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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여백이 던져준 삶의 메시지

김도형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7-10-24 13:47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수필


금난새. 어린 시절 나에게 교향악의 매력을 느끼게 해 준 것은 금난새의 현란한 지휘였다. 금난새의 역동적 팔 동작과 춤을 추는 듯한 몸동작에 음악이 올라탔다. 멋있었다. 연주자들이 주목하지 않은 듯하지만, 지휘자의 동작은 또 하나의 음악이었다. 그 지휘가 음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하는 께름칙한 질문이 마음 한편에 항상 남아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룹의 일원으로 일해보고, 이끌림을 당해보고, 조직을 만들어보고, 이끌어보기도 하면서 지휘자의 존재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지휘자의 음악색깔이 왜 중요한지도 알게 되었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금난새의 지휘는 소리를 창조해내는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지휘가 소리의 여백을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공연이 있었다. 
 
2017년 가을 한카 문학제에 초대된 브리티시 컬럼비아 소녀 합창단의 공연을 관람하였다. 소녀들의 눈과 목소리를 모아내는 지휘에 맞춰 여러 소리가 멋있게 어울려 춤을 추었다. 한 곡이 끝나고 지휘자는 큰 동작을 허공에서 멈추었다. 움직임을 멈춘 팔은 공간에 커다랗게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소녀들은 숨을 멈추었다. 세상이 멈추었다. 관객들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짧은 순간 지휘자는 정적의 음악을 탄생시켰다. 호기심이 솟아오르고, 조금 전 스쳐 간 음악이 고요 속에 내 마음을 다시 찾아 들었다. 지휘자가 합창의 여백을 만들어, 소리 없는 새로운 소리를 빚어낸 것이다. 여백이 잘 어우러진 한 편의 시를 읽는 느낌이었다. 
 
그 후 얼마 뒤, 밴쿠버 도심에 위치한 코스코의 안경원을 찾은 적이 있다. 양복을 잘 차려 입은 젊은 신사. 젊은 신사는 일본강점기 신사를 연상시키니, 영 프로페셔널 (young professional)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어떤 영 프로페셔널이 안경을 맞추는 것을 우연히 지켜보게 되었다. 이 영 프로페셔널은 안경을 고를 때와 점원과 이야기 할 때를 빼곤 연신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흔하게 접하는 모습이지만 왠지 숨 막히게 느껴졌다. 아마도 빈틈없이 깔끔해 보이는 영 프로페셔널이 휴대폰을 빈틈없이 들여다보니, 그 모습이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 듯하다. 그 순간, 브리티시 컬럼비아 소녀합창단의 지휘자가 창조해낸 소리 여백이 숨 막히는 답답함의 탈출구가 되어 나의 마음을 다시 흔들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내게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사람을 만나고 나서 멀뚱히 하늘을 보며 생각을 한다. 글을 읽고 나서 커피 위에 내 생각을 띄워본다. 삶의 빈 곳을, 시간의 여백을, 생각의 진공상태를 수시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짧은 순간들이, 지나간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내며 내가 사물과 현상을 보는 각도를 조금 틀어놓는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소녀합창단 지휘자가 만들어 낸 음악의 여백과 같은 일상의 여백인 것이다. 길지 않은, 짧지만 깊은 여백이다. 내게 이 여백은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찰나적 만남이기도 하고, 창조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기도이기도 하다. 
 
마침 큰 누님이 보내준 추석 사진이 도착했다. 검은 붓이 멋있게 쳐내려 간 산수화 옆에서 붓을 들고 찍은 사진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깨달았다. 검은 붓이 만들어 낸 여백의 아름다움을. 금난새의 지휘에도 이 여백이 있었으리라. 부족한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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