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단편소설> 그린란드

박병호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7-09-25 09:27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소설

그녀는 밴쿠버의 한 사립 지역사회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이 학교의 다른 대부분의 교사들은 15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하나의 반을 맡아서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전 과목을 모두 가르치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그녀는 한 번도 하나의 반을 맡아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이 나이든 이민자인 학생들의 영어는 듣기와 말하기가 문제라는 것을 알고부터 그랬다. 원하는 학생은 누구나 학교 도서관 2층에 마련된 러닝센터에 오면 그녀와 말하기와 듣기를 하루 30분씩 1대1로 훈련할 수 있었다. 처음 몇 년간 그녀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각자의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관심으로 많은 호기심을 쏟았다.

 

그러나 그들의 영어는 기대처럼 늘지 않았다. 그녀는 늘지 않는 학생들의 커뮤니케이션 실력이 자기의 가르침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25년째 단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하고 세월을 허송하며 살아온 과부 어부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퇴근 후 집에 와도 즐겁지가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공립대학의 공학 교수인 남편이 원래 집에까지 일을 들여다 놓은 사람이었기는 하지만 이전에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학생들과 점심시간 빼고는 온종일 말을 하고 와서 그런지 그녀 자신도 집에서는 말이 없었지만 한 마디의 대화도 없는 부부는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적인 완벽주의자는 아니었던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탈진, 무기력, 체지방 비만 등 온갖 불운한 단어들로 도배되어 갔다. 이미 자신과 동년배의 늙은 학생들인데도 학부모들이 와서 자신을 손가락질할 것만 같았다. 그 선생은 이제 확실히 불운한 마녀의 시기에 접어든 것이라고. 어느 봄날 자신보다 열 살이나 더 들어 보이는 한 남학생과의 대화가 엉뚱하게 흐른 후 그녀의 자학증세는 외부에서 탈출구를 찾는 병적인 단계로 올라왔다. 사실 그 남학생은 그녀의 영어를 못 알아듣는 게 아니라 가는 귀를 먹어서 못 들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몰랐다. 선생의 발음과 어조가 문제가 아니라 학생의 이해 부족과 처참한 듣기능력이 문제였던 것인데 그랬다.

 

어떤 높낮이 대의 주파수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자신을 감추고 선생 탓으로 돌린 그 동양에서 온 늙은 이민자의 말은 결정적 비수가 되었다. 그녀의 자학증세는 자신을 넘어 사회를 향했다. 막상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틈만 나면 캐나다를 떠나는 그녀를 보면 분명 병적 단계가 심해지고 있었다. “나의 형편없는 듣기능력으로도 너의 영어는 알아들을 수 있어.” 교직원 카페에서 늦은 점심시간에 혼자 밥을 먹다 잠깐 조는 사이에 분명히 본 헛것 같은 내면의 소리는 그녀의 자학을 더는 그만두지 않겠다는 수호천사의 신호 같았다. “스스로 다그치지 마라, 세상에 완벽은 없다!” 자신 안의 또 다른 그녀가 자력갱생의 꿈을 버린 반쪽의 그녀를 나무랐다.

 

그러나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남편의 늘어나는 체지방마저 그녀 탓인 것 같았다. 남편과 함께 비만 클리닉 환자가 되었다. 무기력과 탈진 증세를 보이며 최고 선생으로서의 자랑스럽던 열정을 잃고 있었다. 신장병, 당뇨병이 변기 속에서 뱀의 모습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기 싫어 물도 마시지 않았다. 줄담배를 피우듯 시도 때도 없이 가벼운 스낵 과자만을 입에 달았다. 아편을 써 본 적이 없지만 마치 아편중독 증세와 맞먹는 면역력 저하 중독증세가 시작되었다. 신체활동을 꺼렸다. 학교에는 이미 러닝센터를 떠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학생들로부터의 변함없는 호평이 학교에 그녀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이 떠났지만 떠나지 못하고 있던 어느 월요일, 그날은 그녀가 학교의 명령대로 브로드웨이 캠퍼스에서 전철로 서너 정거장 떨어진 다운타운 캠퍼스에서 일주일간 가르치기 위해 갔던 첫날이었다. 다음 예약 학생을 기다리던 잠시 쉬는 동안 전날 밤 그녀가 꾼 꿈이 생각났다. 그녀가 자동차가 아닌 카누를 몰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고 카누 뒤를 제법 큼직한 홍 연어 두 마리가 카누가 만들어낸 잔물결을 타고 따라오고 있었던 꿈이었다. 해몽할 틈도 없이 예정에 앞서 예약이 없었던 한 학생이 찾아왔다. 나이로 봐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할 듯한데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 늙은 남학생은 슬퍼 보이지 않았다. 좀 이상했다. “예약한 학생이 오지 않네요, 여기 그냥 앉아요?” 그녀가 말했다. “예, 감사합니다.” 서양인이 동양인의 나이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지만, 동년배로 보이는 남자가 웃음 띠며 말하니 더 끌리는 것 같았다.

 

이 남자의 미소를 보며 그녀의 허무함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잠깐 과거의 프레이저 강가로 마음이 떠났다. 동시에 그녀가 빈 배로 돌아와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는 과부 어부와 같다고 생각이 어려서 본 아버지의 모습에서 왔다는 생각을 했다. 밴쿠버섬에서 먼 서쪽으로 연어잡이를 나갔던 아버지가 빈 배로 돌아왔던 어느 날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가 돌아올 시간이면 스팁스톤 바닷가에 나가 기다렸다가 낚싯줄이며 그물이며 돛대에 감긴 돛을 나르곤 했던 어린 시절이 쏜살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어 새로 대하는 남학생의 웃는 얼굴이 사라져갔던 그녀의 호기심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의 머리는 검고 하얀 털모자가 찬란히 빛나는 은실로 군데군데 기워져 있듯이 몇 줄기의 은빛 머리카락이 아직 세지 않은 빛바랜 검정 머리카락 군집에 총총히 박혀 있었다. 선한 눈매는 선한 미소와 어울려 보는 이를 평안의 세계로 이끄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세상은 살아갈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세상이니 웃고 삽시다!’ 와 같은 얇지 않은 메시지를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이사벨 선생입니다, 여기에 이름과 학번을 쓰세요.” 러닝센터 등록부를 들이밀며 그녀가 말했다. 남자는 뚜렷하지 않은 이목구비임에도 불구하고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왔지요?” “어떻게 알았어요?” “이름이 청마네요, 청마 맞지요? 한국남학생은 잘 생겼다는 것을 수십 년 선생 경험으로 알게 되었지요.” “발음 정확하네요. 청마 맞습니다. 내가 잘생겼다는 거라면 과거 젊었을 때의 나에게만 맞는 말입니다. 그러는 이사벨은 보름달 왕비상 입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동그란 얼굴이 복스러운 미녀로 인정받았지요.” 희고 동그랗고 큰 얼굴의 이사벨에게 청마가 소리내 웃으며 화답했다. 이사벨도 참으로 오랜만에 큰 웃음을 지었다. “

 

“그린란드에는 여름철 모기떼가 극성이지요” 모기떼를 물리치기라도 하듯이 팔을 휘저으며 청마가 말했다. “갑자기 왠 그린란드지요? 내가 덴마크어를 잘한다는 것을 누구한테 듣고 왔나요?” 이사벨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여기 몰려 서 있는 학생들이 갑자기 최근에 다녀와 기억이 생생한 그린란드 모기떼처럼 느껴졌습니다. 학생들한테 인기가 매우 좋으신 것 같군요. 그린란드에 다녀온 후 덴마크어를 배우고 싶었는데 어디서 배우셨나요?” 청마가 처음처럼 웃으며 말했다. “밴쿠버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덴마크에서 대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덴마크어를 원어민처럼 하는 나도 못가 본 그린란드를 어떻게 해서 가게 되었어요?” “예, 나는 앞으로의 지구촌 개척지는 북극이고 북극권 최고의 유망지역으로 그린란드를 꼽고 있습니다.” “관광으로 간 게 아니라 비즈니스 탐사하러 갔나 보네요.” “비즈니스까진 아니어도 유망지역에 먼저 들어가면 비즈니스를 시작하기도 전에 성공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하하하!” 청마가 큰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흥미롭군요. 나는 주택 한 채 값이 50밀리온, 60밀리온씩 로켓처럼 수직으로 상승해도 신도시 하나 지을 생각이 없는 캐나다 공무원사회에 환멸을 느낍니다. 차라리 그린란드를 덴마크에서 독립시키는 데 일조하고 싶어요. 각 분야 세계 최고의 전문가를 초빙해 캐나다가 보라는 듯이 최고의 나라를 만들고 싶으니까요.” 이사벨이 반은 심각한 상태로 말했다. “최고의 나라를 간단하게 표현하면 어떤 나라입니까?” 청마가 물었다. “누구나 도시에서도 텃밭 딸린 예쁘고 아담한 집을 갖고 쌀과 밀 등 주요 곡식을 제외한 식생활의 자급자족을 이루고 사는 나라지요.” 이사벨이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절대 동의합니다.” 청마가 하이파이브를 유도하며 맞장구쳤다. “우린 마치 한 몸 한뜻의 한 사람 같습니다. 인생 후반에 만난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생각이 일치할 수도 있을까요? 사전에 각본에 짜여진 것처럼..” 연극배우처럼 청마가 말했다.

 

“그런데, 그린란드를 덴마크에서 꼭 독립시켜야 할 이유가 있나요?” 청마가 가볍게 물었다. “이민자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과거의 관대한 이민 정책 때문에 그래요.” 이사벨이 심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맞아요. 그 땅에 오면 그 땅의 사람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몸뚱이만 오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지요.” 청마가 동의했다. 청마와 이사벨은 지금까지는 서로 어긋난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 우리 실천을 위해 함께 노력할까요?” 청마가 제안했다. “내 남편은 밴쿠버에서 뼈를 묻는데요.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을 거예요.” 이사벨이 말했다. “그것마저도 우린 똑같네요. 내 아내도 마찬가지니까요.” 청마가 말했다. “좋아요, 우리 일단 네 명이 함께 한 번 만나봐요. 거기서 선언을 합시다. 그린란드 왕국을!” 그리고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함께 배를 타고 건너갑시다.” 이사벨이 말했다. “좋아요. 이사벨, 청마 크로스!” 청마가 매우 기쁘게 팔을 맞대며 말했다.

 

“그린란드에는 그곳이 어디든 길이 있는 곳의 끝에는 얼음의 바다가 펼쳐집니다. 산더미 같은 빙산들이 빙하로부터 갓 떨어져 나와 바다 위에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지요. 크고 작은 푸르른 빛의 빙산과 얼음덩어리들이 마치 하얀 설원인 듯 바다 위를 가득 메우면서 움직인답니다. 뭉쳐야 사는 새들처럼 뭉쳐 빙산들의 고향을 이루지요. 이제 갓 태어난 빙산들도 넓은 바다로 조금씩 밀려 나가며 산더미 같은 빙산들의 바다 사이에 끼어 잘도 버티고 있지요. 그 집단들 속에서 떨어져 나가면 죽음이니까요.” 청마가 그 역사상 가장 긴 영어 문장으로 말했다. “재미있네요. 그런데 영어가 이렇게 술술 나오는데 여기 온 지 몇 년 되지 않은 것 같은 데 캐나다에 오기 전에 다른 영어권에서 있다 오기라도 했나요?” 이사벨이 물었다.

 

“아 그래요. 참 내가 생각해도 이렇게 길게 영어로 말한 적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마치 나를 만나니 영어가 술술 잘도 나온다는 표현 같네요.” 이사벨이 말했다. “맞아요, 이렇게 분명한 발음으로 나를 응대해 준 사람은 이사벨이 처음입니다. 잘 들리니 잘 말하게 되는군요. 아무튼, 그린란드에 가면 생명 탄생의 신비를 보는 듯합니다. 태곳적 물을 그대로 간직한 얼음덩어리들의 바다에서 눈을 뗄 수 없습니다. 빙산들이 부딪히고 쪼개지면서 천둥 같은 굉음을 내면 사람들은 각자 간직한 엄청난 얼음덩어리들을 쪼개 분리해 내지요. 마치 요도를 가로막고 있던 결석들이 잘게 부서져 나오는 시원함 같은 거지요. 얼음덩어리 안에 압축돼 있던 공기들이 터져 나오는 폭발음과 같은 굉음은 하고 싶었으나 못다 한 수십 년간 쌓아둔 말들을 한 테 모아 쏟아 버리는 통쾌한 기분을 들게 하지요.” 청마가 그 자신이 얼음덩어리나 된 듯이 굉음같이 큰 목청으로 말했다.

 

“차가운 바람, 극성스러운 모기떼, 들개들의 울부짖음, 불면증을 일으키는 백야까지도 그렇게 시원한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겠지요?” 이사벨이 그것들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답을 유도하려는 듯이 물었다. “얼음과 바다가 만나는 장관 외에도 하나씩 생겨날 푸른 숲들이 그런 것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지요.” 청마가 역시 그런 소소한 문제들이야 별거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청마의 목덜미에는 잔주름이 생성되고 있었고 이사벨의 눈꼬리는 아래로 쳐지기 시작했지만 그린란드에 관한 공통점을 찾은 그들은 오랜만에 만난 옛친구나 된 듯이 이야기가 끊어질 줄 몰랐다. 뒤에서 기다리는 다른 이란계 여학생이 눈총을 쏘지 않았다면 끝도 없을 것 같았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광교산 계곡에서 출발해 소리 없이 흘러온 물이 수문 앞에 다다라 소용돌이쳤다. 태양이 서포루(화성 서측 성벽 위 2층 누각) 너머로 뚝 떨어지는 순간, 사나운 포성을 질렀다. 기울어지지 않고 평평하던 물이 일곱 홍예(화성의 북쪽 수문)를 지나 수직 낙하하며 갑자기 격정의 폭포수로 변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실개천보다 크고 일반 하천보다 작은 공간에 소망을 추구하는 사람, 우연의 재회를 꿈꾸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꿈들이 모여 방주의 천정...
박병호
내 인생의 강물 2023.02.06 (월)
    인생의 강물은 내 맘대로 흐르지 않는다. 누구나 그렇다. 완만하게 굽이돌며 한 없이 흐른다. 거침없이 흐르는 푸른 강물이다. 내가 나에게 끼어들 새가 없다. 일반적으로 강물에 실린 그리움과 기다림의 원천은 어머니다. 그런데 나의 그것들은 내 나이 열한 살 때, 보라색 치마에 긴팔의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온 띠동갑의 한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시집갈 나이 스물셋에 산골 초등학교에 주산 선생님으로 왔다. 살랑살랑...
박병호
노인이 걷는다. 누가 뭐래도, 초원에서는 볏짚으로 만든 신발만을 고집하는 노인이다. 그가 발걸음을 크게 떼면서 위엄 있게 들판을 천천히 걷는다. 오직 한 소년만이 노인의 뒤를 따르고 있다. 소년의 뒤는 작은 반달가슴곰을 닮은 태즈메니아 데빌이 따라 걷는다. 천 주나 되는 배롱나무가 잘 자라도록 잔 가지치기를 한나절 만에 끝낸 뒤다. 열이 난 몸을 식혀야 했다. 청회색을 띤 흰색의 매끄러운 줄기와 회녹색의 둥근 잎을 뽐내는 유칼립투스 나무...
박병호
열대우림 속 창문을 열자 햇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 순간 교실 미닫이문이 열리며 선생님이 사슴 돼지 한 마리를 끌고 들어섰다. 그 녀석은 주름이 많은 회색빛 몸통에 축 처진 갈색 꼬리를 달고 있었다. 사슴을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고, 다리가 긴 멧돼지와 비슷했다.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그를 바라보는 나에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입학 후 첫 대면 수업, 몇몇은 올 수 있지만 대부분은 안 올지 몰라. 첫 수업 일을 내일로 아는...
박병호
도전의 향기 2021.09.13 (월)
박병호 (사)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네스라는 섬에 카를로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어요. 와인 상인의 아들이었지요. 그의 가문은 옛날부터 더 나은 땅들을 찾아 바다 건너 포도밭을 일구어 왔어요. 그의 할아버지는 잉글랜드에서 시칠리아 섬으로, 아버지는 시칠리아 섬에서 네스 섬으로 왔지요.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어요. 오로지 황금색 오로 와인이라 불리는 꿈의 포도주를 만들어내기 위한 포도를 키우기...
박병호
아웃오브 오션 2021.05.25 (화)
조선일보 동화 박병호 그날은 상상했던 것보다는 차갑지 않았다. 남극의 얼음장 같은 찬물이 짙푸른 태즈먼해 수면 바로 아래까지 흘러온다. 원래는 그곳에 손을 담그려면 후다닥 넣고 빼야 한다. 까딱 늦게 빼면 동상이 들기 때문이다. 해안 육지는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데도 그런다.  잠시만이라도 선한 괴물로 변신할 수 있다는 크라켄을 찾으러 바다에 왔다. 그날은 바닷물 속에 오랫동안 손을 담글 수 있었다. 괴물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박병호
박각시나방 2020.11.23 (월)
윌리엄은 다시 뛰었다. 발바닥이 아파 멈칫했지만, 젖 먹던 힘을 다했다. 동굴을 쳐다보니 박쥐는 이미 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동굴 천정에 꽉 달라붙기 전에 잡아야 했다. 방학이 끝나가는 오늘은 잡아야 내일 학교에 가져갈 수 있었다. 그는 동굴 앞에 와서야 달리기를 멈추었다. 안으로 들어가 물이 있는 곳까지 걸었다. 발바닥 상처를 씻고 싶었으나, 박쥐부터 찾았다.   잠시 후 동굴 안으로 다른 박쥐들이 길게 줄지어 들어왔다. 몇 번 천정을...
박병호
할머니의 선물 2020.08.24 (월)
할머니의 볼록한 발등에 손을 댔다. 아직 부기가 가시지 않았다. 보통은 1, 2주면 가신다는데…“이제 통증은 가셨어요? 곧 고모가 오실 거예요.” 귀먹은 할머니의 귀에 속삭였다. 아직 주름 하나 없이탱탱한 할머니의 얼굴이 고운 주름 꽃을 펼치며 미소 짓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데창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 왔다.달칵 문이 열리자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고모!’마음속으로만 고모를 불러 보았다. 한 번도 큰 소리 내어...
박병호
광고문의
ad@vanchosun.com
Tel. 604-877-1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