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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19-09-09 10:54

김선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벌개미취는 연보라색의 꽃이 피는 여름 꽃이다. 국화과의 여러해살이 꽃으로 가늘고 길쭉한 꽃잎이 가지런히 나서 가운데의 노란 술을 동그랗게 둘러싼다. 봄과 초여름까지 풀처럼 낮게 지내다가 여름의 뜨거운 볕 아래서 줄기가 길게 올라오고 그 끝에 꽃봉오리가 달리기 시작한다. 장마가 지나고 꽃이 버텨낼까 싶은 높은 온도가 되면 봉오리가 벌어져 소국처럼 생긴 예쁜 꽃을 피운다. 벌개미취는 생명력이 강해서 뿌리를 사방으로 뻗어 금세 군락을 이루고 꽃이 드문 여름 정원에 싱그러움과 보랏빛 생기를 선사한다.

실제로 우리 집 벌개미취는 지금껏 그러기는커녕 구박데기 신세였다. 여름 정원에 싱그러움 ’은 생각지도 못했다. 줄기가 너무 높게 올라오다가 다 꺾여서 바닥을 기거나 여기저기 한두 개씩 피어나서 꽃인지 잡초인지 구분이 안돼 눈여겨보지도 않았다. 봄이면 어김없이 세차게 포기들이 올라오지만 나는 뽑아 버리기 바빴다. 다른 꽃들에 쏟을 정성도 부족한데 기대치 없는 벌개미취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밟히면 밟히는 대로 뽑히면 뽑히는 대로 던져버렸다.

아무리 뽑아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벌개미취이다. 뿌리를 다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뿌리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거기서 싹이 올라온다. 한번 뽑아보면 뿌리가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하나를 뽑아도 이미 땅속에서 온 데로 뻗었던 뿌리가 다른 곳에서 또 싹을 올린다. 이 뿌리의 생명력 덕에 밟히고 뽑혀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뿌리가 튼실해져서 다른 꽃이 자라는 땅속으로 여기저기 뿌리를 뻗어간다. 그래서 더욱 안심하고 뽑아버렸는지 모른다. 어딘가에서는 또 살아나겠지라는 생각이었다.

올해는 작심한 듯 빽빽하게 싹이 올라오더니, 튤립과 크리스마스로즈가 봄 동안 가득 채웠던 앞쪽 정원이 벌개미취 밭이 되었다. 맞춘 듯 반듯하게 열까지 맞춰 착실히 자리를 잡았다. 올봄에 싹들을 뽑지 않고 그대로 둔 탓이다. 자리를 잘 잡아서 뽑기도 미안할 지경이라 그대로 두었더니 보란 듯이 세력을 형성해서 그동안 땅속에서 키워온 힘을 다 쏟아냈다. 늘 쓰러지기만 하던 꽃대가 똑바로 하늘을 향해 자라 오르고 꽃봉오리도 잔뜩 달렸다. 그동안 천대받던 시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이 빼곡하고 눈부시게 꽃을 피웠다.

꽃이 적은 여름, 앞마당이 보랏빛 생기로 가득하다. 정원에 싱그러움과 생기를 정말로 선사하고 있다. 장마 지나고 피기 시작해서 9월이 된 지금도 보랏빛 꽃이 생생하다. 봉오리가 계속 생기고 피어나며 오래도록 꽃을 피우는 모습이 기특하다. 뽑히고 밟혔던 고난의 세월을 보상받고 있다. 지금은 누가 뭐래도 벌개미취의 계절이다. 자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것을 벌개미취가 보여주고 있다.

전성기는 힘들었던 시절과 절망의 나날이 있었기 때문에 전성기다. 그런 시간이 없으면 일상일 뿐이다. 하나하나 말하기도 어렵고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힘겨운 시간들. 자신의 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는 허방 같은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뿌리의 힘을 키워 두고 아름답게 피어날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 시간을 인내하다 보면 자신이 피어나기 딱 좋은 조건을 가진 시간이 온다. 꼭 온다. 이 아름다운 전성기의 기억이 생명체에겐 또 다른 힘이 되어 앞으로 올 변화무쌍한 시간을 살아내도록 도와줄 것이다. 근데 벌개미취가 고생하던 시기에 내가 제일 무시했던 것 같아 좀 미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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