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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화교사회를 다시 보다(2)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7-11-01 00:00

밴쿠버 최대의 화교 재벌 ‘통 루이’

100년 전 구멍가게로 시작한 가업 이어받아 
BC 랭킹 4위 ‘H Y Louie 그룹’으로 키워

런던 드럭, IGA 등을 소유하고 있는 H Y Louie 그룹의 성장을 이끌어낸 통 루이 회장.

1998년 5월 4일 밴쿠버 다운타운의 세인트 앤드류 웨슬리 교회에서 열린 한 장례식엔 수천 명의 조객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BC주 총독을 비롯해 사회각계 각층의 저명한 인사에서부터 평범한 시민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조문 행렬은 건물바깥 수백 미터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일 개인이 살아온 인생은 그가 죽은 후 그 장례식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의 숫자에 의해 평가된다고 했던가. 밴쿠버 태생의 화교 2세 재벌 총수가 주류사회로부터 이 정도의 추모와 사랑, 존경의 염을 자아낼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살아 생전 얼마나 이 사회에 헌신했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였던 것이다.

통 루이(Tong Louie·雷玉堂·1914~1998)로 알려진 그는 사람들에게 그냥 ‘통(Tong)’으로 통한다. 70, 80년대 이민 온 한인들에게 친숙한 'H Y Louie' 도매상이나, 약국형 바겐세일 백화점인 런던 드럭(London Drugs), 그리고 IGA 수퍼체인이 모두 그 개인 소유이다. 개인 기업으로서 종업원이 1만 명을 상회하여 BC주에서 짐 패티슨 그룹 다음가는 막강한 기업이지만 그는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는 예양(禮讓)으로 일관했고, 수많은 사회단체에 천문학적인 거금을 쾌척하면서도 이름내기를 꺼려했다. 그가 이 땅에 이민 2세로 태어나 온갖 차별과 불이익을 선물한 백인 주류사회에 오히려 '덕'으로 보답했으니 그는 그들로부터 '조용한 거인'(Quiet Titan)으로 추앙 받고 있다. 이것은 중국인 특유의 검약정신, 끈기, 그리고 근면함에 기인할 터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세상을 보는 인생관이나 부를 축적하는 재물관이 남다른 풍모를 보일 수 있는 그 ‘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 루이의 그 위대한 ‘통’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의 선친 H Y Louie(雷學溢·1875~1934)가 100년 전 시작한 가업에서 잔뼈가 굵어가며 부친의 상도를 실천하고 계승한 데서 연유한 만큼 '뤼 혹 얏'(H Y Louie의 광동어 발음)이 이 땅에 살았던 당시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밖에 없다.

광동에서 무작정 건너온 쿠리 '뤼 혹 얏'

1898년 그가 홍콩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올 당시의 밴쿠버는 골드러시도 한풀 꺾이고, 대륙횡단 철도 공사가 끝난 후라 공사에 동원된 수만 명의 광동 지역 쿠리들은 '애물단지'로 전락했고 이민을 전면금지하는 한편 이들을 자연 축출하기 위한 인두세가 실시되고 있었으며 온갖 차별이 가속되고 있어 반 이상이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타 지역으로 유랑하는 상황이었다. 오죽하면 청조말 양무운동의 기수이자 문인관료로 이곳을 방문했던 량 치 차오(梁啓超)는 “우리동포들이 거금의 뱃삯과 인두세를 부담하면서 개, 돼지나 노예와 같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도 이곳에 와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개탄했다.

당시 밴쿠버는 대륙횡단 철도 부설로 하루아침에 1만4000명이 북적거리는 신흥도시로 발전해, 기차역 건물을 중심으로 제재소와 연어가공공장이 들어서고 있었지만 중국인들의 거주지역은 지금의 차이나타운 부근으로 한정하고 있었다. 시 당국은 하수도 배관공사도 해주지 않은 주제에 방하나에 올챙이처럼 수십 명이 칼잠을 자는 중국인들을 ‘불결’의 상징인양 매도하고 있었다.

이미 결혼한 20대 초반의 몸으로 집안을 대표하여 돈을 벌어 보내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뤼씨는 고향에서와 같이 채마밭 인부로 시작했다. 생선공장이나 농사일은 시즌이 끝나면 자동 해고됐으니 송금은 고사하고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는 것을 간파한 그는 두 사람과 함께 지금의 바운더리 부근 프레이저 강변에서 백인 농장의 땅뙈기를 빌려 채소농사를 짓게 됐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채소를 마차에 싣고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밴쿠버 차이나 타운에 도착하면 아침 7시, 청과상에 납품이 끝나면 다시 돌아와 하루 종일 채마밭에 매달리며 밤에는 채소 다듬고 씻는 작업으로 밤 11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마부 노릇을 하는 그 틈을 이용, 영어를 익혔다.

당시 밴쿠버엔 토지소유가 금지됐지만 백인 농토를 빌려 채마밭을 가꾸는 중국인들이 130명에 달해 이들의 농자재 수요를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틈새시장이 눈에 들어왔고 그간에 익힌 영어와 차이나타운의 인맥을 이용해 그는 대담하게 농자재와 식료품 도매상을 1907년 펜더와 캐랄에 오픈했다. 하지만 도매업은 물론 식료상도 백인들 영역이라 처음부터 텃세에 시달렸다. 채소씨앗을 비롯한 농자재를 봄에 중국인들에게 대주었지만 대금은 가을에야 회수됐던 만큼 자금압박에 시달렸지만 은행 문턱은 쳐다 볼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는 기존의 켈리 더글라스와 오펜하이머 같은 도매상들의 거래 대금을 기한에 앞서 결제하는 등의 방법으로 신용을 얻어 거래를 텄고, 브로큰 영어 실력이지만 중국인들이 벌어들인 지전을 금으로 바꿔주는 환전상과의 거래 알선으로 커미션을 받아 꾸려나갔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908년 이스트 조지아 255번지의 2층 건물을 구입하여 ‘H Y Louie’라는 간판을 걸었다. 3000평방피트 남짓한 점포와 2층의 살림집이 가업의 발상지가 됐고 밴쿠버의 뤼씨 일가 9남 2녀 총 13명의 대가족이 이 집에서 태어나 가족기업으로서 고고의 성을 울리기 시작한 첫 둥지가 된 것이다.

9남 2녀 뤼씨일가의 애환

열악한 조건하에 창업의 웅지를 펴기 시작한 선친은 자손대대로 가업을 물리기 위해 광동에서 19세의 영 시(英施)라는 처녀를 1911년 초청,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물론 본 부인이 있었지만 그녀는 고향에서 시부모를 봉양하는 의무가 있었고 당시 중국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소실을 둘 수 있었다. 1913년에 장남인 팀(錦添)이 태어나고 1년 후엔 통이 태어났다. 그 이후 줄줄이 남아 7명과 여아 2명이 태어났다.

통을 비롯한 2세 자녀들이 유년기와 사춘기를 보내야 했던 20년대와 30년대의 밴쿠버 화교사회는 주류사회의 제도적인 압제와 차별이 더욱 가시화되는 고난의 현장이었다. 1차 대전 중 남자들이 모두 유럽전선에 끌려가도 고용의 기회는 백인 여자들이 차지했으니 그들의 실업률은 80%를 웃돌았다. 시정 당국은 중국인들의 백인 거주지역 야채상 진출을 제도적으로 봉쇄했으며, 백인 농장주들은 중국인들이 그나마 농사도 못 짓도록 하는 농지임대금지법안의 로비를 벌이고 있었다. 심지어는 중국인들이 채소를 싣고 밴쿠버로 들어오는 길목의 다리를 바리케이드로 가로막는 전대미문의 만행을 감수해야 했다. 초기의 인두세가 50달러에서 500달러로 인상된 것도 서러운데 1923년엔 중국이민금지법이 통과됐으니 밴쿠버 화교사회는 자연도태의 국면을 맞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1930년대 경제공황의 여파는 엄청났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구호기관에서 주는 꿀꿀이 죽으로 연명하고 있었고 그나마 중국인에게 나눠주는 구호금은 백인들의 삼분의 일도 안 됐다. 중국인들이 항의하자, 한 정치가는 "지금 주는 돈이 너희들이 평시에 일하며 받는 것보다 많이 주는 것"이라며 목청을 높였다. 이러한 경제 공황 속에 11남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는 창고에 비축된 물자가 한 몫을 단단히 했고, 부친은 차이나타운의 부랑자 구호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아 소매상들로부터 철저한 신용을 얻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그는 장남인 팀을 홍콩의 링난(嶺南)대학에 보내 중국식 교육을 받게 했고 차남인 통은 1933년 UBC 농대에 입학하는 행운을 누리게 됐다. 하지만 당뇨로 고생하던 그는 9순의 노모를 보기 위해 광동으로 귀성했고 통은 그 해 여름방학을 이용, 처음으로 선친의 고향을 방문하여 부친과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바로 1934년 부친이 고향에서 급서함으로써 가업을 계승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통은 평소 근엄하기만 했던 부친과 고향에서 한방에 기거하며 따스한 사랑을 처음으로 의식했으며 가업을 이어갈 결심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부친 사망 이후 거래선들이 장남과 차남을 보는 태도가 돌변했다. 오펜하이머, 켈리 더글러스 같은 도매상들이 제조업체들에게 H Y Louie에 물건을 공급하면 거래를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웃지 못할 촌극도 허다했다. 한번은 도매상 세일즈맨이 일반소비자로 위장해 찾아와 설탕 한 봉지를 사자고 해 판 것이 화근이 되어 로저스 제당이 유통질서를 문란했다며 물건 공급을 중단했다. 궁여지책으로 자마이카산 설탕 5톤을 들여왔으나 하역을 하고 보니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밤에는 온 가족이 야구방망이를 가지고 깨부숴 포장했다.

H Y Louie 그룹의 성장과 결단

통은 1941년 4월 백인 거주 지역에 살고 있던 화교 명문가 규수인 이민 3세 제랄딘 세토(Geraldine Seto)와 끈질긴 구애 끝에 결혼했지만 백인지역에 집을 사 이사하자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주민 83명이 연대 서명하여 시의회에 차이니스가 들어오면 집값이 떨어지니 재산세를 인하하라는 진정서를 제출하는 촌극이 벌어진 것. 당시 이 사건은 거의 매일 도하신문을 도배하다시피 했지만 화교출신 2세들이 2차 대전에 참전한 점이 정상 참작됐다. 

가업확장에 영일이 없었던 통이 이 사건으로 좌절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는 대형도매업체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내륙지방의 소매업체를 찾아 다니며 사세를 넓혀나갔다. 그리하여 1950년대엔 수십 명의 직원을 거느린 중형 도매상으로 발전했다. 그러던 중 도약의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미국에서 소형 독립 수퍼 가맹점 개념인 IGA 프랜차이즈가 캐나다에 상륙한 것이다. 그가 20년 가까이 BC주 구석구석을 찾아 다니며 소형 식료품점과 인맥을 형성한 것이 프랜차이즈 가입 설득에 주효하여 가맹점이 50개로 늘어났고 이것은 곧 도매상의 거래량이 폭증하는 계기가 됐다.

회사가 커지면서 9형제 전원이 주주로 되어 있고 최종 의사결정권은 맏형인 팀이 쥐고 있어 번번히 현실에 안주하려는 형과의 마찰은 해결해야 할 난제였다. 하지만 형을 설득하여 그의 지분을 사들였고 형은 투자업으로 진출하도록 원만하게 처리한 것이 곧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에 즈음하여 대형수퍼인 토론토의 도미니언이 BC주에 진출, 9개의 직영 수퍼를 열게 되나, 기존의 수퍼밸류에 밀려 고전을 하다 철수할 무렵 이를 대담하게 인수하는 승부수를 띄운 것은 당시 그가 내린 최고의 도박이었다. 그는 도매업과 소매업을 동시에 관장하는 막강한 기업으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고, 70년대 다시 한번 세 번의 대박 기회가 찾아 들었다.

당시 샘 배스(Sam Bass)라는 사람이 종래의 약국에 바겐세일 백화점을 겸한 ‘런던 드럭’을 1945년 시작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끊임없이 사세를 확장했고, 이것이 캘리포니아의 유수기업 데일린 그룹에 매각되어 운영되던 중 투자 실패로 파산 위기에 직면하자 런던 드럭 10개 점포가 매물로 나온 것이다. 그는 재빨리 행동에 옮겼다. ‘쇼퍼스 드럭 마트’의 오퍼에 웃돈을 얹어 매수한 것이 적중한 것이다. 이제 런던 드럭은 BC주와 알버타를 석권하는 할인 백화점 약국으로 50개 점포를 자랑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2002년 현재 HY Louie그룹은 BC주 랭킹 4위에 들어가는 기업으로 세계 1000개 엘리트 기업 단체인 세계경제포럼(WEF)의 회원이다.

부친이 100년 전에 세운 조그만 구멍가게가 이토록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선친의 비전을 믿고 계승한 그는 기업을 일반에 공개하지 않았다. 선친의 유훈을 철저히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를 뒤에서 알뜰히 내조한 부인 제랄딘이 90년에 타계한 데 이어 그는 98년 지병인 당뇨가 악화되어 이 세상을 하직했다. 리치몬드에 있는 런던 드럭 본사 건물의 이름이 바로 그의 부인 이름을 따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 이젠 광동에서 온 쿠리 ‘뤼 혹 얏’의 3세인 브란트 루이가 부친의 훈도 속에 그룹 총수로 앉아있어 루이가는 밴쿠버에서 존경받은 기업으로 전통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아들인 브란트는 말한다. '선친의 거대한 산 그늘이 너무 크게 나에게 드리워져 항상 그 책임이 무겁다'고. 이는 비단 직계아들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밴쿠버의 주류 백인사회 전체가 느끼는 통 루이의 음덕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정봉석 phnx604@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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