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숙려 / 사)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장
세상에는 세 종류의 벗이 있다고 했다.
그대를 사랑하는 벗, 잊어버리는 벗, 미워하는 벗이라 했다.
다람쥐 형제가 놀다간 나뭇가지에 밤사이 눈이 와서 소복이 쌓여있다. 뜨거운 커피 한 잔
을 놓고 새삼 유년 시절의 애틋한 그리움이 솟구치다 보니 이런저런 모습들이 떠오르는 아
침이다. 벗이란 무엇으로 남는가! .
애틋이도 못 잊어 사랑으로 말하던 친구가 있었다. 우린 어린 시절 아래 윗동네에서 자랐었
다. 철없던 시절 개울에서 물장구도 치고 가재도 잡으면서 푸른 여름을 보냈으며 가을 햇살
에 잘 익은 사과처럼 싱싱한 유년과 더불어 사춘기를 맞았다. 언제부턴가 우리들은 어디에서
나온 심사였는지 서로를 보면 쑥스럽고 부끄러워져 숨고 슬슬 피해 다니곤 했다.
사춘기의 미묘한 감정이 만들어 내는 숨바꼭질이었을 것이다. 숨으면 찾아내고자 하는 술래
처럼 먼발치에서 가슴을 설레기도 하면서 끝내 찾아낼 수 없도록 꼭꼭 숨곤 했다.
그렇게 사춘기를 보내면서 우리들은 고향을 떠나 진학하게 되었었다. 부산으로 진주로 흩어
지면서 하나둘 잊어가고 있었다. 늘 새로운 곳에서는 또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기 마련이다.
오뉴월 햇살처럼 젊은 날의 세월은 참 길기도 하였다. 나는 긴 터널을 빠져나온 후의 새처럼
참으로 새로운 하늘을 본 듯 사랑에 빠졌고 지금까지의 모든 일 들이 이 사랑을 위하여
존재한 것으로 여겨졌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존재를 변화시키고 이제는 추억만 남긴다.
그토록 애절히 사랑을 호소하던 K, 한마디 말도 못 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내 창가에 편지를
밀어 넣던 J, 언제 어디서나 내가 가는 곳에는 눈물 가득한 크다란 눈으로 바라보고 섰던 S,
종이학을 접어서 내가 다니는 길목에 뿌려두던 M은, 민방위 훈련 중 깜빡 내 생각에 총알을
맞을 뻔 하였다면서 대학 노트 두 권을 내밀었었다. 깨알처럼 일 주일간 훈련 중 자기 연정
을 담은 마음이라 하였다. 결국 그 연서마저도 받지 않아 그를 슬프게 했지만 사랑을 위하여
젊음은 눈물겹도록 집착하고 자기표현과 감정을 전하려 하였었다. 꿈많은 처녀로서 누구나
그러했듯이 나 또한 젊은 날의 자존심을 대쪽 같이 새우며 푸른 초원에서 바람처럼 날아올
것 같은 아름다운 왕자를 꿈꾸며 결백하게 마음을 가꾸고자 했다. 그날에 펼칠 예쁜 마음을
위하여 이슬처럼 맑아 있고 싶었던 것이다. 드디어 나는 기다리던 왕자를 만났고 행복한 젊은
날을 꿈처럼 살았었다. 세상은 공평한 것인가. 신은 질투가 많다고 하였던가. 이제는 신이 책
임져야 할 부분만 남은 것이다. 나는 홀로 나비가 되어 날다가 서러운 마음을 노래하는 시인
이 되었고 세월은 그렇게 갔다.
어느 날 나를 찾아낸 M, 눈물처럼 다가왔다. 내 손을 꼭 잡고 연민의 가슴을 눈물로 바라보
던 반백의 철민. 잔설을 이고 저명인사가 되어 있던 철민. 그러나 내 앞에서 울고 있는 철민은
물장구치고 돌맹이 들치며 가재 잡던 그 개구쟁이 사내아이 철민이였고 중학교 입학하
던 날 영어 알파벳을 적어서 내 손에 쥐어주고 달아나던 까까머리 소년 철민이었다. 가을
들녘에서 보랏빛 구절초 한 아름을 안겨주며 멀리 이사 가게 되었다고 눈물처럼 말하던 소
년 철민이었다. 다시 찾은 친구는 그토록 아름다운 우정으로 나를 대우해 주었다. 그는 내게
힘이 되려 노력하고 있었다. 행여라도 나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으려 최선의 배려를 하는 것
을 보면서 나는 모르는 척 그러나 속마음이야 어찌 고맙지 않았겠는가.
친구란 친구로서의 인연으로 살아야 하나 보다 싶었다. 그렇게 봄은 가고 여름도 가고 또
가을도 어김없이 순리대로 오고 갔다. 세월이 약이라고 아무도 치료해 줄 수 없는 것들은
세월이 알아서 감싸 주었다. 내가 세월을 계산하는 데는 아직도 이상한 버릇이 있다. 그래서
가끔 자신에게 되묻곤 한다. “아직도 그것 밖에 안되었어?” 혹은 “벌써 그렇게나 되었나?” 나
는 이 두 의문사에 대한 시간 계산으로 기분을 나누고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선자의
마음일 때와 후자의 마음일 때 기분이 달라져 있고 내가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가를 혼돈하지
않아야 하기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곤 했다. 혼자 길을 떠나다 보면 홀가분하여
좋기도 했지만 때론 돌아오는 길목에서 눈물이 될 때가 허다했기에 그런 날이면 곁에 와 앉아
주던 말 없던 자리여도 친구란 좋은 것이구나 여겨지던 날이 있었다. 한 잔 술도 못하고 부루
스 한 곡도 못 춘다고 질책도 받았지만 조용한 물가 찻집에서 애잔한 그 눈물의 시간을 넘길
수 있게 지켜보아 주기만 하여도 위안이 되던 날이 아름다웠다. 그렇게 세월은 가고 머리에 찬
이슬이 내리는 희수의 언덕에서, 향수에 젖듯 아름다웠던 귀한 그 벗들이 가슴에서 소리를 낸다.
나를 잊어버리지 않는 벗, 미워하지 않는 벗, 그리하여 사랑하는 벗이 하나쯤 있다면 가슴에
휘파람을 일으키는 허허한 삶에서 위안이 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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