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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여섯 번째 이야기 – 몽유병 살인사건

이정운 변호사 piercejlee@hotmail.com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최종수정 : 2012-02-26 14:46

영미법에서 범죄가 성립되려면 몇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 중 하나가 액터스 레우스(actus reus)인데요. Guilty act 즉 “잘못된 행위”를 뜻하는 라틴어 단어입니다. 남을 때린다든지 도둑질을 한다든지 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모두 액터스 레우스가 성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액터스 레우스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자의(voluntariness)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따라서 의식이 없는 상태에 저지른 행위는 범죄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예로 1987년 5월 23일 새벽, 토론토 인근의 피커링(Pickering) 시에서 일어난 한 충격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당시 23살의 케네스 파크스(Kenneth Parks)에게는 부인과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신혼의 단꿈에 빠져있어야 했을 그였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도박중독이었습니다. 문제는 꽤 심각해서 그는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횡령혐의로 직장에서도 해고되고 재판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파크스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요? 이날 새벽 파크스는 어이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자다가 일어난 그는 차를 운전해 23km나 떨어진 스카보로(Scarborough) 시로 향했는데요. 그곳에는 처부모가 살고 있었습니다. 타이어를 교체하는 데 쓰는 쇠막대기를 들고 처가에 들어간 파크스는 처부모를 무참히 폭행했고 결국 장모를 사망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피범벅이 된 파크스는 곧장 인근의 경찰서로 향했고 이곳에서 그는 자신이 사람을 죽인 것 같다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경찰은 곧 그의 말대로 파크스의 처가를 조사했고 그곳에서 의식을 잃은 장인과 사망한 그의 장모를 발견했습니다. 


살인혐의로 구속된 파크스는 이 사건에 대해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고 증언을 했고 그의 변호인은 이 사건이 파크스의 몽유병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너무나 기이한 주장에 사람들의 관심은 집중됐고 과연 몽유병에 의한 살인이 가능한지 열띤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파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심각한 수면장애와 불면증을 앓고 있었고 이러한 증세는 그의 가족력이기도 했습니다. 파크스의 부인을 비롯한 증인들은 파크스가 평소에 처부모와 아주 사이가 좋았으며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처가의 보일러를 고쳐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파크스는 꿈에서 처가의 보일러를 고쳐주기 위해 스카보로 시로 향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심리학자와 정신과, 신경과 전문의가 총동원된 변호인의 전문가 증언인단은 몽유병을 앓는 사람이 잠결에 운전하고 누군가를 폭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증언을 했고 또한 파크스가 이 사건을 저질렀을 때 수면 중이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법원을 이러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파크스의 행동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액터스 레우스라는 범죄의 요소가 성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파크스는 무죄라고 밝혔습니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캐나다에서 발생한 가장 기묘한 형사 사건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법적 책임면제고지: 이 글은 법률 조언이 아니며 저자는 이 글에 대한 일체의 법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법률 조언이 필요하신 분은 변호사를 찾으십시오. 



이정운 변호사의 풀어쓴 캐나다법 이야기
칼럼니스트: 이정운 변호사
  • UBC 로스쿨 졸업
  • UBC 경제학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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