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애 /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새해가 시작된지도 얼추 한달이 다 되어간다. 아들 내외와 같이 연말 연시를 보내려고 무거운 가방과 가방 만큼이나 부풀대로 부푼 꿈을 제 각기 지닌채 밴쿠버를 떠나 딸 아이가 살고 있는 오타와로 향하였다. 거기서는 구하기 힘들거나 좀더 비싼 한국 식품들, 즉 순대나 오징어, 멸치와 풋고추 등을 챙겨서 꾸역 꾸역 밀어 넣었지만 터질듯한 여행 가방이 조금도 짐스럽지 않았다.
"갖고 계신 옷 중에 가장 따뜻한 옷만 챙겨 오세요." 라는 딸의 충고를 따라 제일 두터운 다운 재킷과 얇게 솜으로 누벼진 바지를 차려입고 약 한 시간 지연된 비행기를 기다리던 딸 내외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남의 나라, 그나마도 각각 다른 도시에 살면서 채워졌던 외로움과 그리
움이 뭉클하고 가슴을 저미며 들어왔다. 거실에는 휘황 찬란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손녀들이 이리뛰고 저리뛰며 재잘대었다. 커다란 나무 밑에는 아직 풀지않은 선물들이 포장지에 싸인 채 옹기 종기 놓여있어서 우리가 준비한 선물도 같이놓고, 하나하나 각자의 이름이 써진 선물을 풀어보며 흐뭇하게 또는 깔깔대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오래 만나지 못했던 가족 간의 따뜻한 정이 서로간에 새록 새록 흘렀다.
저녁 상 위에 올려진 다양한 샐러드와 오븐에 소스 발라 구은 짙은 갈색의 윤 나는 돼지 갈비로 포식을 한 뒤, 팀을 갈라서 윷 놀이도 하고 어떤 사물을 몸으로 표현하여
그 이름을 알아 맞히는 게임도하면서 따스한 저녁을 만끽했다. 다섯 살인 손녀의 크리스마스 캐롤과 유치원에서 배운 춤 솜씨도 한 몫 하였다. 배가 출출해지자 잘 구어진 오징어를 땅콩과 함께 먹으니 어른들이 마시는 맥주의 거품만큼이나 모두의 기분은 두둥실 떠올라 온 집을 꽉 채웠다.
다음 날 차 두대에 나뉘어 탄 가족들은 세 시간 정도 걸려서 몬트리올의 다운타운 중심에 야경을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호텔에 짐을 풀었다. 아들 내외는 16 층, 딸 가족과 나는 14 층 객실 두개를 예약해 둔 터였다. 살을 에우는듯한 추위에 몸을 사리며 잘 발달 된 지하도를 도보로 이동하여 그야말로 불야경을 볼 수 있는 레스트랑에서 값나가는 저녁을 거하게 "위하여"도 곁들어 먹었다. 유리창을 통해서 밖을 보니 아름다운 다운타운 전경이 고스란히 보였다. 성당도 교회도 작은 공원을 배경으로 별 세계에 온 것 같았다.
이튿 날 일어나 커튼을 여니 성에가 하얗게 창을 덮고 있었다. 창문이 반달형이라 둘로 갈라져 창을 덮은 성에와 성에 사이에 보인 바깥 교회의 뾰족탑과 높은 빌딩들 그리고 호텔들이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아이들은 성에 위에 손 바닥 도장도 찍고 화살표, 동그라미, 인형과 같은 뭔지 모를 많은 기호들과 꽃들까지 손톱으로 그리는 재미에 푹 빠졌다. 이 모습을 보자니 내 어렸을 적
창호지 바른 문 틈새에 박혀있던 두 손바닥만한 크기의 유리위에 덮였던 성에가 갑자기 생각났다. 호호 입김을 불며 둥글고 세모 난 사람 얼굴도 그리고 손가락 모양으로 도장도 찍은 후 할머니께 잘 그렸느냐고 물으면 대답 대신 "손 시럽다. 이리와." 하면서 따뜻한 아랫목에 언 손을 녹여 주셨다.
성에는 기기묘묘한 어느 성채의 모습, 얼어붙은 강과 뒤엉킨 갈대, 말이 달리는 풍경도 연출했다. 성에가 일구어 낸 냇가에는 고기를 그려 넣었고 우뚝우뚝 솟은 성곽의 앞에는 예쁜 공주님이 외출한 모양도 상상하여 그렸다. 그러는 동안 작은 유리 전면은 내 동화속의 세계로 바뀌어 나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엮어내기 일쑤였다. 이 상상의 놀이는 "밥 먹어라."라는 할머니의 재촉이
있을때까지 계속되었고 밥 먹은 후 다시 본 유리에는 모든 그림이 사라지고 몇가닥 물 줄기만 흐르고 있었다. 그렸던 세계는 눈부신 창조였으나 홀연히 녹아, 상상과 현실의 틈 사이를 오가던 감성으로 내 삶 속에 갈아 앉아서 때때로 나를 찾아오곤 한다.
지난 해의 마지막 날에는 포도주와 맥주 , 쥬스 그리고 물로 채워진 가지각색의 글라스를 들고 열 부터 하나까지 숫자를 거꾸로 카운트다운하며 뉴욕 방송을 따라서 하다가 "와" 소리를 지르며 잔을 높이 쳐들어 새해를 맞이하였다. 사글거리는 눈 웃음과 다그르르 구르는 우렁찬 웃음들이 사방으로 퍼져갔다. 그리고 나서 지난 해는 안녕을 고하며 서서히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우리 뒤 저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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