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한여름의 그림

김선희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1-09-27 09:19

김선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아침부터 후끈한 열기가 대기를 가득 채운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기는 정체되어 끈적거리고 걸쭉한 용액이 된다. 정체된 공기는 숨을 틀어막는다. 점성이 높은 공간 속에서 살아있는 것들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모두 죽은 듯 박제되어 있다. 꽃도 나무도 그림 속의 한 장면처럼 정지해 있다. 매미가 한껏 용을 쓰며 소리를 내보지만 걸쭉한 대기에 가로막혀 안쓰럽게 스러질 뿐이다.


마당 가장자리에 있는 프록스는 마치 조화 같다. 비가 오지 않고 건조한 날이 이어지니 꽃이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다. 건조한 날에는 꽃들이 영 맥을 못 추는데 프록스는 비가 오지 않아서 더 생생하다. 이러니 조화 같을 수밖에. 프록스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름 꽃이다. 개화 기간이 긴 것이 이 꽃의 가장 큰 장점이다. 오래도록, 게다가 항상 같은 모습으로 피어 있다. 화무십일홍이 무색하다. 몇 주 동안이고 계속 생생해서 영원히 지지 않을 것만 같다. 가장 오만한 때의 태양 앞에 당당히 맞서는 한여름의 전사다. 끈적거리는 대기에 잡혀 있지만 태도는 의연하다. 가느다란 가지에 작은 꽃들로 이루어진 크고 둥그런 머리를 달고 있는 모습이 낮에 밝혀 든 알록달록 등불이다. 프록스는 여름을 이기는 최고의 능력치를 지녔다.


옆으로 고개를 치켜든 원추리는 매일 같으면서 매일 다르다. 오렌지색의 꽃이 늘 같은 모습이어서 언제나 그대로인 듯하지만, 어제 핀 꽃은 지고 오늘은 새로 난 꽃을 단 것이다. ‘어제는 어제로, 오늘은 다시 새롭게’가 원추리의 모토이다. 늘 새 옷을 입고 나타나니 그 꽃잎은 때깔도 곱고 산뜻하다. 프록스가 등불이라면 오렌지색 원추리는 횃불이다. 태양이 땅으로 내려온 듯한 모양과 강렬한 색채를 보면 지쳐 있던 나는 늘 생기를 얻는다. 그래서 여름이면 참 고마운 꽃이다. 잠시 생기를 뿜던 원추리도 한낮의 뜨거움 아래서 젤리 같은 공기 속에 오렌지색의 스티커로 박혀버린다.


가엾어라, 수국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벌겋게 녹이 슨 잎을 힘없이 내려놓았다. 태양 앞에 승복하고 패배를 받아들이고 있다. 빨간 반점투성이의 두 손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수국이 가장 왕성한 시기가 여름인 데도 태양의 공격에 타격이 크게 입어 무력하다. 이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그런 것 같다. 나이를 먹고 튼튼한 수국이라면 이렇게 빨리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다. 올여름엔 엎드리고 항복했지만 내년이면 태양과 맞짱 뜰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겨울 동안 냉해를 입지 않도록 잘 관리해주어서 내년엔 튼튼한 여름 꽃으로 만들리라 다짐한다.

태양이 끗발 날리는 시기이다. 태양은 강한 기세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태양열로 겔 화된 대기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붙들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이 기세에 못 이겨 생명체들은 잠시 고개를 숙인다. 숨마저 멈추고 눈을 감는다. 그렇다고 태양이 승자는 아니다. 한껏 패악을 부리는 태양의 폭압 속에 사그라져갈 그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막 기세 등등한 초여름과 달리 모든 것이 움직임을 멈춘 한여름의 공기에는 거인의 쓸쓸한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패배를 인정하고 스스로 사라져가는 거인이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걸까, 힘없이 울음을 토해내던 매미들이 울음소리를 높인다. 높아진 매미 소리가 막혀 있던 대기 사이로 길을 낸다. 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놀기 시작한다. 대기의 끈기가 풀어지고 정체는 느슨해진다. 한여름 속으로 가을이 스멀스멀 스며든다.


올봄부터 옆 대지에 새로 집을 짓는 공사가 시작됐다. 조금씩 높아가는 벽과 둘러친 비계가 정신없고 심란했다. 한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드는 요즘까지도 부산하기 그지없다. 마당에 나가기가 싫었다. 핑계 김에 쉬어 가자 싶어 마당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풀도 뽑지 않고 새로 꽃들도 심지 않았다. 사실 사람이 많이 간섭하지 않았을 때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도 했다. 봄부터 매일 한두 시간은 마당에서 보내던 일과가 없어졌다. 풀도 나름 자라고 꽃들도 제각각 피어났다. 여름까지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피고 지는 모양을 노동의 수고 없이 즐기는 맛도 있었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마당은 깔끔하지 않아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장마가 지나고 본격 무더위가 시작되자 확연히 달라지긴 했다. 풀들이 하늘에 닿을 듯이 자라 드디어 일손을 불렀다. 뙤약볕 아래에서 그저 조금 손질을 하자 볼만한 정원으로 돌아왔다. 아침이면 뭐가 그리 바쁜지 정신없이 짹짹거리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새들은 언제 봐도 귀엽고, 해가 질 무렵 쏟아지는 황금빛 색조는 여전히 무한한 감동의 원천이다. 모든 자연의 요소들이 서로 어우러지는 정원을 보며 많이 애쓰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살면 서로 닮는다더니 조금 못생긴 정원의 생김새대로 나도 따라가는 것 같다.


기세를 떨치던 무더위는 갑작스레 사라져간다한여름의 끈적한 대기도 안에 갇혔던 나도찍어 눌린 멈추어 섰던 꽃들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가을로 이동하고 있다바람이 불고 벌레는 운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엄마의 빨랫줄 2024.05.27 (월)
그 시절 엄마는아침 설거지 마치고이불 홑청 빨래를 하곤 했다커다란 솥단지에 폭폭 삶아돌판 위에 얹어 놓고탕탕 방망이질을 해댔다고된 시집살이에마음의 얼룩 지워지라고부아난 심정 풀어보려고눈물 대신 그렇게 두드렸을까구정물 맑아진 빨래를마당 이편에서 저편으로말뚝 박은 빨랫줄에 널어놓으면철부지는 그 사이로 신나서 나풀댔다부끄러운 옷까지 대롱대롱 매달린울 엄마 늘어진 빨랫줄은 마음의 쉼터옹이 지고 구겨진 마음이훈풍에...
임현숙
천국의 삶 2024.05.27 (월)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시간은 오전 6시경이다. 일어나자마자 수영가방을 챙겨 들고 가까운 스포츠센터인 짐(Gym)으로 운동과 수영을 하러 간다.   봄이 무르익어 어느덧 가로수들이 짙은 연녹색이며 꽃나무들이 한창이다. 1시간 30분 정도 체력운동과 수영을 마치고 나오는데, 주차장 한켠에 인도인으로 보이는 가족들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그중 한 명이 30~40대로 보이는데 자그마한 체구에 얼굴은 좀 예리하게...
이종구
  오월 화창한 봄날에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秋史古宅을 찾아갔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주택일 뿐 아니라, 조선 말의 문신으로 실학자, 서화가였던 추사 김정희를 마음으로 만나고 싶었다. 옛 주택은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염두에 두고 지어졌다. 앞으로 펼쳐진 넓은 평야에 낮게 솟은 740m의 용산이 배산背山이 되고, 삼교천을 임수臨水로 삼은 추사 고택은 충남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돼 있다. 이 집은 추사의 증조부...
정목일
풍경 소리도 기도 2024.05.27 (월)
절 집 처마 끝물고기 한 마리느릿느릿 헤엄치고대웅전에 든 나의 벗엎드려 드리는 기도그 염원 깊고 깊은데앞 산 푸른 허공에걸렸다흩어지고흔적도 없다다시 밀려오는 구름에자맥질하는 물고기허공이 물속인 듯물속이 허공인 듯달강달강 기도하는달강달강 풍경소리
정금자
보리누름 2024.05.22 (수)
감꽃 피는 긴 해에새털구름 깔리고봄 가뭄 길어지니냇물허리 잘록한데찔레꽃향기 퍼지는하얀 봄날 어신 때아지랑이 현기증을풋보리로 넘은 고개풀칠 힘든 살림에해는 어찌 더디던고애틋한 배고픈 설움서로 기대 씻은 봄
문현주
어느날 갑자기 2024.05.22 (수)
2024년은 나에게 특별한 해이다. 캐나다 생활 32년만에 정말 꿈같은 일이 이루어졌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지인이 한국 생활 9년만에 캐나다로 돌아와서 당분간 지내보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 후 나와 아내는 그분들에게 “금방 거주할 곳이 없으면 호텔 대신 우리집으로 오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였더니 서로 좋겠다고 하여 우리 두 가정은 7개월 동안 서로 집을 바꾸어 살기로 하였다.  이렇게 이야기가 된 지 보름만에 그들 부부는...
김유훈
주문 2024.05.22 (수)
토요일 오후 퇴근 길에 스타벅스 커피점을 지나면서 음료를 주문하려고 들렀다. 집에 있는 가족들이 생각나서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보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각자 원하는 음료를 시켰는데, 아내와 큰 아들의 간단한 메뉴 선정과는 달리 딸아이의 기다란 메시지 답장이 왔다.‘그란데 사이즈로 차가운 차이 라떼 한 잔.추가 선택 사항으로는 얼음은 약간, 차이 펌프는 2번만, 블론드샷으로 에스프레소 추가, 그리고, 귀리 우유’메시지를 다 읽고도 한...
정재욱
할머니의 우산 2024.05.22 (수)
얼룩진 우산 만큼 제각기 사연을 가지고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무거운 짐도 마음의 짐도 잠시 내려 놓는다낯선 할머니 한 분버스를 타려는 한 아주머니 우산을 챙겨주고비 옷 입고 서 있는 내게도 자꾸만 기우려 주신다하나 둘 씩 버스는 떠나가고할머니는 누군 가를 기다리는지내리는 사람들 눈치를 살핀다부슬 부슬 내리던 비는 그치고저녁 햇살이 정류장을 비추자불그레진 할머니는 갑자기 환하게 웃으신다구부정한 할머니가 손자와 함께우산을...
유우영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