 시간 순서로 그대로 일기장에 적어 놓게나.”
“네, 할아버지.”
“한 가지 덧붙이게. 내가 부탁했다고.”
“뭘요?”
“제일 잘 생겼으나 제일 키가 작은 녀석에게 내 이름표를 붙이고 그 나무 아래에 나를 묻어달라고.”
“배롱나무는 어떻게 생겨야 잘생겼다고 하지요?”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할아버지는 갓이 핀 송이버섯 모양으로 자라난 배롱나무를 제일 잘생겼다고 생각했다고 적어 놓게.”
소년은 배롱나무 숲에 되돌아가자고 졸랐다. 5리 길을 태즈메니아 데빌을 데리고 걸어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라고 해도 소년은 졸라댔다. 원래 호기심이 한 번 꽂히면 낮과 밤을 구분하지 않는 소년이었다. 태즈메니아 데빌은 아까 쉬었던 유칼립투스 나무 아래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면, 그대로 있을 거라고 하며 노인을 졸랐다. 배롱나무 숲에 도착하니 해는 져도 아직 명암과 색상을 구분할 정도는 되었다. 노인은 꽃이 피려면 3개월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꽃 색깔에 상관없이 원자탄을 터뜨리면 피어오르는 구름처럼 생긴 모양의 배롱나무를 3, 4개 골랐고 소년은 그곳에 오늘의 날짜와 시간을 기록한 이름표를 달았다. 나중에 노인이 죽은 후 기준으로 제일 잘생긴 녀석을 고르겠다고 하며 노인의 기분을 살피며 말했다.
“할아버지 제가 자라 할아버지 나이가 되었을 때 지금 할아버지께 나의 역할을 해 줄 소년을 어디서 구하지요?"
“그건 느낌으로 다가오지.”
“할아버지는 그 느낌이 제가 태즈메니아 데빌을 좋아하는 것을 본 이후 다가왔는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게 선명히 그림 그릴 필요는 없다네. 보이지 않는 것은 형태가 드러나지 않아야 오래오래 존재하니까.”
소년은 노인의 이 말을 일기장에 적어두고 그 의미를 자라면서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태즈매니아 데빌이 기다리고 있던 그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그가 필시 악마를 자기네 집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어떤 사람의 짓으로 그가 숨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를 찾아서 마리아 섬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하니 노인이 적극적으로 거들었다.
“아마 마을 반대 방향으로 갔을 거네.”
“그를 쫓아낼 만한 동물은 사람뿐이니까요.”
“못 찾더라도 절망은 하지 말게. 절망이 창의력을 키워주니까.”

노인은 웰링턴 마운틴을 뒤로 하고 태즈먼해를 바라보는 위치에 배롱나무 숲을 가꾸었다. 핑크빛 꽃의 배롱나무를 수십번의 실패 끝에 개량에 성공해서 꽃의 크기는 더 작지만, 향기는 더 진한 신품종 보라색 배롱나무 꽃나무를 탄생시켰노라고 했다. 소년이 앞으로의 꿈에 관해 물으니 나무 크기는 더 작지만, 향기가 더 진한 보라색 라벤더 같은 배롱나무를 만들 거라고 했다. 노인의 도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는 배롱나무 꽃향기가 라벤더를 뛰어넘도록 매년 론세스톤의 라벤더밭을 방문해 진한 향기를 내뿜는 원인을 찾아왔다. 노인은 키가 작은 라벤더처럼 배롱나무의 키를 라벤더 크기로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라벤다밭의 상상은 다시 유칼립투스 나무 아래 현실에 도착했다. 그때 태즈메니아 데빌이 유칼립투스 숲속에서 뛰쳐나와 소년에게 안겼다. 소년이 태즈메니아 데빌을 안고 노인에게 말했다.
“이 촉촉한 눈 좀 보세요. 우리를 찾기 위해 눈물 흘리며 숲속을 헤맨 게 분명해요.”
“이 녀석은 살아 있는 동물을 공격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지독한 냄새와 못생긴 풍모, 그리고 고약스러운 소리만으로 악마라고 이름을 잘 못 붙여 놓은 거예요.”
”동물은 죽은 사체만을 먹는다고 했지?”
“네, 할아버지, 얘는 숲의 청소부예요. 녀석이 없다면 동물의 사체가 풍기는 더 지독한 냄새로 온 숲이 진동할 거예요.”
“그 자리에 기다리지 않고 왜 숲으로 도망갔을까?”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 그가 어느 인간이 그를 보이지 않는 숲속으로 쫓아내니 고분고분 유칼립투스 숲으로 들어갔겠지요.”
“마리아 섬에 태즈메니아 데빌만 살아남은 이유는 찾았는가?”
“형의 느낌이 맞는다고 봐요. 마리아 섬 터줏대감인 요정 펭귄과 쇠부리슴새는 그들 스스로 물러난 거지요.”
“왜 그랬을까?”
“못생기고 지독한 냄새와 괴이한 소리를 내는 동물이 무서웠겠지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공간을 이동하는 조류들이 떼를 지어 신속히 이동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니까.”
“그들이 어느 섬으로 이동해 갔다고 생각하세요?”
“갈 곳은 딱 한 곳뿐이지.”
“어디지요?”
“알아맞혀 보게. 동물들은 집단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느낄 때 더 열악한 환경 공간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거야.”
“사람이 살만한 환경이 못 되는 무인도가 되겠네요?”
“자기들을 해칠 동물이 접근해 오기 힘든 곳, 호바트에서 남동쪽으로 1,500km가 인간에게는 먼 거리지만 그들에게는 멀지 않는 곳이지. 특히 하늘을 나는 쇠부리슴새에게는 더더욱.”
해가 순식간에 웰링턴 마운틴 뒤로 뚝 떨어지고도 시간이 꽤 흐르니 어느새 어둠이 바다를 뒤덮어오고 그들은 헌팅 필드에 도착해 있었다. 소년은 그날만큼은 노인과 밤새 못다 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내일은 내일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갈림길에서 노인이 소년에게 물었다.
“형은 학교로 돌아갔는가?”
“형의 달라진 모습에 혹시 귀신이 아닐까 싶어 겁을 먹고는 섬에서 형을 따라 나오지 않았어요. 마리아 섬에 더 남아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먼저 보냈고. 형이 떠난 후 다음 배로 곧장 섬을 빠져나왔지요”
“형이 친숙한 모습이 아니던가?”
“죽었다 살아났다는 것만 생각하지 않으면 친숙하지 않은 모습도 아닌데 그랬어요.”
“3일간이나 모래 속에서 어떻게 숨을 쉬고 있었을까?”
“숨이 끊어졌다고 했으니 확실히 죽긴 죽었던 것 같아요.”
“몇 가지 빼고는 형의 모습 그대로 맞는 거고?”
“네, 할아버지. 나쁜 점이 좋게 바뀐 점 빼고는요.”
“내가 한 번 만나보고 물어보고 떠보고 해야겠네.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었는지.”
“형도 자기가 죽었다 살아났다는 점을 아는 것 같았어요.”
“요즘 과학이 발달해 인간이 상상하지 못할 일들이 생기고 있다는데 복제공학이나 뇌재생학 교수님들 찾아가서 대화해 볼 필요가 있겠네.”
“네, 할아버지.”
노인과 소년의 헌팅 필드 갈림길에서도 커다란 유칼립투스 나무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곳에 와서야 노인은 노란 밀짚모자와 노란빛 바랜 짚신을 벗어 던지며 물었다.
“주머니곰에게 내가 가르쳐줄 일이 뭐지?”
“테즈매니아 데빌이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악마가 아닌 주머니곰으로 바꿔 부르는 것을 도와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가 이름 가지고 연연해하지 않네요. 사람들이 그들을 태즈매니아 악마로 불러도 상관없다고 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자기들의 마음 중앙에 자신들은 악마가 아니고 환경을 청소하는 진공 청소부로 새겨놓고만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날 밤, 달빛은 웰링턴 마운틴 남쪽 헌팅 필드 갈림길에서 풀씨 한 톨이 아파할까 봐 들판에서 짚신을 신고 다니다 집 가까이에 와서야 불편한 신발을 벗어 던지는 노인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고층빌딩보다 높은 키의 유칼립투스 나무는 하늘에서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꽃이 피기 전에 꽃받침이 꽃의 내부를 완전히 둘러싸듯이 노인은 동글동글한 눈망울을 굴리는 태즈매니아 데빌을 감싸고 있었다. ( coreits14@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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