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희 / ( 사 ) 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그의 생애의 기쁨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 가정을 이루었을 때, 첫 딸 아기를 안았을 때, 캐나다로 이민 온 후 아들이 태어났을 때... 그의 마음을 살펴본다. 낯선 남의 땅에 살면서도 소소한 기쁨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친구와의 만남의 인연을 첫 째 로
꼽아 본다
.
1979 년 이민 5 년 차 되던 그해 연말 부부 동반 동창회가 어느 동창 집에서 열렸다. 남자들이 있던 거실 쪽에서 갑자기 시끌벅적 야단이 났다.
부엌 식탁에 모여 잡담을 하던 여자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우르르 거실 쪽으로 몰려갔다. 나의 남편과 내 후배 남편 그리고 나의
동기 동창 한 사람의 남편, 세 사람이 모두 평양 제일 고등보통학교( 평고 ) 동창들이었다. '이건 기적이다.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 세 남자가 모두 같은 학교 출신이고 우리 여자들은 모두 같은 고교 동창이라니! 한국도 아니고 캐나다 퀘벡 주
몬트리올에서! 그중에서도 나의 남편과 내 후배 남편은 같은 동기 동창이었다. 후배의 남편 피터씨와 나의 남편 준호는 그 자리에서 ‘야 !
너 !' 하며 말을 놓았다 .
그들은 모두 16 세에 북한에서 부모와 생 이별을 하고 단신으로 남한으로 내려왔던 전후에 유행하던 삼팔따라지들이었다 . 지금은 사라져버린 북한의 최고 명문 학교였던 평고는 육이오 사변 전까지 북한에서 내 노라 하는 수재들이 들어간다는 이름 있는 학교였다. 그런 명문 학교 출신 세 명이 같은 이민자로서 같은 도시에 살며 부인들이 모두 같은 고교 출신인 것이다. 더욱이 나의 남편과 후배의
남편 피터 씨는 방법은 달랐지만, 모두 육이오 전쟁 중에 단신으로 남한으로
내려 온 사람들이었다
.
군인 되기를 동경했던 준호는 육이오 사변이 일어나자 학교에서 학생 전원 징집을 할 때 자의가 아닌 타의였지만, 군대에 입대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흥분하기에 족했던 사람이었다. 보통 학교 2 학년 (고교 2 학년에 해당함) 학생 중에서 강제 징집에 반기를 든 지혜로운 몇몇 학생들은 허술한 감시를 피해 화장실 창문 같은 눈에
띄지 않는 곳을 통해 도망쳐 나갔다. 그중의 한 사람이 피터 씨였다 .
외아들이었던 준호는 아직도 부모에게 어리광 부리던 철부지였다. 그는 한국전쟁을 말 타고 달리며 양키를 때려잡는 전쟁 놀이로만 여겼다. 그러나 실전에 들어가 보니 그가 상상했던 전쟁이 아니었다. 말 탄 군인도 없었고 도보로 행군 하며 강제로 남 침에 가담한 가련한 소년 군인에 불과했다. 준호는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내려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어느 날 유엔 군에 포로가 되어 수용소 생활
3 년을 한 후 이승만 대통령의 포로 석방 덕분에 대한민국의 품에 안겨 살게 되었다.
한편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포로 수용소에 있는 동안 평양 집에서 아들을 기다리다 못해 아들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사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아들을 찾지 못한 아버지는 혹여 아들이 집에 돌아왔을까 싶어 황 망 히 북으로 다시 올라갔다. 그 사이 준호는 포로 석방으로 나왔지만, 남한에서 자기를 반겨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여겼고,
또 워낙 군인의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대한민국 군인으로 입대한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후에 외할머니를 비롯하여 모든 친척을 모두 만나게 되지만 준호의 부모 만은 아들을 기다리느라
평양에 그대로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해방 전 하얼빈과 장춘에서 조선물산공사라는 큰 무역 회사를
운영했던 대 사업가였다. 준호는 그가 죽기 전까지 한 번도 부모의 소식을 모르고 눈을 감은 비운의 왕자였다. 그런 그가 한국도 아닌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자신이 다니던 학교의 동기 동창을 만났으니 이는 보통 인연이 아니었다. 우연이 아니라 하늘이 선물로 맺어주신 우정의 끈이었다.
그들은 자주 만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피터 씨는 준호를 만날 때마다 와인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늘 소비뇽
(Sauvignon) 의 일종인 무똥 까데(Moutn
Cadet) 적 포도주 한 병을 안겨 주곤 했다. 하늘로 먼저 떠난 피터씨가 하늘 나라에서도 친구에게 와인을 챙겨주고 싶었던 가! 준호는 친구가 떠난 지 만 일 년 만에 그와 똑같은 폐암으로 2008 년
2월 하늘나라로 친구를 따라 떠나갔다.
그 후 나는 아들이 첫 딸 아이를 낳아 내 품에 안겨 준 후, 아들이 사는 밴쿠버로 살림을 합쳤다. 그리고 결혼 생활로 묻어 두었던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 낯설고 힘든 수필 창작 생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
나는 하루라도 빨리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애써 떨구며 살았다. 그러나 나의 후배는 그들이 평생 함께 살았던 집을 그대로 간직하며, 마치 남편이 살아 있는 듯, 피터씨가 가꾸던 텃밭도 가꾸며 그의 초상화를 거실에 모셔 놓고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남편의 추억으로 방안을 가득 채우며 그에 대한 그리움 안에서 살았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그녀의 몸 속에 자라고 있던 암과도 공존 하고 살았다.
이 원고 마지막 부분을 정리 하던 어느 날 후배가 하늘 나라로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다음 날 그의 딸은 페이스북에 자기 어머니의 사진을 올렸다. 끝도 없이 펼쳐진 해바라기 밭 가운데서 야윌 대로 야윈 바짝 마른 팔을 하늘로 처 들고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마치 천사가 해바라기 밭에서 하늘로 오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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