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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한인문협/수필]침묵에 대하여

조정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6-20 13:46

  겨울의 침묵이 꽃으로 피어났다.
  모진 겨울바람을 견디어 낸 강진의 만덕산 동백나무 군락지는 온통 붉은빛이었다.
  연둣빛 동박새가 부리에 노란 꽃가루를 묻힌 채 공중으로 날아오를 때, 동백꽃 송이들은 툭툭 나무 밑 잔설 위로 내려앉았다. 대나무 숲이 가벼운 봄바람을 맞는 백련사에서 다산 초당까지의 길은 아암 혜장선사가 다산 정약용을 만날 설램을 안고 걷던 오솔길이었다. 고적한 유배지에서 학문을 논하고 차를 마시며 금란지교를 나누던 다산의 마음을 가늠하며 새순이 파릇이 올라오는 백련사 차밭으로 눈길을 돌렸다. 남도 여행의 백미로 꼽히는 조붓한 산길은 봄을 맞이한 모든 생명의 소리 없는 함성으로 가득했다.
언 땅 위에서 어두운 겨울을 보낸 나뭇잎들은 꽃이 되고 나무가 되었다.
따뜻한 봄날 흙으로 돌아가 꽃과 나무에 새 생명을 선사하는 나뭇잎들, 흙의 양분과 햇빛을 받으며 자라서 한권의 책이 되는 나무들---. 모든 생명은 소멸하지 않으며 생의 연속성을 갖는다는 묵언 수행을 마친 선승의 말씀을 떠올리며 나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나를 드러내지 못하는 침잠의 겨울을 보낸 숲 속의 모든 생명은 모난 부분을 갈고 닦으며 침묵하라는 무언의 가르침을 봄바람에 실어 전하고 있었다.

  나는 침묵이 큰 소통임을 경험하고 있다.
  가끔 알 수 없는 감정의 기복으로 부부 사이에 이상기류가 흐를 때나 친구 사이에 소통의 부재가 감지될 때, 알 수 없는 말과 할 수 없는 말로 서로를 고집하는 일은 치유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만들 뿐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온다는 가르침을 생각할 때 상대에 대한 참담한 오해가 긍정적인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마음의 움직임을 경험한다.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내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기대 이상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런 마음의 움직임은 어느 날 사진첩에서 멀어진 친구의 모습을 보게 될 때, 아름답던 지나간 시간이 슬며시 마음 한 자리로 비집고 들어오게 한다.

  침묵은 화해에 이르는 길을 모색하는 시간일 때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멀어진 친구를 생각하며 나는 이 지혜의 말씀을 주문처럼 외워본다. 서로 말을 아끼는 침묵의 겨울이 곧 끝나기를 바라면서. 서로가 침묵하는 동안 우리는 어긋난 관계에 대해  나름의 자기 점검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은 부질없음을 알고 있다.
  해풍이 바다의 고요함을 실어 나르는 어느 봄날, 우리는 바닷가 숲길을 나란히 걷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을 기억하며 용서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그리고 향기로운 들꽃 한 송이를 서로에게 건네며 침묵의 시간은 꽃이 되었다고 무언으로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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