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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3-03-20 14:54

심현숙 / (사) 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작년 가을 모국에 갔을 때 속초 여행을 하는 기회가 있었다. 여고 친구를 16년 만에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 부부는 서울 동서울터미널까지 나를 마중 나와 반기며 환영해주었다. 친구는 서울에 집이 있는데 왜 속초에서 혼자 지낸 지 의아했다. 도착 다음 날 아침, 나의 끈질긴 추궁 끝에 “건강검진을 하던 중 00 암 진단받고 수술하여 지금 이곳에서 요양 중이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수술 후 5년 동안 재발이 안 되면 조금은 안심할 수 있다는 그 기간을 공기 좋은 이곳에서 보내고 있다고 한다. 유기농 위주의 식재료를 사용한 철저한 식이요법과 적당한 운동. 그리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무엇보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조용히 지내는 것 같다.
 이런 와중에 나를 위하여 매일 다른 식단과 여행 스케줄을 벽에 붙여놓고, 음식도 미리 만들어 놓는 등 친구를 맞는 자세에 빈틈이 없었다. 내가 그곳에서 편안하고 따뜻하게 입고 여행할 수 있는 옷과 모자까지 완벽하게 준비해놓았다. 속초 팔경과 설악산을 보여주고 싶어 이리저리 뛰는가 하면, 토속음식을 하나라도 더 먹여주려고 맛집을 찾아다니던 친구의 모습에서 가슴 찡한 감동과 진실한 우정을 온몸으로 느꼈다.
 16년 전 친구가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작은 아들네를 방문했을 때도 내가 친구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친구의 아들이 주선해준 단체 관광여행도 하며 밤이면 날이 새도록 학창 시절의 이야기로 깔깔거리고 행복해했다. 그때도, 지난가을에도 우리는 어제 헤어졌다 오늘 다시 만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리들의 대화 속에 무슨 거창한 주제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사소하고 평범한 이야기들이 그냥 시작도 끝도 없이 펼쳐질 뿐이다. 하찮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참으로 삶의 기쁨과 진정한 위로를 받을 때 거기서 우정도 다져지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일주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떠나오던 날, 친구는 두툼한 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무경이 아빠 산소에 갈 때 꽃도 사고, 3주기 때 교회 강대상에 꽃도 장식해라. 감사헌금도 해. 내가 미국 갔을 때 무경 아빠가 누워계시면서도 영어 못한 나를 위해 너를 보내주셨잖아. 그때 남편과 우리 식구들이 얼마나 너와 무경 아빠께 감사해했는지 몰라."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실 나도 봉투를 준비해 현관 앞에 놓인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언니 친구가 캐나다에서 왔다고 영암에 사는 친구 사촌 여동생이 정성스레 담근 김치와 싱싱한 해산물을 택배로 보내왔다. 절인 노란 속 배춧잎에 금방 양념소를 비빈 것처럼 맛깔스러웠다. 언니를 위해 사촌 동생은 손수 무공해 농작물을 재배해 수시로 보내주는가 하면, 언니는 고마워서 넉넉하지 못한 동생 앞으로 적금을 넣어준다는 푸근한 말을 듣고 두 자매의 깊은 우애에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나도 한번 적금을 넣어주고 싶으니 이번 달엔 이 돈으로 입금해주면 고맙겠어.>하는 메모도 써넣었다.    그러나 내가 떠나오기 전 친구가 먼저 발견하고 극구 사양했다. 우리 둘은 서로 안 받겠다고 옥신각신했으나 결국 내가 지고 말았다.
 내가 탄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친구는 손을 흔들었다. 서로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진실한 우정의 무게가 우리의 감상(感傷)을 제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친구는 16년 전 남편을 보러 밴쿠버로 오려 했으나 갑자기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 생겨 미국행을 택했다. 고통의 종류는 다르지만, 우리는 힘든 시간을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며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위로는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거나,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받을 때 깊게 다가온다.
 '우리는 대체 무슨 끈으로 묶인 인연이기에 이리도 단단하고 예쁘게 맺어졌을까?’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골똘히 한 가지 생각을 하며 친구의 건강을 기원했다.
 
 한국에서 두 달이나 있었지만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남편이 장애를 갖게 된 후 모국에 가도 4, 5박을 넘긴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오래 못 만난 70년 지기 어릴 적 친구가 또 있다. 이번에는 전화만 하고 내년에 와서 만나자고 했으나 안 된다며 첫 추위가 닥치던 날 일산에서 달려왔다. 그 친구의 남편은 <00 원양>의 대표이면서 선장으로 70년대 참치잡이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다. 그 당시 동원 참치통조림을 가공한 참치를 다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재력도 대단했으나 일본회사와 동업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20대에 벌써 사모님 칭호를 받으며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았던 그녀가 언젠가 앞니 몇 개가 빠진 채 웃을 때마다 손으로 입을 가려야 했다. 그걸 보고 온 여고 친구가 “우리가 해주자”하여 30년 전 제법 큰 치료비를 보내주었다. 아직 친구와 난 이민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때라 사실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우정이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때 일을 친구는 잊지 못하고 늘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난 미리 숙소 근방에 있는 일식집을 예약하고 식대도 선불로 지불해 놓은 상태였다. 점심 후 숙소로 장소를 옮긴 후 우린 밖이 어두워진 줄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친구는 가야겠다고 일어서더니 핸드백에서 하얀 봉투와 볼펜 몇 자루를 내게 내밀었다. 나 역시 친구를 위해 선물과 봉투를 준비해놓았다. 친구는 일산 시립도서관에서 도서 대여하는 일을 하고, 남편도 아르바이트해서 지금은 살만하다며 손사래까지 치면서 사양했다. 우린 결국 서로의 마음만 받았다. 남편을 떠나보낸 친구를 조금이라도 위로해주고 싶어 달려온 속 깊은 그녀의 방문이 내게 혼자가 아님을 마음속에 심어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났던 단발머리 아이의 모습은 70대 할머니가 되어 지하철 개찰구를 빠져나가며 가라고 몇 번이고 손을 저었다. 그녀가 고맙고 안쓰러워 눈물이 미적거렸다.
 
 ‘친구, 친구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사람이 자기 가족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보람된 인생을 살 수 있으며, 어찌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견문이 넓고 추구하는 방향이 같으며 존경할만한 인물이라면 친구로 금상첨화겠지만, 수준이나 지향하는 바가 다소 다르더라도 정직하고 신의가 있고,  그리고 불행을 함께 감내할 수 있는 겸허한 사람이라면 유익한 친구가 될 수 있다. 한마디로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라면 부부가 아니더라도 평생 희로애락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되리라. 그러나 조지 워싱턴은 우정은 성장이 느린 식물이라고 했다. '우정'이라고 이름 할 가치가 있을 때까지 인내하며 꾸준히 가꿔가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친구가 있어 천군만마를 가진 듯 멀리 있어도 든든하고 감사하며 행복하다. 내 인생에서 친구는 서로를 일으켜 세워주고 받쳐주는 받침대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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