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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 의 희미한 그림자

박인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6-06-24 09:10

피난 길이었다.

엄마는 낳은지 석달된 동생을 업은채 머리에는 커다란 보퉁이를 이고 가파른 산비탈의 골짜기를 부지런히 오르고 있었다. 나는 세살 반의 어린 걸음으로 뒤를 따라가다가 멈춰서서 엄마를 부르며 울기 시작했다. 있는 힘을 다해 걸어도 엄마는 내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나는 혼자 남겨질 것 같은 두려움에 엄마를 부르고 또 불렀다. 엄마는 멈춰서서 나를 기다렸다가 내 손을 잡고 한참을 걸었다. 길이 너무 좁아서 나란히 걸을 수가 없어 엄마는 뒤에 따라오는 나를 끌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한 손으로는 머리 위에 이고있는 짐이 떨어지지 않도록 잡고 다른 손은 뒤로 돌려서 얇은 포대기를 댄 아기 엉덩이를 흘러내리지 않도록 받쳐주기위해 내 손을 다시 놓고 걷지 않을 수 없었다.

팔공산 절에 밤 늦게 도착하여 방안에 앉아 높은 불받이 위에서 작은 다발로 묶여 불을 밝혀주는 관솔 불을 보았다. 소나무 옹이로 만든 이 불은 아주 밝아서 모든 것들이 똑똑히 보였다. 깍은 머리에 회색 장삼을 입은 모습으로 의연하게 앉아 있었던 스님과 장중한 느낌을 주는 문갑에 박혀있던 윤나는 놋쇠 장식과 여닫이 고리를 비추어,  더 밝아졌다가 다시 원래로 돌아가면서 환상적인 빛의 춤사위를 창호지로 도배한 문 위에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매캐한 연기에 두어 번 기침을 했고 어른들의 가만 가만 나누는 이야기에 방해가 될까봐 얼른 고개를 숙이고 엄마 뒤로 몸을 숨겼다. 먼 거리를 걸어온 고단함과 집을 떠난 암울함에 후줄근히 젖은 우리를 사방이 벽으로 가려지는 방이 주는 안도감은 아주 어린 나의 내면에 들어와, 살아가면서 짙은 어두움에 둘러싸일 때마다 평안한 농밀함으로 나를 품어 주었다. 이곳은 할머니가 정초나 그밖의 명절, 또는 제사를 받지 못할 나이에 세상을 뜬 분들을 위하여 시주해온 잘 아는 절이었다.

몇년 후, 이야기를 재미나고 재치있게하는 고모 할머니는 " 따발총 소리가 지붕위에서 나자, 나는 젖 먹이던 아를 팽개치고 모구장 속으로 들어가서 한 자락이라도 더 덮을라고  모구장을 끌어댕겨 내 다리에 감고 있드라닝게. 내가 죽껐으닝게 아도 소용 없더라고. 또 한번은  모 싱궈 논 들판을 걸어가는디 비행기가 떼로 나타나 총알을 쏟아붓기 시작하자 모 한 포기를 뽑아서 머리를 가리고 나도 모르게 논에 엎드려 있더라고. 정신을 채리고 보닝게."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지난 이야기를 입담있게하여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분 덕분에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하늘이 푸르렀던 가을 날 하교길에 사람들이 뭔가를 보며 둥그렇게 서 있었다. 우체국 앞에서 가마니위에 눞혀진 세 명의 시신을 보고 짙은 두려움과 이제까지 맛보지 못했던 생경한 정신의 어지러움을 느꼈다. 구경꾼들은 말이 없었다. 덕유산이 가까워 휴전후에도 미처 북으로 가지 못한채 군경에 의해 사살된 공비들이었다. 그들은 미동도 없이 그냥 하늘을 보고 누워 있었다.

철저한 침묵, 완전한 정지 그리고 소통의 단절이 거기에 있었다. 우리 군인들과는 약간 다른 색깔의 군복위로 한 사람은 옆구리, 다른 한 사람은 허벅지, 남은 한 사람은 목에서 피가 나와 옷과 가마니위에 말라붙어 애처러움을 더해 주었다. 한기를 느껴 몸을 움츠리는데 가랑 잎 몇개가 바람에 날려 그들의 옆에 누웠다. 무표정했지만 해맑고 모두 열일곱이나 여덟 정도로 보이는 애띠고 깡마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오래전에 읽으면서, 지리산에서 활동하다 죽은 소설속의 인물들 하나 하나를 이들과 연결시키면서 나는 마치 오직 내가 할 일은 이 세상에서 이 책을 읽는 것 밖에 없는 것 처럼 책 속으로 빨려들어 갔었다. 어떤 산에서는 스무살 된 미국 군인이 다리에 총을 맞고 혼자 낙오되어 인근 마을 사람들이 해주는 보리밥과 국으로 연명하다가 의사의 손길도 약도 받아보지 못한채 " 마 " 를 부르며 숨지자 사람들이 양지바른 산 자락에 묻었는데 몇 년이 지나자 그의 부모가 찿아와서 슬피울며 마을분들에게 사례를 하고 유골을 파갔다는 이야기는 외갓집이 있는 동네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먼 바다를 건너와 이곳에서 둥지를 틀고 살아온 지금도 서양 아이들이 " 마미 "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보지도 못한 그 미국 군인이 생각난다. 종전이 된 이후에도 몇년 동안 우유가루, 미제 비타민, 옷가지들 등의 구호물자들은 여전히 우리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지만 싸우다 다친 상이용사들이 쇠 갈고리손을 내밀며 항의하는 모습도 전쟁이 남긴 아물지 않은 상처중의 하나였다.

우연히 호슈베이 가까운 섬에 놀러 갔다가 길 거리에 서있는 비석위에 합동으로 새겨진 네다섯명의 카나다인들 이름을 보고 묵념을 올린적이 있다. 내용은 한국전에서 전사한 나이 어린병사들의 이름과 생년 그리고 전사년도가 어렴풋이 눈에 띄었는데 모두가 죽기에는 너무도 나이가 어려서 마음이 아팠다. " 생면부지의 나라에가서 평화를 위해 싸우다 숨지다 " 라는 거룩한 행위의 의미와 찬사는 돌 기둥에 새겨진 이름들을 보는 순간 그들 부모들이 느꼈을 슬픔에 가려 뿌옇게 안개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를 내 식으로 삭이며 되뇌이고 있었다. 잔잔한 호수위로 치솟아 언뜻 언뜻 반짝이는 은빛 비늘을 보이다가 물속으로 사라지는 물고기들 처럼 기억의 편린들과 함께 그래도 나는 내 일상을 6 월 안에서 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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