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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여구 퇴출시킨 대통령 연설··· “군더더기 없이 깔끔” vs “감동과 울림 없어”

이옥진 기자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3-03-11 20:17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서울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모습.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서울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모습. /대통령실

“조국을 위해 헌신한 선열을 기억하고 우리 역사의 불행한 과거를 되새기는 한편, 미래 번영을 위해 할 일을 생각해야 하는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 기미독립선언의 정신을 계승해서 자유, 평화, 번영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갑시다.”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는 간결했다. 글자 수는 1039자(띄어쓰기 제외), 낭독 시간은 5분 25초였다. 역대 다른 대통령들의 기념사와 비교해 보면, 이례적으로 짧은 것이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5232자)에 비하면 5분의 1 수준. 메시지는 명확했다. 글로벌 복합 위기에 맞서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것. 대표적으로 한·미·일 협력을 꼽으며 일본을 ‘협력 파트너’로 규정,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 정상화를 강조했다.

지난해 5월 취임한 윤 대통령은 취임사, 광복절 경축사, 유엔총회 기조연설 등 몇 차례 굵직한 연설을 했다. 모든 연설이 간결한 문체로 쓰여졌고, 내용 면에서도 일관되게 ‘자유’ ‘미래’ ‘연대’ 등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의 연설을 두고 “군더더기가 없어 깔끔하다” “사이다같이 시원하다”는 호평이 나오는 한편, “뇌리에 박히는 강렬함이 없다” “감동과 울림이 없다”는 혹평도 나온다.

◇“尹 대통령 본인이 스크립트 라이터”

“대통령이 선택하는 문장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미래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에 대해 말해준다.”

명연설가로 손꼽히는 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의 연설 보좌관(스피치라이터)들이 한 말이다. 이처럼 대통령의 연설이 갖는 무게는 남다르다. 문장 하나하나가 국민의 삶과 국가 운영에 영향을 미치고, 나라의 정체성과 품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통령 연설문은 대통령실(과거 청와대)의 역량이 총결집돼 만들어져 왔다. 정부 부처의 보고, 사회 각계의 다양한 목소리를 취합해 연설기록비서관실에서 초안을 만든다. 대통령이 이 초안을 보고 직접 수정 지시를 내리는 경우도 있고, 참모들과 독회(讀會)를 갖고 토론을 통해 고치는 경우도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비서관실에서 올린 초안을 빨간 펜으로 꼼꼼하게 첨삭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술하면 비서관실에서 이를 반영해 여러 차례 수정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독회형이었다. 여러 곳에서 연설문 초안을 받았고, 외부 전문가들까지 모아 놓고 함께 읽으며 고쳤다. 중요 연설의 경우 많게는 스무 번까지 독회를 열었다고 한다.

윤 대통령 스타일은 노무현 대통령에 가깝다. 복수의 대통령실 관계자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본인이 생각한 아이디어를 참모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연설문 작성을 시작한다. 연설기록비서관이 이를 토대로 초안을 만들면, 회의를 2~3차례 연 뒤 자신이 완성한다는 것이다. 실제 취임사의 경우 취임사준비위원회가 8개의 원고를 준비했는데, 윤 대통령이 이를 다 물린 뒤 직접 구술로 초안을 작성하고 참모들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한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자유’ ‘시장’ ‘민주주의’ 등의 키워드로 한자리에서 술술 이야기를 푸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다른 관계자는 “윤 대통령 본인이 스크립트 라이터라고 보면 된다. 어떤 아이디어가 와도 대통령 스타일로 소화해 (연설문을) 완성한다”고 했다.

지난 1일 서울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의 뒷모습. /대통령실
지난 1일 서울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의 뒷모습. /대통령실

‘윤석열 스타일’ 연설의 가장 큰 특징은 감성보다는 이성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미사여구는 없다시피 하고, 비유적이거나 시적인 표현도 별로 없다. 윤 대통령은 임기 초반 참모들이 유려한 문체로 초안을 작성해 오면 호통쳤다고 한다. ‘불필요한 수식어를 넣지 말라’ ‘명료하고 간단하게 하라’는 게 윤 대통령의 주문이었다. 이 때문에 연설이 직선적이고 딱딱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전임 문재인 대통령과는 크게 대조적이다.

문 대통령의 연설에는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표현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2017년 현충일 추념사에서 독립운동가와 호국용사, 파독 광부와 간호사, 청계천 봉제 공장의 여공을 차례로 호명하며 “저는 오늘 정부를 대표해서 마음의 훈장을 달아드린다”고 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취임사), “이제 누구도 대한민국을 흔들 수 없습니다. 이제 누구도 국민주권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2022년 3·1절 기념사) 등 운율감 있으면서도 감성에 호소하는 표현이 화제가 됐다.

◇27년 검사 생활, 감성보다는 이성 중시

윤 대통령의 연설 스타일은 많은 부분 개인의 성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최진 대통령리더십 연구원장은 “감정에 휘둘려선 안 되는 검사 생활을 27년 한 윤 대통령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표현에 더 익숙한 것으로 보인다”며 “정치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국민을 위로하거나 감동을 주는 표현에 미숙한 것 같다”고 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대중 연설은 검사가 기소장 쓰듯이 하면 안 된다. 참모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연설기록비서관을 지낸 김영수 영남대 교수는 “윤 대통령의 연설은 거칠긴 하지만 메시지가 분명하다. 가장 중요한 점은 갖추고 있다”면서도 “대통령 연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윤 대통령 연설은) 탁탁 걸리는 느낌을 준다. 내용 전달력과 정무적 판단 면에서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충분한 논의를 거쳤다면 이렇게 거친 연설이 나올 수가 없다. (윤 대통령이) 연설문을 혼자 쓰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화려한 문장이 감동적 연설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을 지낸 강원국 작가는 “연설에 감동적 요소를 넣고 안 넣고는 전적으로 대통령 스타일에 달린 것”이라며 “노 대통령의 경우 사실과 논리를 중심으로 국민을 설득하려 했지, 미사여구로 감동을 만들어내는 것은 싫어했다”고 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등 지금도 회자되는 노 대통령의 어록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영수 교수도 “말만 번지르르한 가짜 메시지로 포장한 ‘쇼’로 감동을 짜내기보다는 질박하더라도 진정성 있는 표현이 낫다”고 했다. 김 교수는 김영삼 대통령의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이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란 명언을 언급하며 “사안에 대한 역사적 관점, 열정적 태도, 그리고 시대정신이 결합될 때 연설은 힘을 갖게 되고 국민에게 감동을 주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최진 원장은 “국민의 마음은 똑똑한 주장이나 논리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성과 논리, 그리고 가슴에서 우러난 진심이 있어야 한다”고 했고, 김영수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은 독회를 할 때 ‘일단 커피부터 한잔 하자’며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대통령은 참모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하고,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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