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죄 많은 손자를

이은세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1-09-06 11:38

이은세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얼마 전 반세기 전 중학교 1학년때 돌아 가신 할머님이 깜박 졸다 설핐 꾼 꿈 속에 찾아오셨다.


중풍을 맞아 2년간 누워 계시다 85세에 돌아 가시기 전 수 십명이나 되던 친, 외손자들 중에 막내와 바로 위의 나를 끔찍이 아끼셨던 밝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캐나다까지 오셔서 꽃 도매상을 구경 시켜 달라고 재촉을 하셨다. 밖이 추우니 겨울 외투를 챙겨 입고 나오라고 하셔서 뒤에서 껴안고 나서다가 깨었다. 몸은 싸늘하게 식어 32도가 넘는 밖으로 서둘러 나와보니, 꿈의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겁이 더럭 났다. 기억에 돌아 가신 후 처음이지 싶어 고국의 본가와 형제들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싶어 형제들 마다 전화를 돌려 보았다.


80이 넘은 누이와 두 형님도, 70대의 두 형님 모두 통화가 안 되고, 코로나 시국에 암투병까지 끝내고 다시 일을 하다가 락다운이라 집에서 쉬고 있다는 막내 동생과 겨우 통화가 되었다. 대외적으로 모두 건강하고 별고 없는 것 같다고 해서, 누님과 산소에 한 번 가서 장마에 무너지기라도 했나 점검해 보라고 했다. 추석이 얼마 안 남아 이미 본가를 지키는 셋째 형님이 잘 관리를 하고 계실 것이란 생각은 하면서도 마음이 안 놓였다.


인천의 한 고을 주지인 종가 집으로 시집을 오셨지만, 일경의 핍박으로 네 형제 분 가족들이 지금의 부천, 시흥, 광명의 경계에 있는 구석 골이란 산골짜기로 많은 땅도 버린 채 야밤도주를 하셨다고 했다. 어렵게 다시 기반을 잡을 무렵 해방을 맞아 공포에서 벗어 났지만 곧바로 6.25가 터졌다. 세째 할아버님 댁은 인민군 포병들이 숨어 들어 폭격을 맞아 온 가족이 폭사를 했다. 두 집 건너의 우리는 그 폭격으로 집이 다 무너져 불타 없어지고 할아버님은 허리를 다쳐 평생 고생을 하셨다. 막내 고모는 파편이 이마를 깊이 파고 들어 다들 죽는다고 했지만 어느 스님의 조언을 듣고 할머님이 지극 정성으로 약초들을 뜯어 다 살려 내셨다고 했다.


막내 할아버님 댁 당숙은 인민군에게 끌려 가 생사를 모르고, 작은 당숙은 군대에 계셨다. 유복자인 다섯 살 위의 육촌 형 하나를 데리고 십리 밖에 사시는 당숙모 때문에 바쁜 대가족 살림에도 늘 제사며,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틈나는 대로 싸 들고 어린 우리를 앞 세워 찾아 가셨다.


십리 거리에 종친들이 100여가호씩 모여 사는 두 곳의 집성촌의 아이들부터 어른들이 늘 끊이지 않고 찾아왔다. 6촌, 8촌들은 방학이면 와서 살다가 가고... 지금도 동갑내기 고종사촌은 외갓집 옆에 살겠다고 본가 바로 옆집으로 이사해 살고 있다. 시집 간 여자 조카네도 옆으로 이사를 와서 살고 있다.


종전 후 일제와 6.25 때 구해 주거나 도와준 분들도 명절과 할아버님 생신이면 각지에서 줄 지어 찾아와 술상이 끝없이 이어졌다. 밤이면 허리가 아프다고 밟아 달라고는 했어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감사할 일이라고 하셨다. 전에는 열 말도 더 들어 가는 독에 우리만의 전통 술을 직접 담가서 대접을 했지만 나라가 안정되며 밀주라고 단속을 했다. 그래서 산을 넘고 저수지를 지나 으스스한 상여 집 앞을 숨죽이고 달음질 쳐야 하는 술 도가까지 심부름을 다녀야 하는 것도 복이라며 우리에게 불평을 못하게 하셨다.


게다가 그 무렵엔 의족이나 갈고리 의수를 무시무시하게 달고 떼로 몰려 다니던 상이 용사들도, 전쟁 통에 미쳐버린 옆 마을 아버지 친구의 누이 분도 다른 집은 안 가도 늘 우리 툇마루에 와서 식사를 해결하고 가게 하셨다. 누추한 복장에 늘 알 수 없는 말을 흥얼거리며 찾아오면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였던 넓은 안 마당에 몰려온 아이들에게 절대로 놀리거나 해꼬지를 못하게 말리셨다.


집성촌 친척들의 애경사 등으로 외출하실 때면 따라다녀야 했던 할머님을 통해 가족과 친척, 이웃, 나라를 올바로 알게 한 내 인성이 성장 했음을 어른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운영진의 불평에도 방송아카데미 강좌에 별도의 시간을 할애해 인성강의를 먼저 하게 했다. 건강 때문에 급히 이민을 안 왔으면 아마 지금쯤은 은퇴하고 고향 산골이나 강원도 산골에 스포츠 캠프촌을 차려 놓고 마라톤과 향토문화, 인성 교육 등을 하고 있지 싶다.


새벽녘까지 한국 가족들이 모두 안녕하시다고 확인을 하고 나니, 초가을 땡볕에 백야드의 꽃들에 물을 주고 뻘뻘 흘린 땀을 시킨다고 샤워를 하고 지하실 냉 골에 요가메트를 깔고 누웠다가 깜박 잠든 손자를 구하러 오셨다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할머님은 돌아 가시기 전까지 세상에 캐나다라는 나라가 있는 줄도 모르셨을 텐데 도 찾아오신 걸 생각하니, 70 살이 다 되도록 여러 번 생사의 갈림 길에서 극적으로 구해 주신 분이 누구일까 궁금했던 의문이 풀렸다. 가슴이 미어지며 돌아 가실 때도 울지 않은 눈물이 솟구쳤다.


바쁘다고, 타국이라고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도록 제사도 한 번 못 챙긴 죄 많은 손자가 뭐라고...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솔방울의 추억 2023.12.04 (월)
카톨릭을 국교로 하는 캐나다의 가장 큰 국경일은 당연히 크리스마스이다.다민족 다문화 국가이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에 따른 다양한 종교가 공존해 크리스마스보다만민의 신과 같은 어머니를 기리는 마더스데이가 실질적으로는 더 많은 국민들이 기리는날이기는 하다.한 해를 마무리하며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는 국경일이라 크리스마스 트리 등 많은 조명,장식과 선물, 음식, 종교적 문화가 발전되어 온 글로벌 축일이다.솔방울도 크리스마스 트리와...
이은세
기적 같은 인연들 2023.03.06 (월)
   50살 생일 선물로 줄 멋진 센터피스 꽃 장식을 골라 들고 득의 만만한 얼굴로 계산대로 오던 손님이 갑자기 발길을 멈춰 섰다.근래에 나온 활짝 핀 하얀 서양난 세 그루가 예쁘게 심겨진 화분에 멈춘 시선을 떼지 못하고 환성을 질렀다. 들고 있던 센터피스를 제 자리로 가져다 돌려 놓고, 그 서양난을 들고 왔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인조 서양난이고 값은 두 배나 비싼데 괜찮겠냐고 하니 왜 이렇게 예쁜 꽃을 가짜라 하냐며 장난치지 말라고...
이은세
다둥이네 막내 2022.10.04 (화)
 나이아가라의 기후가 온타리오에서는 가장 온화하여 미국의 캘리포니아라고도 한다. 이리호와 온타리오 호수 사이에 나이아가라 강과 폭포를 통해 3면이 물이라 나이아가라 반도라고도 한다.기후가 좋아 온타리오 포도와 꽃 생산의 70% 이상이 나이아가라에서 이루어지고, 아름다운 자연과 관광거리가 모두 지척에 있어 많은 공직자들이 은퇴 후 이사를 와서 정착을 한다. 얼추 서울특별시 면적에 인구가 고작 20여만명 정도에 골프장만도 50개가...
이은세
90 을 바라보던 할아버님이 애지중지하던 광석 라디오를 트랜지스터로 바꾸고 신기해 할때, 외국 목사님의 도움으로 일본의 흑백 TV를 선사받아 시골마을 사람들이 밤낮 없이 모여 시청을 하는 경이로운 사건이 되었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것은 상상의 세계와도 같았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에 비해 선진 문명은 상상을 초월해 앞서 가고 있었다.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초반을 과학적으로 나노문명의 시대라고 한다. 원시문명에서농경...
이은세
죄 많은 손자를 2021.09.06 (월)
이은세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얼마 전 반세기 전 중학교 1학년때 돌아 가신 할머님이 깜박 졸다 설핐 꾼 꿈 속에 찾아오셨다. 중풍을 맞아 2년간 누워 계시다 85세에 돌아 가시기 전 수 십명이나 되던 친, 외손자들 중에 막내와 바로 위의 나를 끔찍이 아끼셨던 밝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캐나다까지 오셔서 꽃 도매상을 구경 시켜 달라고 재촉을 하셨다. 밖이 추우니 겨울 외투를 챙겨 입고 나오라고 하셔서 뒤에서 껴안고 나서다가 깨었다. 몸은...
이은세
신년 액땜 2021.02.01 (월)
이은세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20대 청년이 가게로 들어왔다.요즘은 누구나 마스크를 안 쓰면 들어오지도 못하게 해서일반 손님인지 강도인지 구분이 힘든데 느낌이 써늘해서설마 하면서 몽둥이와 가스총 위치를 점검했다. 특별히 뭘 사려는 행태가 아니라 긴장을 하는데물건을 두 개를 들더니 곧바로 출구 쪽을 향해 돌아서더니달아나기 시작을 해서 카운터를 돌아 입구까지 20미터는 뒤져서고함을 치며 따라가니 잽싸게 속력을 내서 달려갔다....
이은세
나의 공주님들 2020.08.24 (월)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공주하면, 백설공주를 연상하게 된다. 착하고 아름다움의 최고모델로서 천사같고 요정같은 여인으로......고 3때 학내 체벌사건에 항의하는 데모현장 입구를 막은 바리케이트 위에서 온종일 담임을막아선 죄 때문에, 한 대기업 회장님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환경이 가장 열악한 시골 형광등공장 생산라인으로 쫒겨 갔다.뜨거운 개스불로 형광등 유리를 자르고 붙이느라 매캐한 연기에다 실내 온도가 무려45도에 달해 숨이 턱턱...
이은세
새해 아침 2020.01.16 (목)
케네디언들이 이제는 코리안 새해(금년은 Jan 25, 2020)를 대충 안다. 중국 설이 고조선것이라고 우기는 내게 주위 사람들은 중국설이라는 말도 조심을 하고...   새해 인사를 하다가도 중국명절, 아니 코리안 명절은 며칠 남았냐고 하면 오히려 남의문화를 휩쓸려 산다는 생각에 머쓱해지기도 한다. 오지랖이 넓은 이들이 우리 새해 날짜뿐만아니라, 풍속까지 물어 오면 자존심이 객기처럼 발동을 하고 만다.   너희는 밥만 먹고 말로만...
이은세
광고문의
ad@vanchosun.com
Tel. 604-877-1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