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희 (사) 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4월이 오면 나는 봄바람이 난다. 물병과 아이폰을 챙겨 넣은 망태기를 어깨에 메고 나 만의 산책길을 향해 집을 나선다. 재작년 옮겨 심은 참나물 뿌리가 제대로 잘 자라주면 좋겠다는 바램과 설레임으로 발걸음이 빠르다.
메이플 리지 동네 듀드니 길로 올라 오다가 230 가에서 오른 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공원이 있다. 공원 옆으로 잡풀을 헤치고 어렵게 안으로 들어가면 아늑한 공간이 나온다. 마치 나를 위한 참나물 밭처럼 파란 참나물이 무리지어 공터 여기저기를 메우고 있다. 나물 줄기 한 움큼 잘라 코끝에 대어 본다. 향긋한 봄나물 향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 아래 동네 사랑하는 아우가 가르쳐 준 우리들의 비밀스런 참나물 밭이 있었다. 우리는 봄이 되면 이 참나물 밭에 들어가 내 손으로 농사 짓지 않은 봄나물을 뜯어 참나물 비빔밥을 먹었다. 그러나 어느 날 땅 주인이 집을 짓는다면? 내 땅이 아닌 나물 밭이 사라 질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궁리 끝에 뿌리를 옮겨심기로 결심을 했다. 2년 전일이었다. 예상한 대로 나물 밭은 그 후 사라졌다.
내가 즐겨 찾는 산책로 카나카 크릭 (Kanaka Creek) 길은 짧지만 나에겐 보물스런 길이다. 봄꽃은 물론 4월 하순부터 삐쭉 삐죽 올라오는 고사리며 이른 여름 색색의 새몬 베리(Salmonberry), 한 여름엔 복분자 등, 이 산책로는 늘 나를 즐겁게 해 준다. 산책로 중간 쯤에서 무지개 다리(Rainbow Bridge)가 나오고 다리 아래로는 연어가 올라오는 작은 강이 흐른다. 다리를 건너 오른 쪽으로 언덕을 오르면 왼쪽 인가 반대 쪽으로 임자 없는 공터가 나온다. 그곳에 들어가면 여기 저기 잡풀의 군상들이 다투어 푸르름을 자랑한다. 공터 오른 쪽 가파른 낭떠러지가 끝나면 저만치 아래로 무지개 다리를 잇는 강물이 조용히 흐른다. 이 공터에 올라 오면 나는 쓰러진 고목 그루터기에 앉아 쉬면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한다. 이름 모를 새들도 나를 반겨 노래한다. 내가 앉아 있는 고목 주변으로 임금님 수라상에만 올랐다는 동부에서나 볼수 있는 귀한 활나물도 보이고 민들레도 잡풀 뒤에 숨어서 꽃을 피운다. 봄은 새 생명을 잉태하는 환희의 계절이다.
나는 이 공터야말로 참나물을 옮겨 심기에 최적의 장소라 판단했다. 그리고 듀드니 230가 공터의 참나물 뿌리를 여러개 캐어다가 레인보 다리를 건너 이 언덕에 옮겨 심었다. 다음 해 뿌리에서 싹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벌써 2년 전 일이었다.
작년 4월 어느 화창한 봄 날 나는 또 봄바람이 났다. 그 때는 내가 지인들과 함께 불어 샹송 낭독을 취미 삼아 줌으로 강의하던 때였다. 갑자기 옮겨 심은 나물 뿌리가 눈에 어른거려 곧 바로 나물 망태기를 어깨에 메고 무지개 다리로 향했다. 다리를 건너 언덕을 오르는데 핸드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나를 흔들었다. ‘지금 줌 시간인데 왜 안 들어오십니까?’ 나는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봄바람이 나서 줌 강의도 잊었구나! 집으로 돌아가자니 이미 늦었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도 내 발걸음은 언덕을 올랐다. 언덕 위 공터에 들어 가 설레는 마음으로 나무 그루터기를 살펴 보았다.
분명히 큰 나무 세 그루 아래에 심었는데, 한 곳은 아무 것도 안 보였고 두 번째 그루터기엔 몇 뿌리가 싹을 냈지만 억센 잡풀에 덮여 납작 엎드린 형국이다. 다행히 마지막 나무 아래에는 잡풀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제대로 나물이 자라고 있었다. 이렇게 옮겨 심으면 되는구나! 그러나 나물로 뜯어 오기엔 아직 어려서 그대로 두고 신나게 콧노래를 부르며 언덕을 내려 왔다. 한 열흘을 지나 이제는 나물을 뜯어 올만큼 자랐겠지 기대하며 또 찾아 갔다. 그러나 올 때마다 참나물은 자라지 않고 그대로 였다. 흙이 나쁜가? 바람이 너무 많은가? 그렇게 작년 봄은 참나물 수확을 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지난 4월 어느 날 한인 마켓에 들렀을 때 벌써 잘 자란 참나물이 눈에 띄었다. 문득 옮겨 심은 참나물 생각이 나서 무지개 다리를 찾아갔다. 작년에 수확을 거두지 못한 것은 불량한 토양탓이라 판단 했었기에 큰 기대 없이 언덕을 올라 공터로 들어 가 보았다. 아! 작년에 비실비실 하던 참나물들이 푸른 잎을 머리에 쓰고 제법 훌쩍 큰 키를 자랑하며 나를 반겨 주었다. 한 줌 뜯어 봉지에 넣으며 옮겨 심은 나물 뿌리의 고뇌를 읽었다. 제 꼴을 갖추고 자라기 까지 필요했던 것은 토양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옮겨 심은 나물 뿌리에서 줄기가 나고 푸른 잎을 피우기 까지 땅속에서 겪었을 뿌리의 고난은 바로 우리들의 것이리라! 언어와 풍습이 다른 나라에서 뿌리 내리기란 나물 뿌리처럼 말로 표현키 어려운 사회 적응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고통과 수고가 클 수록 2세대 3 세대로 이어지는 시간 안에서 후세대는 적응 된 사회에서 깊이 내린 뿌리 위에 가지를 뻗고 풍성한 잎을 드리우는 거목으로 자랄 것이다.
오늘 저녁 메뉴는 내가 따온 참나물과 활나물로 만든 비빔밥이다. 파란 눈의 며느리도 봄 나물 맛을 알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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