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가을에 서울 나들이를 하였다.
시온합창단 한국 공연 차 나가서 9차례나 공연하였다. 이틀 밤 뒤에 세종문화회관 공연 뒤 다음날 모교회 새벽예배에 나가 또 불렀다. 내자신 노래는 잘 못하지만, 최선을 다해 연습하고 공연 하였다. 간이식한지 2년 된 사람으로 나 자신을 시험하는 계기였다고나 할까?
그리고 뜻밖에 흐뭇한 경험을 하였다.
때마침 둘째 딸이 제 남편에게 서울 구경을 시켜준다고 한국에 나왔었다. 이곳 저곳 재미있는 데도 많으련만 어머니 산소가 있는 천안에 같이 가자고 했다.
참 대견하고 감격스러웠다. 제 깜냥으론 어렸을 적 키워준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리라. 교편생활을 하는 아내 대신 어머니가 아이들을 길러주셔서 정이 많이 들었던가 보다. 나도 가끔 고국을 방문해서도 분주함을 핑계로 산소에 가지 못할 때도 있는데, 자식인 나보다 손녀가 더 낫다 싶어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아무리 피곤하고 분주해도 어찌 그 고운 청을 거절할 수 있으랴. 둘째 딸 내외와 고속버스를 타고 천안까지 가서 택시를 대절하여 어머니 산소에 갔다. 예전의 “능수버들 늘어진 천안”이 아니었다. 사통팔달의 천안을 보며 과연 교통의 요충지로구나 싶어 딸애에게 천안의 역사를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천안은 태조 왕건이 삼국의 중앙에 해당되어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 생각하였다. 또한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유관순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시작한 곳으로 알려졌다.
산소는 남향으로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각 묘지마다 번호가 적혀있는 곳을 찾아 우리 부모님이 묻혀있는 비석 앞에 서서 우리는 각자 묵도를 올렸다. 전에는 마른 북어도 올려 놓고 과일과 떡들을 진설하고 막거리를 따라 놓고 제사를 지냈다. 이제는 모두 기독교신자라 조용히 묵도를 올리며 어머니와 함께 대화 하였다.
나의 어머님은 독자인 나를 따라 캐나다에 오셔서, 몇 년 사시다가 치매로 고생하셨다. 이 때가 나의 이민 생활의 가장 어려웠던 때라고 생각한다. 나의 어머님이 평생을 뒷바라지 해주시고, 특히 대학 4년 내내 도시락을 싸주신 어머님을 잊지 못한다. 이곳 캐나다에서 운명하셨으나 묘지는 서울서 미리 사둔 천안공원에 아버님 곁에 안장해 드렸다. 그보다 먼저 돌아가신 아버님을 묻을 때 작은 딸이 네 다섯 살 때였었다.
캐나다에 이민 와서 이 작은 딸로 이민 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둘째 딸은 이민 와서 영어습득도 빨라 ESL반을 반년 만에 나와 1년 조금 지나서는 오즈의 마법사라는 연극의 사자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빅토리아 명문 사립학교 졸업시 영어와 일어에서 교과 우수상을 타기도 하였다. 현재는 밴쿠버에서 교사를 지낸 뒤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나를 평생 사랑해주신 어머님 산소를 자랑스럽게 성장해 준 딸과 함께 성묘하니 부모님께 효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또한 시간을 초월한 우리 삼대가 오붓한 다정한 시간을 가진 느낌이 들었다.
오는 길에 천안 명물인 호도과자를 사오고 싶어 원조 호도과자 가게가 어디냐고 물었다. 친절한 기사 아저씨는 역전 근처를 돌아 가게 앞에 내려 주었다. 몇 상자를 사가지고 집에 와 풀어보니 그 안에 전도지가 들어 있었다. 모든 일을 성심(誠心)으로 하면 성심(聖心)에 이르고, 삶에 큰 유익을 받는다는 말씀이 적힌 전도지 덕분에 신앙인의 자세를 새로이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호도의 유래는 천안 광덕의 특산품으로 고려 말 공신이었던 분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다음해 귀국할 때 종자 5개를 얻어 와 그의 고향인 천안에 심었다고 한다. 한데 그 과실의 이름을 알지 못하여 호지(胡)에서 가져온 복숭아(桃) 모양의 과실이라 하여 ‘호도’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호도과자는 1934년 당대 최고의 제과 기술자였던 고 심복순여사의 부군에 의해 처음 만들어져 천안의 명물이 되었다고 한다.
집에 가져와 호도과자를 먹으며 가만히 살펴보니 모양은 호도처럼 생겼으나 내게는 어머니를 떠올리는 효도과자인 셈이다. 둘째 딸 덕분에 어머니와 나, 딸애, 삼대에 걸친 끈끈한 혈육의 정도 다지고 또 딸애 내외의 효심도 듬뿍 느낄 수 있는… .
자식은 내 분신이라 했던가. 어머니가 날 보시며 느꼈던 삶의 의미를, 이제 어머니 나이가 된 내가 딸애를 바라보며 그 삶의 의미를 새긴다.
이번 서울여행은 내게 아주 큰 의미로 다가온다.
찬양여행으로 출발하여 호도과자 할머니 심복순 여사의 전도지를 통해 내 신앙의 키가 훌쩍 자라게 된 신앙여행이었다. 또한 둘째 딸 덕분에 어머니 산소에도 가보는 효도여행이 되었다.
시온합창단 한국 공연 차 나가서 9차례나 공연하였다. 이틀 밤 뒤에 세종문화회관 공연 뒤 다음날 모교회 새벽예배에 나가 또 불렀다. 내자신 노래는 잘 못하지만, 최선을 다해 연습하고 공연 하였다. 간이식한지 2년 된 사람으로 나 자신을 시험하는 계기였다고나 할까?
그리고 뜻밖에 흐뭇한 경험을 하였다.
때마침 둘째 딸이 제 남편에게 서울 구경을 시켜준다고 한국에 나왔었다. 이곳 저곳 재미있는 데도 많으련만 어머니 산소가 있는 천안에 같이 가자고 했다.
참 대견하고 감격스러웠다. 제 깜냥으론 어렸을 적 키워준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리라. 교편생활을 하는 아내 대신 어머니가 아이들을 길러주셔서 정이 많이 들었던가 보다. 나도 가끔 고국을 방문해서도 분주함을 핑계로 산소에 가지 못할 때도 있는데, 자식인 나보다 손녀가 더 낫다 싶어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아무리 피곤하고 분주해도 어찌 그 고운 청을 거절할 수 있으랴. 둘째 딸 내외와 고속버스를 타고 천안까지 가서 택시를 대절하여 어머니 산소에 갔다. 예전의 “능수버들 늘어진 천안”이 아니었다. 사통팔달의 천안을 보며 과연 교통의 요충지로구나 싶어 딸애에게 천안의 역사를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천안은 태조 왕건이 삼국의 중앙에 해당되어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 생각하였다. 또한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유관순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시작한 곳으로 알려졌다.
산소는 남향으로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각 묘지마다 번호가 적혀있는 곳을 찾아 우리 부모님이 묻혀있는 비석 앞에 서서 우리는 각자 묵도를 올렸다. 전에는 마른 북어도 올려 놓고 과일과 떡들을 진설하고 막거리를 따라 놓고 제사를 지냈다. 이제는 모두 기독교신자라 조용히 묵도를 올리며 어머니와 함께 대화 하였다.
나의 어머님은 독자인 나를 따라 캐나다에 오셔서, 몇 년 사시다가 치매로 고생하셨다. 이 때가 나의 이민 생활의 가장 어려웠던 때라고 생각한다. 나의 어머님이 평생을 뒷바라지 해주시고, 특히 대학 4년 내내 도시락을 싸주신 어머님을 잊지 못한다. 이곳 캐나다에서 운명하셨으나 묘지는 서울서 미리 사둔 천안공원에 아버님 곁에 안장해 드렸다. 그보다 먼저 돌아가신 아버님을 묻을 때 작은 딸이 네 다섯 살 때였었다.
캐나다에 이민 와서 이 작은 딸로 이민 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둘째 딸은 이민 와서 영어습득도 빨라 ESL반을 반년 만에 나와 1년 조금 지나서는 오즈의 마법사라는 연극의 사자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빅토리아 명문 사립학교 졸업시 영어와 일어에서 교과 우수상을 타기도 하였다. 현재는 밴쿠버에서 교사를 지낸 뒤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나를 평생 사랑해주신 어머님 산소를 자랑스럽게 성장해 준 딸과 함께 성묘하니 부모님께 효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또한 시간을 초월한 우리 삼대가 오붓한 다정한 시간을 가진 느낌이 들었다.
오는 길에 천안 명물인 호도과자를 사오고 싶어 원조 호도과자 가게가 어디냐고 물었다. 친절한 기사 아저씨는 역전 근처를 돌아 가게 앞에 내려 주었다. 몇 상자를 사가지고 집에 와 풀어보니 그 안에 전도지가 들어 있었다. 모든 일을 성심(誠心)으로 하면 성심(聖心)에 이르고, 삶에 큰 유익을 받는다는 말씀이 적힌 전도지 덕분에 신앙인의 자세를 새로이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호도의 유래는 천안 광덕의 특산품으로 고려 말 공신이었던 분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다음해 귀국할 때 종자 5개를 얻어 와 그의 고향인 천안에 심었다고 한다. 한데 그 과실의 이름을 알지 못하여 호지(胡)에서 가져온 복숭아(桃) 모양의 과실이라 하여 ‘호도’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호도과자는 1934년 당대 최고의 제과 기술자였던 고 심복순여사의 부군에 의해 처음 만들어져 천안의 명물이 되었다고 한다.
집에 가져와 호도과자를 먹으며 가만히 살펴보니 모양은 호도처럼 생겼으나 내게는 어머니를 떠올리는 효도과자인 셈이다. 둘째 딸 덕분에 어머니와 나, 딸애, 삼대에 걸친 끈끈한 혈육의 정도 다지고 또 딸애 내외의 효심도 듬뿍 느낄 수 있는… .
자식은 내 분신이라 했던가. 어머니가 날 보시며 느꼈던 삶의 의미를, 이제 어머니 나이가 된 내가 딸애를 바라보며 그 삶의 의미를 새긴다.
이번 서울여행은 내게 아주 큰 의미로 다가온다.
찬양여행으로 출발하여 호도과자 할머니 심복순 여사의 전도지를 통해 내 신앙의 키가 훌쩍 자라게 된 신앙여행이었다. 또한 둘째 딸 덕분에 어머니 산소에도 가보는 효도여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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