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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한인문협/수필] 어깨너머로 다가온 인연

김덕원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3-29 17:26

“어깨너머로 배운다”는 말이 있다. 옛날 서당에서는 글을 깨우칠 때 엽전을 내고 공부하는 유생들은 훈장 앞에서 정식으로 배울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남몰래 유생들 뒤에 숨어서 스스로 배워야만 했는데, 이것이 어깨너머로 배우는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보통은 어깨너머로 배운 것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떤 경우엔 정식으로 배운 사람보다도 더 뛰어나거나 앞서가는 바람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경우가 있어서 긍정적인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인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뜻하지 않은 만남이 내 인생을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서른 셋 되던 해인 2000년 1월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아내와 세 아이를 데리고 밴쿠버에 도착했다. 유학은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것이어서 행복했지만, 낯설고 물설은 이국 땅에서의 정착은 쉽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작은 것 하나라도 쉬운 것이 없었고, 다섯 식구 한 가족이 새로운 살림을 차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밴쿠버의 여름 날씨가 환상이라고 하지만, 끊임없이 내리는 겨울 비에 덩달아 흐르는 눈물을 훔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가고, 2001년 어느 봄 날, 나는 몇 장의 악보를 복사하기 위해 스테이플에 들렀다. 한참을 복사에 집중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어깨너머로 “실례합니다”라며 말을 걸어왔다. 뒤돌아보니 한 육십을 갓 넘기신 듯한 중년 부인이 할 말이 있는 듯 서 계셨다. 요즘 은퇴를 하고 여가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혹시 기타를 칠 줄 알면 도움을 받고 싶다며 전화번호를 줄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분이고, 또 갑작스러운 제안이어서 당황하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연락처를 주고 해어졌다. 그런데 그 우연한 만남이 밴쿠버 이민생활에서 그렇게 귀한 인연이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한 삼 개월쯤 지났을까? 잊혀질 만할 때쯤 연락이 다시 왔다. 한 두 사람을 더 모을 테니 기타를 가르쳐 달라고 하셨다. 그렇게 기타모임이 시작되어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가곡이며, 흘러간 옛 노래며, 때로는 팝송도 같이 연주하면서 기타에 맞추어 노래를 배워갔다. 처음엔 도움을 드릴까 생각하여 시작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나에게 더 큰 유익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주일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면서 긴장을 완화시키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내 학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 되시는 분께서는 사람이 공부만 해서는 건강을 해친다며 아침마다 골프를 가르쳐 주기도 하셨다.


그러던 어느날 그 부인은 글 쓰는 모임을 소개해 주셨다. 글을 훌륭하게 쓰시는 분들이었다. 하지만 이민 생활이 오래 된 탓에 바뀐 문법체계에 익숙하지 않아 고민이 된다며 한국에서 갓 왔으니 문법을 점검해 달라고 요청해 오셨다. 때 마침 나는 졸업논문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아 부담이 되었지만, 그 부담감은 첫 수필을 읽는 순간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가슴에 품고 이민을 왔지만, 현실에 부딪쳐 그 꿈은 산산이 조각나고, 고향 그리운 마음과 부모 생각에 가슴 한가득 한을 품게 된 이야기며, 경제적으로 힘들고,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다양한 경험담들이 주옥같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뒤돌아보면 쉽지 않았던 유학생활을 잘 참고 견딜 수 있었던 큰 용기와 격려의 원동력이 그때 읽었던 수필로부터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은 그 일을 계기로 문인협회와도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004년엔 공부를 마치고 작은 교회를 시작했는데, 그 부인께서는 남편과 함께 가장 먼저 와 주셨고, 항상 옆에 계셔 주셨다. 그분들에게는 자식 벌 되는 나였지만, 오히려 얼마나 챙겨주셨는지 모른다. 여름엔 텃밭에 손수 가꾼 열무, 배추, 오이, 쑥갓, 깻잎들을 연신 갖다 주셨다. 가을엔 연어를 낚았다며 손수 손질까지 해서 주시기도 했고, 여행이라도 갖다 오실 때면 아들 옷 사시면서 하다 더 추가했을 뿐이라며 옷들을 선물해 주시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사람이 다 실수가 있기 마련일 텐데, 항상 좋게 봐 주시고, 오히려 격려해 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밖에서는 부족한 나를 자랑해 주셨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남편 되시는 분과 내 생일이 같았는데, 생일 턱을 본인이 내는 일을 즐기셨다. 대접을 받아야 할 분들이 오히려 베푸는 걸 보며 죄송하기도 했지만, 내 부친과도 같은 해에 태어나신 그 남편분과 부인을 나는 부모님처럼 모셔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사람을 얻는 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세월은 10년이 넘게 흐르고, 평생 이곳에서 살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2012년 7월에 난 갑작스럽게 밴쿠버를 떠나게 되었다. 나는 동료들과 내가 교회에도 이 소식을 알렸지만, 정작 두 분께는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다. 가장 먼저 알려야 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사실 표현은 하지 못했지만, 나는 두 분 곁에 평생 있으면서 마지막을 지켜드려야겠다고 내 스스로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 되시는 분은 몇 개월 전부터 암 투병을 하고 계셨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는지 하루는 두 분이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나도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그 부인께서는 연신 눈물을 훔치셨다. 아… 어깨너머로 다가온 인연이 이렇게 귀한 만남이었다는 것이 정말 감사할 뿐이었다.  


토론토로 이사온 지 벌써 두 해가 다 되어가지만, 밴쿠버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손수 만들어 주셨던 샌드위치는 아직도 내 눈앞에 생생하게 차려져 있는 듯 하다. 얼마나 아쉬웠는지 한 손에 들 수도 없을 만큼 컸던 샌드위치는 평생을 잊지 못할 사랑만큼이나 지금도 내 손 안에 한 움큼 쥐어져 있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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