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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되지 않은 삶

수필가 심현숙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7-01-07 11:45

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기고/수필
내가 만일 한 마음의 상처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일 한 생명의 고통을 덜게 할 수 있다면
혹시 그 오뇌를 식힐 수가 있다면
또는 내가 숨져가는 한 마리 물새를
그 보금자리에서 다시 살게 한다면
나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20여 년 전 이곳에서 대학을 졸업한 딸에게 ‘에밀리 디킨슨(미국 현대시인)’의 시를 선물로 준 적이 있다. 이민 와서 2년 만에 대학을 가게 된 그 아이는 영어로 강의를 들어야했으니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부모는 일터에서 아이들은 학교에서 가족들이 온통 스트레스로 힘든 시기가 있었다. 이민의 삶이 언젠들 그리 녹녹하겠는가마는 그래도 이제는 편하게 살 수 있는 시기인데 그리 못하고 있는 우리 부부의 노년의 삶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얼마 전 우리 문협회원들이 문협 종무식 후 남편이 있는 캐어 라이프(널싱 홈)에 방문하였다. 그들은 내가 생각보다 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다.
  “이런 말씀드리면 안 되겠지만 바깥 선생님을 내려놓으시면 안 되겠어요?” 젊은 회원이 나를 위하여 어렵게 꺼낸 말이다.
  “의무적으로 하시나요?” 아내라는 의무감에서 돕느냐고 내 또래의 회원이 던지는 질문이었다.
  “남편이 이리 되고 보니 남편의  의미가 달라지더라고요. 이민 와 24시간 붙어 살다보니 우리도 여느 부부처럼 다투기도 하며 살았지요.” 나는 정작 하고 싶은 대답은 하지 못 했다. 남편이 있는 주변에 방까지 얻어 살면서 하루 중 절반을 곁에서 수족이 되어 산다는 건 이해가 안 가는 눈치들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이들뿐이 아니다. 지금 내 나이로 볼 때 이런 생활이 무리지만 한 시도 남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을, 게다가 정신이 멀쩡한 사람을 제쳐놓고 내가 무엇을 한들 마음이 편하며 기쁘겠는가.
  내가 딸에게 이 시를 선물할 당시 나는 40대이었고 아직 깊은 고뇌로 삶이 성숙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이 시 뒤편에 숨어있는 의미를 알기나했겠는가. 누군가의 상처를 어루만져 치유해준다는 건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고는 어려울 것이며 한 생명의 고통을 덜게 한다는 건 자기의 삶까지도 포기해야하는 희생이 수반된다는 걸 너무도 몰랐다. 또 이제야 겨우 한 가지 알게 된 건 아무리 희생을 한다 해도 상대의 고통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자기 손톱 밑의 가시가 남의 염장 곪는 것 보다 더 아프다'는 말처럼 가족이 죽을 정도로 힘들다 해도 환자에게는 자기의 고통이나 아픔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남편은 자기를 집에 데려가지 않은 걸로 우리 모녀에게 화가 나고 몹시 섭섭해 한다. 집에 있을 때는 우리의 고생이 안타까워 오히려 요양원에 보내달라고 했지만 막상 와보니 너무너무 집이 그리운 것 같다. 사실 나도 주말이면 하루 집에 가는데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마치 여행지에서 돌아온 듯 편안하고 아늑하다.
  딸과 고심 끝에 남편을 집으로 퇴원시킬까 생각도 해보지만 엄두가 안 난다. 내 몸이 여기저기서 힘들다고 아우성이니 혹 남편이 집으로 온 후 내가 병이라도 나면 남편은 누가 돌볼 것인가. 이 점이 두렵다. 남편은 자기의 남은 삶을 집에서 보내는 것이 단 하나의 마지막 소원인데 외면하기가 정말 힘들다.
  내가 15개월 전 남편과 함께 캐어 라이프에 들어왔을 때 유리창가에 자리한 침대에 눕게 된 남편의 얼굴에 가을석양이 비추었고 그 빛은 바로 생명 같은 희망이었다. 3개월 만에 깊고 깊은 중환자실을 탈출하여 햇볕을 쪼이다니 꿈만 같았다. 그러나 그 환희도 잠시 우리 부부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마치 종착점 없는 밤길을 나서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매일 보이는 것은 점점 쇠약해져가는 환자들의 모습뿐이다. 정상인인 내가 그들 속에 살다 보니 나도 환자가 되어가는 듯 맥이 없다.
  가족 한 사람 돌보기도 이리 힘 드는데 일생을 소록도에서 나환자들을 돌보다 그 사람들과 같이 되어 그곳에 묻히신 분들이나 평생 봉사만 하시며 사시다 연로하시자 편지 한 장 남기고 고국으로 떠나신 수녀님은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이 외에도 이태석신부님, 테레샤수녀님 그리고 헤일 수 없이 많은 분들을 생각하면 부끄럽기만 하다. 이분들에게는 자기란 없었다. 나보다 남을 위해 사셨던 그 분들을 보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인적인 어떤 힘과 사랑을 품으셨다. 이분들의 위대한 업적을 되새기다 보니 나도 조금 용기가 나는 것 같다.
  '나도 할 수 있어. 남편의 소원을 들어줄 거야.
그래서 남편이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멈출 수 있다면,
그래서 남편의 고통을 덜게 할 수 있다면….
신은 내게 감당할 수 있는 건강과 지혜를 축복으로 내려주실 거야.'
  나는 오래 전 딸에게 선물했던 시를 내 자신에게도 새해선물로 주고 싶다.
 
  '내가 만일 한 생명의 고통을 덜게 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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