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예배를 마치고 고인께 명복을 빌던 짧은 시간, 그분은 창백한 밀랍의 얼굴빛과 초연한 표정으로 나는 이제 이 세상 사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치 타들어 가는 촛불처럼, 고통으로 무너져 내린 육신은 죽음의 다리를 건너 미지의 세계로 떠나갔다. 나는 생전의 고인을 기억하며 기도 드렸다. 병마의 고통과 불의한 세상에 대한 절망을 모두 내려놓으시고, 빛나는 날들을 기억하며 죽음의 여정에
오르시기를. 고인은 평소대로 온전한 의식 속에서 평온한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믿고 있다.
고인의 부음을 알리는 지역 인터넷 신문에는 연일 그분 삶의 공과에 대한 글들이 실리고 있다. 몇몇 여과 없이 쓰인 부정적인 글에서, 남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각박한 세태를 본다. 고인 생전의 정치 성향이 내 정치 성향과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분법적인 비판이다. 때로는 내 생각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일이, 붓 대롱으로 하늘을 보는 일과 같을 때가 있다. 내 생각의 고착화, 내 견해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내 빈 그릇에 더 많은 무엇을 담을 수 있기를 깊이 생각하는 요즈음이다. 동시대를 함께 산 우리는 고인이 생전에 겪은 굴곡진 시대 상황을 이해하며, 그분의 죽음을 추도하는 일이 우선이 아닐까.
내 죽음 뒤에, 남은 사람들이 내 실제 모습과 다른 허물을 쉽게 말하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을 것이다. 내 고정된 견해에 의한 피상적인 상황과 사람에 대한 판단이, 가끔 사실과 다를 때가 있음을 알고 있다.
가까운 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습관처럼 되풀이되던 일상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는 언젠가 나를 돌아올 수 없는 블랙홀에 밀어 넣고, 내 미래의 삶을 미완으로 멈추게 할 것이다. 지금 나는 유한한 삶이라는 집을 죽음이라는 토대 위에 짓는 중이며, 그 토대가 예고 없이 내려앉을까 근심하기보다는 그저 견고한 집 짓기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다. 순간에 깨어있어 현재에 집중하며, 지향하는 삶의 방향을 살피며 나아갈 뿐이라는 가르침을 되새기며.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ㅡ”
윤도현 시인의 한 편의 시 ‘연탄재'가 나를 일깨운다. 자기 몸을 태워 방을 데워주고 빙판길 위에서 마지막 사명을 다 하는 연탄재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나 아닌 누구를 위해, 자신의 삶을 연소 시킨 이들을 기억하게 한다.
살아온 흔적 중에 많은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 자신의 성취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 그리고 한 줄의 약력도 쓸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 모두의 죽음은 고통이고 상실이며 비통한 슬픔이다. 죽음의 다리를 건너간 사람들은 다시 볼 수 없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기억 속에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누구의 죽음과 상관없이 해는 계속 뜨고 , 달과 별은
빛을 발하며, 썰물은 바다로 밀려가고, 세상은 전과 같이 이어져 가고 있다.
“이제 삶이 변하여 죽음이 되었으니 이는 춘하추동의 사계절이 순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내는 지금 우주 안에 잠들어 있다. 내가 슬퍼하고 운다면 자연의 이치를 모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슬퍼하기를 그만두었다.”
아내의 죽음 뒤에 장자가 한 말은 꽃비 속에 들려오는 풍경 소리가 되어 내게 평화로움을 건넨다. 미지의 세계로 가는 길에,이 세상에 그리고 많은 인연에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뭇별들이 총총히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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