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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부좌를 틀고 바다와 마주 앉으면 마음 안쪽에도 수평선이 그어진다. 수평 구도가 주는안도감 덕분인가. 흐린 하늘에 부유하는 각다귀 떼 같은 상념들이 수면 아래 잠잠히내려앉는다. 바다빛깔이 순간순간 바뀐다. 이 바닷가 어디쯤에 창 넓은 집 하나 지어 살고싶다는 내 말에 섬에서 태어난 토박이 지인이 웃었다. 바다를 노상 보라볼 필요는없어요. 생각날 때 고개를 넘어 달려가 안겨야 애인이지 같이 살면 마누라가되어버리잖아요. 그럴...
최민자 
젊은 날 최전방 백암산 중턱에서 만난 불에 탄 주목과 구상나무의 그루터기들, 살아 천년죽어서 천 년을 버텨오며 옹골찬 기개로, 선 굵은 삶을 살았던 주목과 구상나무에게서 늘푸름과 꼿꼿함을 배운다. 전쟁의 포연 속에 육신을 불태웠어도, 꿈틀거리며 밀려오는 혹독한 칼바람에도, 자신을이겨내고 그루터기로 살아남은 홀연한 기개, 세상의 어느 누구도 뿌리로 이어지는 강인한삶의 의지를 꺾지는 못하였으리라. 다시 덕유산 향적봉에서...
이상목
이슬비는 2025.04.11 (금)
봄을 머금은 이슬비는 아기 숨소리보다 조용히세상을 어루만집니다 보드라운 손길로민들레 얼굴을 씻기고가로수 조막손 살며시 펴게 합니다 늦잠 자는 꽃망울가만가만 깨우며서두르지도성내지도 투덜거리지도 않습니다 풍경을 부둥켜안는 이슬비는 괜찮다 괜찮다 다독이시던어머니의 속울음입니다.
임현숙
브레넌의 죽음 2025.04.11 (금)
“아이고 우리 딸이 너무 바빠서 먼지도 못 닦고 다니는구나!”   딸의 차 운전대 위에 하얀 눈처럼 먼지가 쌓여 있었다.   "엄마! 그거 건드리지  마! 아직 브레넌 털이 남아 있어, 그냥 놔둬. 엄마, 플리스."  딸의 목소리는 울음을 삼킨 듯 떨렸다.  브레넌이 떠난 지 벌써 반년도 넘었는데 ...  "아직은 아냐. 좀 더 있다가 닦을게. 지금은 그냥 놔둬."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지난 여름 방학을 며칠 남겨...
김춘희
그대 뒷모습 2025.04.11 (금)
서녘 하늘에 별이 돋는다. 마음이 잔잔해야 보이는 초저녁별, 실눈을 뜨고 별 속에 아는 얼굴이있나 찾아본다.지난겨울에는 눈이 자주 많이 내렸다. 눈이 내릴 때마다 우리나라 문화계의 큰 별들이 떨어졌다.미당 선생이 떠나시고 얼마 후, 온종일 눈이 내리던 날 정채봉 선생이 눈 나라로 가셨다. 이어 운보선생도 떠나셨다. 그 뒤로는 겨우내 하늘이 낮게 내려앉으면 또 누가 떠나실라 겁이 났다. 이윽고 건너다본 커다란 눈, 그 웃음 뒤에 끝 모를...
반숙자
별(星)의 집 2025.04.11 (금)
산그늘 아래 조가비 같은 오두막 한 채저녁 밥물 끓는 소리 도랑물처럼 흐르고굴뚝 연기 아스라이 어스름을 몰고 오는데박꽃처럼 허리 휜 어머니가정짓간 문턱을 넘나듭니다사립문을 건너온 초저녁 별들이초롱불처럼 처마 끝에 깃을 내리면비탈 밭에서 달빛을 지고 돌아오시는 아버지,실루엣 같이 구부정한 아버지의 뒷모습도달빛처럼 환해집니다아이들 글 읽는 소리마저 아득히 사라지고고요가 홀로 내려앉아 졸고 있는 집,곤한 어머니 아버지의...
이영춘
4월 2025.04.04 (금)
꽃이 피려면아직4월에 머물러야 합니다집채 만 한 겨울을조금 더 이겨내야 합니다등 시린 우리의 견뎌냄은기대라는 버팀목으로조금 더 꾹꾹 눌러야 합니다 누구는 성급한 입김으로냉골에 봄을 불어대고쇼윈도 실루엣을짧은 차림으로 갈아 치웁니다 꽃이 피려면당신의 4월이 익어야 합니다기다려 크는 열매가차가운 기억을 쓸어낸 적 있잖아요냉동실에 익숙한 가슴앓이라면자꾸 꺼내 묵상하지 말아요상처 입기 쉬운 곳에숨쉬기 쉬울 만큼...
김경래
   햇살이 따뜻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온기가 차가운 피부를 어루만진다. 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물러간 자리에는 포근한 기운이 스며든다.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듯, 굳어 있던 몸을 천천히 늘여 본다. 산기슭에 머문 햇살 아래로 안개처럼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물기를 머금은 흙에서는 희미한 풀 냄새가 올라온다. 얼어있던 강물이 졸졸 흐르기 시작하고, 바람은 나뭇가지를 가볍게 흔든다. 새가 가지를 툭 치며 날아오르고, 어딘가에서는...
허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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