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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심현숙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7-06-10 11:31

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기고/수필
 Cathy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은 그녀의 뼛가루가 찰리 레이크에 뿌려진 3주 후쯤이었을까. 수년 전부터 투병 생활을 해온 노녀(老女)이기에 아주 장수하리라고는 생각 못하였지만 그녀의 사망 소식은 내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슬픔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6년 전 이곳 Wonowon에서 사업을 하면서부터였다. 우리 레스토랑에서 처음 Cathy를 보았을 때 이 시골에 저런 인텔리 여자가 살다니 싶어 좀 놀랐다. 아주 곱고 조용하며 동양 여자 마냥 아담했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루는 그녀가 ‘Grace’하며 내 이름을 부르더니 자신이 부산에서 살았다며 말을 붙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미국 간호사로서 병원선을 타고 한국에 갔다고 한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은 한국과 유대가 있었음을 증명한 셈이다. 그녀는 병원선에서 근무 중 그곳을 드나들던 한국 청년 김씨(엔지니어)와 사랑에 빠진 모양이다. 두 사람은 곧 결혼을 하여 연년생의 두 딸을 낳았다. 그러나 3년 후의 종전은 그들을 영원히 생이별시켰다. 한국인 남편에게 아이들과 함께 도미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극구 반대하였다고 한다.

  1950년대의 우리나라, 전란이 몰고 온 폐허와 가난 속에서 미제라면 무엇이나 좋아하던 그 시절, 그는 미국으로 갈 만도 했는데 못 살아도 내 나라에서 살아야겠다는 심지가 굳은 남자였는지 아니면 태평양 건너 미지 세계에 부딪칠 용기가 부족했는지 알 수 없다.

  Cathy는 울먹이며 자기 딸들을 찾고 싶다고 하였다. 2-3살짜리 아이들이 기억도 안날 텐데 이토록 모성이란 50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불변하는 건지. 그래서 부모와 자식 관계를 천륜이라 하는 건가.

다음날 그녀는 흰 종이에 싼 조그마한 것을 내 앞에 내밀었다. 그 속에는 빛바랜 항공 봉투와 크리스마스 카드 겸 연하장 하나가 들어있었다. 그 당시 타이프 용지로 보이는 얇은 종이 위에 연필로 쓴 영문 편지 두 장과 발바닥을 흰 종이에 대고 그린 본 그리고 카메라로 찍은 흑백 사진 두 장이 전부였다. 흙더미 위에서 찍은 마르고 키 큰 남자는 김씨이고 하복을 입은 여학생의 모습은 큰딸이었다.

  결국 두 딸은 고아원에 맡겨졌고 그 곳에서 누군가가 편지를 대필하였다고 추측된다. 굶주리고 헐벗었던 조국의 흔적이 역력한 편지.

  <보내주신 돈으로 등록금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교복은 사지 못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신발을 보내주신다니 제 발바닥을 본 떠서 보냅니다. 미국인 어머니를 둔 저를 친구들이 참 부러워합니다.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등등의 내용이었다. 어찌하여 그들 사이에 소식이 끊겼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그녀에게 그들을 찾는데 노력해 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말을 듣자 얼굴이 환해지며 파란 눈이 빛났다.

항상 생기가 없어 보이던 그녀가 하루는 반소매의 원피스 차림으로 화사하게 나타났다. 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팔에는 퍼런 멍이 군데군데 보였다. 왜 이러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모른다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몸에 멍이 잘 생기면 혈액암 발생 우려가 있다는 신문 기사를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이 나서 항암효과가 있다는 인삼차를 선물했다. Cathy는 너무 좋아하며 고려 인삼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하였다.

  두 달 간 휴가를 다녀오니 그녀는 보이지 않고 낯선 액자 하나가 식당 벽에 나지막이 걸려있었다. 하얀 천에 가지각색의 고운 실로 수를 놓은 수예품이었다.

A cup of tea
A memory on two,
Precious moments
Shared with you.

  이 글귀를 가운데 놓고 주위를 빙 돌아가며 여러 종류의 예쁜 차 주전자와 찻잔들을 아주 아름답고 섬세하게 수놓았다. 콧등이 찡했다. 성치도 않은 몸으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으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것을 전해 준 후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한 듯하다. 몇 달 뒤 퇴원을 하였기에 문병을 가보니 휠체어 신세가 되었고 딸들과의 상봉을 더 간절히 원했다. 망설이다가 지체 할 수 없다 싶어 서울 지방 경찰청에 근무하는 지인(知人)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타까운 사연을 이야기하며 두 여자를 찾아달라고 간곡한 부탁을 했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1997년 3월 1일에 있었던 이한용 (김정일 처조카) 살인 사건 이후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경찰관은 개인 신상을 노출 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얼마 후 다시 사정해 보았으나 대답은 똑같았다.

  화가 났다.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어린 처녀의 몸으로 남의 나라를 돕겠다고 왔다가 피해를 본 사람인데 이 여인의 소원 하나 들어 줄 수 없다니 기가 막혔다. 우리가 투병중인 이 할머니에게 이렇게 뻔뻔해도 되는 건가.

나는 결국 희망 없는 기대만 주었을 뿐 아무런 도움이 못 되었다. 다만 나를 통하여 뼈에 사무치도록 보고픈 딸들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게 준 그녀의 온 정성이 담긴 선물(액자)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자기 분신인 두 딸에게 남긴 유물이 아닌지……. 그녀는 오래 전부터 자기의 죽음을 예견했던 모양이다.

  6.25 전쟁이 끝난 지 근 50년이 되었다. 세월은 흘렀고 남북의 길도 트였다고 하지만 한 사람 한사람의 가슴속의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았다. 이국 땅 캐나다에서 평생 한을 품고 살던 Cathy는 마지막까지 친딸을 만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아니, 끝가지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 Cathy뿐이겠는가. 조국 땅에는 남에도 북에도 무수한 원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 죽은 자뿐이 아니라 산 자도 무슨 방법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상흔을 껴안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세계 역사에 유래가 없다는 6.25의 비극은 진정 끝났는가.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 그리고 또 내일도 민족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2002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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