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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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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3-07-04 15:00

제11회 한카문학상 산문(수필)부문 으뜸상 / 허정희
  땅 위에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 있다면, 눈 덮인 땅은 긴 세월 동안 내린 눈의 무게를 어떻게 지탱했을까? 햇빛과 바람이 눈을 녹이고, 녹은 눈이 물 되어 땅 위로 새 순을 밀어 올리듯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시간은 나의 과거가 되어 흐른다. 삶의 시간을 모두 모아 손이 들고 있다면, 그 긴 시간의 무게를 들고 있는 손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까?. 눈에 보이는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 버린 것을…
보이지 않는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지만, 나의 열 손가락이 바쳐준 시간이 내 손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손등에 도드라진 힘 줄은 지난 삶의 굴곡처럼 불거져 있고, 움푹 팬 손등에 늘어난 검버섯은 크고 작은 사연을 안고 물결 같은 잔주름 위로 피어 있다. 손톱에 새겨진 손톱 주름살이 내 삶의 흔적을 찍어낸 판화 같고, 곱던 손 마디는 셀 수 없는 굽힘과 펴기로 굵어지고 휘어져, 하늘이 흐리거나 추운 날이면 뻣뻣해 온다.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들어서고, 차례를 기다리며 통로에 놓인 옷걸이에 외투를 걸고, 직원의 안내로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식장 입구에는 소박한 옷차림의 그레이스가 서 있고, 그녀는 내 손에 남편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과 장례 식 순을 건네 주었다. 표지엔 도널드의 젊은 시절 사진이 있고, 거기엔’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에요’라는 글이 있었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단지 내가 인사도 없이 옆방으로 사라진 것 뿐, 나는 나, 너는 너, 서로에게 어떤 의미였든 우린 그대로네요. 나를 그 옛날의 이름 그대로 불러 주오. 그리고 나에게 예전처럼 다정하게 이야기해 주오. 심각한 표정이나 슬픔 없는 너의 변함없는 목소리로, 우리가 나누던 작은 농담에 웃었듯이 웃어 주오. 내 이름은 항상 있는 살림살이처럼 그냥 그대로 이야기되고, 어둠 속에 남지 않고, 삶은 그 의미대로 항상 그랬듯이 그대로.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기억에서 사라져야 하지 않듯이 나는 기다립니다. 잠시 쉬면서 아주 가까운 어느 곳에서 모든 것이 편안하게.”
도널드는 1932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19세에 한국전에 참가했고, 베트남과 여러 나라에 평화 유지군으로 참전했으며, 캐나다에서는 한국 참전 용사 멤버로 활동했다. 그레이스와 도널드는 케임브리지 지역 마지막 남은 네 멤버 중 하나였고, 한국 참전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멤버 중에 나의 시아버님도 있다. 도널드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은 목사가 진행하는 형식에 따라 추모했고, 옆방에 차려진 간단한 샌드위치를 먹으며, 그를 기억했다. 장례식장을 나오며 바라본 하늘은 뿌연 회색 빛이고, 차가운 콘크리트로 쌓아 올린 건물이 죽은 뒤 누워보는 관처럼 싸늘하게 서 있었다.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니 죽음은 삶을 빛나게 하는 그림자일 뿐이었다.

  도널드 부부를 처음 만난 것은 케임브리지 참전 용사 모임에서다. 알려준 주소대로 아버님을 모시고 그곳으로 향했다. 건물에는 캐나다 국기가 달려있고, 입구를 지나 이층으로 가는 계단에서 오래된 건물이 내는 신음이 신경 쓰여 발꿈치를 들고 계단을 오른다. 문을 열고 들어선 텅 빈 방에선 휑한 바람이 불었고, 모퉁이 구석 테이블에 대여섯이 모여 있다. 기다림에 식은 커피를 마시다 눈 마주친 우리에게 반가운 인사를 한다. 도널드는 19세에 한국전에 참여했다고 소개하자, 옆에 있던 존이 자신은 16세 때 라고 수줍게 말하는 그의 눈빛은 그때의 어린 소년으로 돌아갔다. 그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만큼 시간이 흘렀음에도 소년이 되어 그 시절의 기억 길을 더듬었고, 얼굴은 추억으로 빛났다. 함께 시간을 가로질러 나눌 수 있음에 내 가슴이 찡하게 아려 온다.
하루가 다르게 청력과 기억력이 약해지는 시아버님을 바라본다. 시간이 바람 되어 흘러간다. 나의 삶도 흐르는 바람 속에 있다. 바람을 잡을 수 있다면, 그리고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내 곁에 묶어 두고 싶다. 치열하게 삶을 살았고, 이제 잠시 숨 고르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시간을 바라본다. 잡은 것을 놓아주니 편안해지고, 잡을 것이 없으니 손이 가벼워진다. 다행히도 나에게 글 쓸 수 있는 손이 남아 있어 감사하다.
도널드와의 마지막 인사로 파피 꽃을 관 위에 올려놓고, 한여름 태양 아래 하늘거리던 파피를 떠올린다. 청춘은 찬란하고, 영원할 것 같았는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시간이 내게서 멀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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