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봄, 그 봄

권은경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8-04-04 08:42

권은경 / 캐나다 한국문협
 
거리마다 수북이 쌓여있던 흰 눈이 녹아 내리고, 누런 잔디가 어색한 듯 고개를 내민다. 요 며칠 봄볕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틈에 더 따뜻하고, 환하게 세상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눈을 가지고 놀던 아이들의 얼굴에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아쉬움이 드리워져 있다. “눈이 다 어디 갔지? 지금은 겨울이에요? 봄이에요?” 파란 눈을 반짝이는 아이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묻는다. “봄이 오는 중이야.” 나는 아이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주디는 겨울이 좋아요? 봄이 좋아요?” 아이가 다시 묻는다.
 ‘글쎄……’
아이들은 하늘에서 흰 눈이 선물 같이 내리고, 크리스마스가 있고, 따뜻한 핫 초콜릿을 홀짝이는 겨울이 마냥 좋기만 한 모양이다. 겨울을 보내는 마음이 못내 서운한지 눈이 녹으면서 만들어진 웅덩이를 바라보며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는 그렇게 겨울과 작별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겨울을 보내는 아쉬움도 금세 뒤로 한 채 물웅덩이 위를 뛰어다니며 까르르 까르르 명랑한 웃음을 토해냈다. 눈이 녹아 내리고 한결 따뜻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아이들에게 찾아온 봄은 내가 느끼는 봄과는 사뭇 다른 듯하다. 아이들에게 봄은 겨울을 밀어내고 찾아온 뜻밖의 친구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 다가올 봄은 고단한 하루를 살아내게 하는 소망의 창이었고, 긴긴 기다림 끝에 당도하게 될 영광의 날이었다. 
 
유난히 추울 거라는 겨울을 나기 위해 두툼한 점퍼와 털 부츠를 장만했었다. 그러나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는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갑기만 했다. 그것은 비단 혹독한 추위 탓만은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인간 본연의 쓸쓸함과 외로움 때문이었고, 인간에 대한 신뢰의 상실과 정신의 세속화로 인한 갈등이 마음속에서 눈 폭풍을 만들고 있었던 탓이다. 인간은 덧없이 떠도는 차디찬 상념을 끌어안고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눈물이 고인 마음은 쉽게 얼어붙기 일쑤였고 때때로 몰아치는 칼 바람은 살점을 도려냈다. 나는 한겨울의 추위와 그렇게 마주할 때면 나무가 부러웠다.
 
나무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자신의 몸 안에 있는 한 방울의 물도 아낌없이 뿌리로 흘려 보낸다. 만약 자신의 가지 끝에 매달린 나뭇잎 하나라도 더 소유하려 들었다면 나무는 그로 인해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못내 얼어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존재의 온전함을 바라는 나무는 때를 따라 비울 줄 알고, 다가올 때를 준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봄이 오면 다시 싹을 틔우고, 잎을 푸르게 물들이며 보기 좋고 맛 좋은 열매를 품는다. 위대한 자연 앞에 서서 한껏 작아진 자아와 대면할 때면 나는 부끄러움에 곧잘 고개를 떨구곤 한다. 그러나 살아서 다시 봄을 맞이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참 뿌듯한 일이다. 나무처럼 온전히 비울 수 없어 마음에 남아 있던 물기가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진창이 되기 일쑤였지만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늘 새로운 길을 제시하며, 기나긴 겨울을 얼어 죽지 않고 견디게 해 주었다. 나무처럼 고고하고 위엄 있는 모습은 아니지만 추운 겨울을 견뎌내고 봄을 맞이하는 모든 것은 참으로 아름답다. 

지난겨울은 너무도 혹독했고,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더욱 간절했다. 
“주디는 겨울이 좋아요? 봄이 좋아요?” 아이의 물음에 나는 비로소 입을 연다. 
“추운 겨울 뒤에 오는 봄, 그 봄이 좋아!”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1.23세. 대학을 마치고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들어간 나의 첫 직장은 강북구 미아동 소재 S여중이었다. 첫 출근 날 아직 군대도 미필인 시절, 솜털이 뽀얀 홍안의 청년이 여중생의 수업을 들어간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리셨는지 교감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러 세워 다짐을 하신다.“민 선생, 오늘 수업을 들어가게 되면 무조건 민 선생은 딸이 하나 있는 애 아빠라고 자기 소개를 하시고, 학생들이 딸 이름을 혹시 묻거든 ‘들레’라고 하세요.”라며...
민완기
삼겹살 2024.04.08 (월)
아들이 군대 간다고 둥지를 떠나고문 선생은 중첩된 설움을 곰 삭이며외롭다는 말 대신삼겹살 한 절음 불판에 그슬렸다사방에 튀는 기름 파편을 손등이 접수하며그렇게, 모르는 듯 타들어가고 있다 나무젓가락 사이 낑긴 고기가숨이 붙어 더 살아갈 날을 깨우고 있다참기름장에 발라 입에 넣고떠난 가족을 씹어 그렇게 삼켜 버렸다외로움은 콧날에 상큼하다는 말겨자 한입 넣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혼미한 푸념을 담배 연기처럼 뱉어버리고앉았던...
김경래
팔자를 생각하다 2024.04.08 (월)
 가져가야 할 짐들을 거실 가득히 늘어놓은 채, 남편은 가방에짐을 챙겨 넣고 있다. 그가 짐 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다시 떠난다는 게 실감 난다. 가방의 지퍼가 고장 났는지 닫히지 않는다고 남편이 말한다. 그를 붙잡고 싶은 내 마음이 염력을부린 듯하다.남편은 파도 치는 바다로 고생하러 가면서도 아내의 눈치를 본다. 뭘 사다 주면 좋겠느냐고 자꾸 묻는다.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드는데 눈물이 또 주책을 부린다. 냉장고 문을 열고...
정성화
봄밤 2024.04.08 (월)
부활절 날 밤겸손히 무릎을 꿇고사람의 발보다개미의 발을 씻긴다연탄재가 버려진달빛 아래저 골목길개미가 걸어간 길이사람이 걸어간 길보다더 아름답다
정호승
가로등 2024.04.02 (화)
어둡고 긴긴 밤을그대 왜 서 있는가 길고 긴 세월 동안지칠 법도 하건만은 가신 님 오시려나행여 떨며 기다리나 어두워 못 오실까 눈 밝혀 길 비추나 이 밤도 아니 오면이제 그만 쉬소서
늘샘 임윤빈
떠도는 섬 2024.04.02 (화)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는 지역을 우리는 섬이라 말한다. 어느 곳은 썰물이면 육지와 맞닿아 있다가 밀물 때면 수면위에 떠 있는 섬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망망대해에 고고히 떠 있는 섬을 외로움과 고독에 비유하는가 하면 인고를 견디는 삶을 대변하기도 한다. 물이 아니라도 우리 주변에는 섬처럼 떠 있고 고립된 모습들을 자주 보게 된다. 수많은 친구들이 있다고 하면서도 혼자가 되면 금방 외롭다하는 모습이 그렇고, 사과밭 한가운데...
자명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안에 은은한 향기가 감돌고 있다. 무슨 향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싫지 않은 냄새, 내 앞서 누군가 엘리베이터를 이용한 흔적일 것 같다.나는 향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강렬한 향은 더욱 그렇다. 화장품도 향이 짙은 것보다 있는 듯 없는 듯 수수한 것을 선호한다. 사실 냄새란 무엇이건 그 자체만으로도 나기 마련이다. 미미한 것은 미미한 대로, 짙은 것은 짙은 대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스치기만...
최원현
사순절의 약속 2024.04.02 (화)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 언약의 증거이니라만물이 소생 하는 봄의 문턱에서텅 빈 가지마다 약속이나 한 듯꽃망울이 송알 송알 맺히게 하는 일그 또한 언약의 증거일 터몸과 마음이 움츠려 들 무렵사순절을 맞이하여 고난을 당하신주님을 잠시 생각해봅니다40일 광야에서 금식하시며십자가를 짊어지고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담장 너머 새 한 마리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을 머물다가봄 소식이라도 가져오려는...
유우영
사람이 사람을 피한다. 오고 가는 사람들끼리 나누던 정다운 인사는 사라졌다. 맞은 편에서 사람이 오면 ‘누가 먼저 비껴서나’ 기 싸움을 한다. 대부분 옹고집으로 뭉친 의지(?)의 한국인이 이긴다. 그러나 덩치가 검은 곰만한 사람이 전방 1미터까지 접근하면서도 비껴 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도리 없이 내가 양보한다. 그리고는 중얼거린다. 이것 봐라. 젊은 놈이 예의도...
이원배
아프리카 대자연의 푸른 초원과 그 속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온갖 야생 동물들과 그들의 사냥 장면을 지프를 타고 관찰하는 사파리 여행은 아프리카의 상징이다. 아프리카에는 남아공의 크루그, 나미비아의 에토샤, 오카방고 델타,...
정해영
푸른 달빛이 앞마당에 내려앉은 추운 겨울이에요. 턱밑에 앞발을 모은 프린스는 은별이 누나와 헤어지던 때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비행기를 타기 전 누나는 나를 꼭 껴안고 약속했었지, 우린 다시 만날 거라고.’프린스는 며칠 전부터 시골 은별이 누나 외할머니댁에서 살게 됐어요. 오래된 한옥 마루 밑에서 살아야 하는 믿지 못할 일이 시작됐지요. 함께 살게 된 바우는...
조정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