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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정성화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0-09-08 17:09

정성화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어릴 적 내가 살던 곳은 경부선 기차가 지나가는 시골이었다. 저녁밥을 먹은 뒤 심심하면
나는 강둑에 앉아 기차를 기다렸다. 기차는 언제나 어두운 들녘의 한 쪽을 들치고 씩씩하게
달려왔다.

기차는 아름다웠다. 캄캄한 밤하늘에 소리 없이 풀어지던 한 무더기의 증기도 아름다웠고,
네모난 차창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만드는 금빛 띠도 무척 아름다웠다. 그 들녘에 이르러
울리던 기적 소리는, 기차가 길게 내쉬는 숨비소리로 들렸다. 나는 그때 기차가 어쩌면 한
마리의 순한 짐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는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그리움을 내 가슴속에 주르륵, 두 줄로 박아 놓고 갔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이라 기차가 오가는 시각이 시계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내 바로 아래
동생을 서울 가는 첫 기차 시각에 낳았다고 했다. 그리고 대구에서 오는 저녁 통근차가 도착할
무렵에 나를 낳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들은 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니라 기적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어쩌다 기적 소리를
듣게 되면 무척 반갑다.

기찻길은 누구에게나 서정을 불러일으킨다. 멀리 까지 이어지는 시각적 이미지 때문인지
기찻길이 상기시키는 그리움은 과거 지향적이면서도 미래 지향적이다. 돌아가고 싶은 곳으로의
향수와 달려가고 싶은 곳에 대한 잔잔한 열망을 동시에 품느라고 기찻길은 아마 평행선이
되었을 것이다. 반짝이는 선로와 거무스레한 침목, 그리고 녹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자각이 전부인데도 기찻길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만나고 싶은 이들이 그 길 끝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차 안에서 바깥 풍경을 내다보는 것도 좋지만, 나는 내가 탄 기차가 어떻게 달리는지 고개를
내밀이 기차의 앞쪽 보는 것을 좋아한다. 수시로 좌우로 꺾이면서도 이내 몸체를 추스르는
기차, 두 세 갈래의 선로 앞에서도 머뭇거림 없이 바로 한 선로를 택해 달리는 기차를 보며,
나는 의연하고 자신감 넘치는 어떤 남자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기차 타기를
좋아하는 데는 그런 이유도 들어있지 않을까.

대학 시절, 그와 나는 서로 사는 곳이 달라 기차를 자주 탔다. 늘 역에서 만나고 역에서
헤어졌다. 헤어질 때마다 나는 입장권을 끊어서 그를 배웅하곤 했는데, 그는 언제나 기차의 맨
마지막 칸 뒷문에 서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움이란 어쩌면 소실점으로 변해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만일 그 사람이 기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내게 자주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까. 길을 물어도 못 들은 척하며 그냥
지나가는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기차는 승객과 함께 갖가지 사연도 태우고 달린다. 여유롭게 여행을 떠난 사람, 밥벌이를 위해
헐레벌떡 기차에 오른 사람, 장삿길에 올랐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 그리고 실의에 빠져
무작정 기차에 오른 사람 등, 그러나 의자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모습은 다들 편안해 보인다.
그의 고단함이 어느 정도인지 재빨리 알아차린 의자가 아주 편안하게 그를 받쳐 주기 때문이다.
기차 의자만큼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잘 알고 있는 의자는 또 없을 것 같다.

기차에서 잠깐 잠들었다가 깨어보면, 옆에 앉았던 사람이 내리고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때가 많다. 삶 또한 그러하다. 몇 정거장 지나다 보면 내 옆에 앉아있던 슬픔이 내리고 그
대신 기쁨이 찾아 들며, 어두운 얼굴로 앉아 있던 절망이 내린 뒤엔 환한 미소를 띤 희망이 내
옆에 사뿐히 앉기도 한다. 질주와 멈춤, 채움과 비움을 반복한다는 것, 그리고 종착역에
이르러서는 모든 걸 내려놓고 다시 빈 차가 되는 것까지, 기차는 우리의 삶과 아주 많이 닮았다.
기차는 제 속도 때문에 정작 좋은 풍경들을 다 놓친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온 듯하다. 그동안
내가 무사히 잘 달릴 수 있도록 건널목에서 차단기를 내려준 사람들과 나를 위해 철로를 보수해
준 사람들, 그리고 기찻길 옆에 피어 있던 꽃과 나무들까지 모두 잊은 채, 나는 그저 달리기에만
급급했던 것 같다. 작고 이름 없는 역이라고 그냥 지나친 간이역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게다가
이것저것 잔뜩 이어 붙이는 바람에 나는 지금 너무 긴 기차가 되어 버렸다.

오후에 건널목에서 동해남부선 기차를 만났다. 겨우 다섯 량의 객실만 이은 기차였다. 기차는
은빛 햇살을 받으며 마치 나비가 날아가듯 바다 쪽을 향해 팔랑팔랑 날아갔다. 나도 그렇게
산뜻하고 경쾌한 기차가 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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