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행복노트] 냉장고·책장·서랍 탈탈 털었다… 행복이 쏟아지더라

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3-01-09 10:27

[5] 철학교사 안광복 - '나만의 빈티지' 만들기

손때 묻은 책상·필통·샤프… 세월을 함께한 나만의 동지 묵힐수록 내 삶은 풍족해져
새것, 비싼 것 집착 버리니 나는 이미 엄청난 부자였다


한참 등산에 빠져 지내던 시절, 나는 산에서 종종 길을 잃었다. 어둑해진 데다가 힘까지 빠질 때면, 나는 배낭부터 뒤엎었다. 배낭 밑바닥까지 탈탈 털어내다 보면 뭔가 요긴한 것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찌그러진 초콜릿 바, 처박아 둔 겨울용 양말, 녹슨 손전등 등등.

'탈탈 터는 습관'은 내 일상이기도 하다. 예컨대, 입고 나갈 옷이 마땅치 않을 때, 나는 옷장을 샅샅이 뒤진다. 원고 마감이 코앞인데도 쓸 거리가 마뜩지 않을 때는? 옛 노트와 메모들을 꼼꼼히 훑어본다. 자꾸 들쑤시다 보면 쓸 만한 것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런 습관이 몸에 밴 것은 IMF 사태 무렵부터였다. 소득이 반 토막 난 상황, 진열된 상품들은 '더 이상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이 됐다. 경제의 겨울을 버텨내려면 이미 가진 것들을 뒤져서 쓸 만한 물건들을 추려내야 했다.

역 설적으로, 내가 부자(?)로 거듭난 것은 이 무렵부터다. 나는 내가 그토록 많은 부(富)를 움켜쥐고 있는지 몰랐다. 집에 있는 냉장고를 '털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냉장고 냉동 칸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먹거리들로 가득하다. 입을 것이 마땅치 않다고 툴툴대지만, 정작 옷장에는 옷이 한가득이다. 볼 만한 책이 없다고 한숨 쉬지만, 정작 책장에는 한 장도 넘겨보지 않은 읽을거리가 적지 않다. 이렇게 반쯤 잊어버린 채 재워놓은 물건들이 집안에 한둘이던가. 가진 것들을 오롯하게 쓰는 데만도 몇 년은 훌쩍 지나갈 정도다.

처음에 나는 묵은 물건 쓰는 것이 창피하고 서글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래된 물건을 찾아 쓰는 일은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빈티지(vintage)'가 별거던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 필기구와 10년 가까이 손때 묻은 볼펜을 견주어 보라. 심을 여러 번 갈아가며 쓴 낡고 빛바랜 볼펜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레어 아이템(rare item)'이다.

20년 된 의자와 10여년씩 묵은 필기구 등이 가득한 안광복씨의 방. 안씨는 오늘도 집안 곳곳을 탈탈 턴다. 자신만의 빈티지, 행복을 찾기 위해. /채승우 기자
비싸고 새로운 상품은 기쁨을 안긴다. 그러나 헛헛함도 따라붙는다. 이것들을 손에 넣으려면 적잖은 돈이 든다. 가벼워진 지갑을 보며 행복할 사람은 없다. 반면, 손때 묻은 나만의 물건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든다. 하나하나의 물건들에는 숱한 사연이 스며있다. 장인(匠人)들은 오래된 자신의 도구를 가족처럼 아낀다. 나 역시 그렇다.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오랜 친구들을 만날 때와 같은 즐거움에 젖는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의자는 이십 년도 더 된 것이다. 십 년 가까이 된 필통, 그만큼의 세월을 같이한 샤프와 펜들이 책상을 지키고 있다. 나는 이것들과 함께 십여 권의 책과 수많은 글을 써냈다. 여기에는 새 물건이 끼어들 틈이 별로 없다. 내 묵은 물건들은 이미 나의 일부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쓰던 물건이 수명을 다하면, 나는 마땅한 장례의식(?)을 치른다. 나와 함께한 세월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다. 그리고 또다시 집 안 곳곳을 '샅샅이 턴다.' 이럴 때 내가 실패한 적은 거의 없다.

새 것, 비싼 것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은 순간부터 나는 언제나 풍요로웠다. 나라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나의 구닥다리 물건들의 가치는 경제 형편에 휘둘리지 않는다. 내가 이것들을 소중히 보듬고 사는 한, 내 삶에도 별 동요는 없을 것이다. 나의 행복이 튼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이유다.


☞안광복(43)

소크라테스처럼 일상에서 철학 하기를 실천하고자 하는 철학 교사. ‘소크라테스 대화법’ 연구로 서강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와 강연을 통해 철학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철학 역사를 만나다’ ‘열일곱 살의 인생론’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등 철학책들로만 20만부 판매 기록을 갖고 있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첨단 설비 세간살이       구색 맞춰 쓸모있고       수학책 속 공식처럼       차곡차곡 채운 공간       날렵한       맵씨에 군침도는        그림 속의 집이란다       침대 놓고 살림 놔도       마음 놓을 곳도 없는        미적분 풀어 지은       연애보다 비싼 집값     ...
문현주
화음(和音) 2023.04.03 (월)
   텃밭에 봄 채소 씨앗을 다독 다독 뿌려 놓고 밭 둑에 앉으니 햇살이 눈부시다. 여기저기 검 불 속에서 지난 겨울을 이겨낸 잡초들이 다투어 돋아 난다.봄은 그래서 자애로운 어머니. 꽁꽁 얼어붙은 대지를 따뜻이 녹여 서로 화해의 손을 잡게 한다.자연의 섭리란 참으로 신비하고 위대하다. 꽃 다지는 작은 키를 돋보이려 애쓰지 않는다. 양지 쪽 어느 곳이든 조촘 조촘 돋아나서 제 나름의 작고 노란 꽃을 피우기에 여념이 없다. 아무도 보아...
반숙자
춘곤 2023.04.03 (월)
4월 한낮은몽롱하다여기 저기 쏟아진 봄 볕이와글거리는 거리를 향해열리는 창들엄청났던 추위 속에서도봄은 창에 손을 얹고 있었던 가 보다연 녹색 담쟁이 이파리들고물 고물찬바람에 긁혔던 벽을 덮어가는데기침 소리 새어 나갈라벽은알약 하나 집어먹는다밤새운 통증으로부은 눈은너무 눈 부시다
김귀희
마지막 파티 2023.03.28 (화)
     죽기 위해 병원에 들어온 환자. 그 환자에 대해 보고받은 순간, 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물론 병원에 들어온다고 모든 환자가 살아 나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살기 위해 입원했고, 우리는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그런데 이 환자는 죽기 위해 들어왔다. 그것도 내일. 죽는 시간까지 정해져 있었다.2016년 캐나다에도 MAID(Medical Assistance in Dying, 조력사)가 합법화되었다. 웰다잉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의학적으로...
박정은
거울 앞에서 2023.03.28 (화)
나의 사십 대는 갔다생존 앞에 서면 늘 끼니를 대신한 얼굴로사통팔달의 물꼬로 한 획을 그었던 고온 다습했던 내 사정은 피라미처럼 훌쩍 빠져나갔다 각질층이 몇 가닥의 주름 사이로나이테를 긋고 있다토막 난 사연들이 짐을 챙겨기억 저장고로 자리를 옮기고목살 두께로 칸막이를 친다대기압에 눌린 수증기처럼살아 남은 속살은 얼굴 옆선으로만 모인다 꽃보다 아름다운 나의 시간은가을이 되기 전 길을 채비했다떨어지는 꽃을...
김경래
  우리 아이들이 결혼할 나이가 되다 보니 청년들의 결혼과 출산이 나의 큰 관심사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합계 출산율이 역대 최저인 0.78을 기록했다고 발표되면서 국가적으로도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 결혼과 출산 문제이다. 합계 출산율은 가임기 여성이 출산할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의 수로 OECD 국가 중 합계 출산율이 1명 밑으로 떨어진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결혼율 하락과 저출산에 대한 원인과 대책들이 국가 중심...
김선희
신호등도 없는 건널목에서힘겹게 끌고 가는할머니의 짐 수레를 보고승용차 하나 서서히 멈추더니말없이 도와주고아무일 없다는 듯이유유히 사라져 가니언젠가 보았던들꽃 한 송이 생각난다바람에 쓰러진 들 풀에잠시 어깨 내주고 함께 일어나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세상 한구석을환하게 비추던 작은 꽃 한 송이이름은 몰라도 좋을한줄기 빛
김희숙
봄이 묻더이다 2023.03.20 (월)
봄이 묻더이다꽃들이 왜 피는지 꽃들은 알까 하고 물었더니꽃들도 왜 피는지      모른다 하더이다       봄이 묻더이다하늘은 왜 또 파란지하늘은 알까 싶어 물었더니하늘도 왜 푸른지         모른다 하더이다       봄볕이 좋아풀 향기가 좋아푸른 들 꽃동산을 뛰며 구르니꽃들이 왜 피는지   하늘은 왜 또  파란지그냥그냥알겠더이다
늘샘 임윤빈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