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그 자리에 그대로의 모습으로

조정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7-01-21 10:56

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기고/수필
겨울 아침 골든 이어 산 순백의 봉우리가 여명의 햇살 속에 눈부시다. 푸른 대기 속에 고요하고 깊은 기상은 티벳의 카일라스가 되어 신비하게 다가온다. 하늘에 닿을듯한 네 개의 눈 덮인 봉우리들은 언제나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다. 산속 나무들이 깊이 뿌리 내리고 산새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그저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유리창 문을 통해 눈부신 산봉우리를 바라보는 일은 내 마음에 평화를 심는 시간이다. 이 겨울 ‘비움으로써 더 많은 것을 채울 수 있다’는 산의 소리가 멀리서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지난 연말, 나는 이웃 친구였던 마사코의 카드를 우편함에서 꺼내 들고 반가움보다는 미안함에 할말을 잊고 있었다. 못 보고 지낸 몇년 동안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던 마사코가 올해도 어김없이 카드를 보내온 것이다. 나는 곧 그동안 답장을 보내지 못한 미안함과 빨리 한 번 만나자는 내용의 새해 카드를 보내야만 했다. 10여 년 같은 동네에 살다 내가 이사를 오며 멀어진 우리의 인연을 그녀는 긴시간 동안 놓지 않고 있었다. 함께 보낸 지난날들을 잊지 못하는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었던 것이다. 친구 관계의 지속성이 지란지교의 덕목이라고 믿는 그녀의 무구함은 나와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했다.
목화솜 같은 함박눈이 내리는 날엔 저 먼 기억 속의 친구들이 빙긋이 웃으며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친구라는 이름 앞엔 세월이 흐르지 않아 지금도 서로의 이름 부르는 정겨운 얼굴들!
유난히 추운 올겨울, 오랜 친구와 통화하며 받은 감동의 여운은 봄날 햇살처럼 지금도 나를 감싸고 있다. 서울 생활을 고집하던 그 친구는 귀촌 계획을 알리며 나와 이웃해 살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디가 좋을까?” 우리는 의기투합해서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부푸는 이 계획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우리는 아득한 고향의 산과 들에서 뛰어놀던 그때를 다시 한번 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이른 봄날 뒷동산 하얀 찔레꽃 덤불 옆에서 소꿉 놀든 그 평화롭든 시절을 갈증처럼 꿈꾸며. 우리의 50년 지음지기 인연은 아름답던 그 시절과 현재의 삶을 함께 그리워하고 위로하다, 이제는 노후를 계획하는 기쁨도 공유하게 된 것이다. 한 시인은 젊은 날 이별을 고하는 친구의 편지를 받고 “우정이란 진정 위태로운 잔에 떠 놓은 물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서로의 다른 생각과 형편을 비교하며 감정의 갈등을 겪다 결국엔 이별을 선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친구와 함께 겪은 그 많은 추억과 몇 번의 어긋남은 우리의 관계를 발효시킨 밑거름이었다. 무던하고 속깊은 그 친구는 내가하는 모순된 말도 진의를 살펴 이해하려 했고, 내 결점을 알면서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우린 이제 나를 비우려 애쓰며 한 발자국씩 물러나 서로를 바라보는 나이 듦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스스로 부족하기에 더욱 정겨운 우리는 이제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마음 둘 곳 임을 알고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인 모습을 서로 고마워하며!
‘친구야! 장독대 위로 살구꽃이 분분히 날리는 봄날, 우리 어린 날의 평화롭던 기억들을 끝없이 떠올려보자!’

홀로는 이슬 하나의
무게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작고 여린 꽃잎들이
층층이 포개어지고 동그랗게 모여
이슬도 바람도 너끈히 이긴다

나 홀로는 많이 외로웠을 생
함께여서 행복한
참 고마운 친구여
나의 소중한 길벗이여                               
                                                        (벗의 노래, 정연복) 중에서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아침 6시, 300여 명의 승객을 태운 선 윙의 로스 카보스행 비행기는 밴쿠버 공항을 이륙하고 있었다. 표지판의 안전 밸트 사인이 꺼지자, 우울한 겨울 날씨로부터 탈출을 시도한 승객들에게 샴페인을 제공하겠다는 기내 방송이 들려왔다. 비행기 안은 곧 따뜻한 남쪽 나라로 향하는 휴가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크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 겨울 옷을 벗는 사람들, 다정한 눈빛을 주고받는 연인들---. 정호승의 시집을 펴든 나는 “그대와...
조정
겨울 아침 골든 이어 산 순백의 봉우리가 여명의 햇살 속에 눈부시다. 푸른 대기 속에 고요하고 깊은 기상은 티벳의 카일라스가 되어 신비하게 다가온다. 하늘에 닿을듯한 네 개의 눈 덮인 봉우리들은 언제나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다. 산속 나무들이 깊이 뿌리 내리고 산새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그저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유리창 문을 통해 눈부신 산봉우리를 바라보는 일은 내 마음에 평화를 심는 시간이다. 이 겨울 ‘비움으로써 더...
조정
풍경 소리 2016.08.17 (수)
장례 예배를 마치고 고인께 명복을 빌던 짧은 시간, 그분은 창백한 밀랍의 얼굴빛과 초연한 표정으로 나는 이제 이 세상 사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치 타들어 가는 촛불처럼, 고통으로 무너져 내린 육신은 죽음의 다리를 건너 미지의 세계로 떠나갔다. 나는 생전의 고인을 기억하며 기도 드렸다. 병마의 고통과 불의한 세상에 대한 절망을 모두 내려놓으시고, 빛나는 날들을 기억하며 죽음의 여정에 오르시기를. 고인은...
조정
그해 겨울 2016.02.27 (토)
잿빛 밴쿠버의 겨울을 견디는 일은 혹독한 추위에 겨울잠을 자는 곰과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게 한다. 북위 48도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와 같은 위도상에 있는 밴쿠버의 겨울밤은 길고도 길다. 칠흑 같은 어둠에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만 들릴뿐 사방은 너무도 적막하다. 나는 자기 성찰을 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라고 긍정의 마음을 내며 새해 연하장을 쓰기 시작한다. 서리 꽃이 나뭇가지에 하얗게 핀 겨울 아침 나는 친정 고모님으로부터  이메일을...
조정
제135회 월간문학 신인 작품상 수상우리 외할아버지께서 퇴원하시는 날이었어요. 나는 학교 공부가 끝나자마자 집을 향해 달렸어요. 친구들이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불러도 못 들은 척하면서요. 할아버지께서 병원에 계신 동안 신나게 하던 게임도 오늘이 마지막이에요.“오늘 할아버지 정말 퇴원하셔?”오늘 아침에 나는 엄마한테 슬쩍 물어봤어요.그러나 엄마는 눈치 없는 대답을 하셨어요.“왜, 할아버지 보고 싶어?”하고요.우리 할아버지께선...
조정
특별한 인연 2015.08.29 (토)
“불성무물"이라 쓰인 화선지를 탁자 위에 펼치시며 선생님께선 잠시 감회에 젖으셨다.“오늘 초대에 대한 답례로 내가 좋은 글귀를 하나 써봤어요. 참 쉽지 않은 인연인데---, 이석 선생, 조 여사, 앞으로 열심히 정진하기 바라요.” 정성은 모든 것의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중용의 “성자물지종시 불성무물( (誠者物之終始...
조정
감자꽃 한 다발 2015.07.10 (금)
노란 꽃술을 내민 흰 감자꽃 한 다발을 남편이 말없이 건넨다. 수확기를 앞두고 감자 알을 굵게 만들기 위해 꽃을 따내는 남편 옆에서 나는 잠시 감자꽃을 들여다 본다. 희고 보드라운 꽃잎 가운데 샛노란 꽃술을 뾰족이 내민 감자꽃은 너무나 앙증맞다.키 큰 미루나무 가지에 모여 앉은 멧새들이 소리 높혀 재잘대기 시작한다.“하얀꽃 피면 하얀 감자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바람을 타는 억새들의 사열을 받으며 콜로니 농장으로 가는 길 풍경은...
조정
  봄은 맨몸으로 겨울을 이겨 낸 나무들이 자축의 시간을 갖는 계절이다.   가지마다 수액을 끌어올려 붉은 기운이 감도는 나무들은 깊은 밤 보는 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화사한 꽃을 피운다. 봄의 전령들이 대기 속에 가득한 오후 온 집안에 아마 씨 기름 향이  가득하다. 길고 긴 우기의 겨울을 보내며 남편이 깎고 다듬은 나뭇가지들은 그럴듯한 모양의 의자가 되었다. 세 번째 아마 씨 기름을 의자에 칠하는 남편의 표정은 사뭇...
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