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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두 번째 이야기 –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이정운 변호사 piercejlee@hotmail.com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최종수정 : 2012-01-29 20:16

계약은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래서 못 지켜질 때도 있지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계약이 파기되진 않습니다. 대부분 상대방의 처지를 고려해서 어느 정도 양보를 하지요.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계약서를 새로 작성하는 것이겠지만, 비용문제도 있고 번거로워서 그렇게 안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냥 구두로 합의하거나 간단하게 약식 서약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애매한 것들은 주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기억하기 때문이지요. 문제가 생기면 하는 말은 늘 똑같습니다. “어?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입니다. 그럼 이럴 때는 어떤 법이 적용될까요? 오래된 고전 판례를 한번 살펴보지요.

 

1937년 영국의 High Trees House Ltd. (“HTH”)라는 회사가 런던에 있는 아파트 한 채를 Central London Property Trust Ltd. (“CLPT”)라는 회사에 임대를 주었습니다. 임대료는 1년에 2,500파운드였습니다. CLPT는 이 건물의 아파트들을 세를 놓아서 임대료를 내려고 했지요.

 

그런데 1939년 제2차대전이 발발합니다. 사람들은 공습의 위험을 피해 보다 안전한 교외로 피신하지요. 그래서 아파트 건물이 텅텅 비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세를 제대로 놓지 못하게 된 CLPT는 HTH에게 임대료를 깎아 달라고 요구하지요. 사정이 사정인지라 HTH도 이해하고 당분간 임대료를 원래의 반값인 1,250파운드로 내려주기로 합니다. 그리고 간단한 약식 서약을 작성했습니다.

 

문제는 1945년 제2차대전이 끝나면서 발생합니다. 사람들이 런던으로 돌아오자 아파트는 다시 꽉 찼지만, CLPT가 원래 계약한 금액인 2,500파운드를 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유야 당연히 “1,250파운드만 내기로 했다.”라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HTH는 CLPT를 고소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깎아준 임대료까지 모두 내라고 합니다. 일종의 괘씸죄를 추가한 것이지요.

 

HTH의 요구는 상당한 법적 근거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코먼로 (common law, 칼럼 3회, 37회 참고)에 따르면 계약은 “대가” 즉 약인 (consideration, 칼럼 2회, 29회 참고)이 없으면 무효입니다. 따라서 HTH가 아무 대가 없이 1939년부터 임대료를 낮춰주기로 한 것은 계약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CLPT는 HTH가 임대료를 깎아주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덜 낸 임대료를 모두 지불해야 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매우 억울했겠지요? 다행히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판결을 맡은 데닝 (Denning) 판사가 promissory estoppel, 한국어로는 금반언원칙(禁反言原則)이라는 것을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형평법 (equity, 칼럼 37회 참고)에 근거한 금반언원칙은 말 그대로 한번 뱉은 말은 다시 거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데닝판사는 이 원칙을 적용해서 HTH에게 그동안 덜 낸 임대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했습니다. 하지만 양측의 합의가 전쟁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만큼 전쟁이 끝나고 입주율이 원래대로 돌아온 이후부터는 연 2500파운드를 임대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하였습니다.

 

금반언원칙을 적용할 때는 제약이 많습니다. 증거가 충분해야 하고, 정황상 이유가 분명해야 하고, 양측이 당사자들의 합의가 법적 구속력을 갖기를 원했다는 것이 확실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원칙에 의존해 계약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 때문에 계약이 성립되지 못했다면 이 원칙은 최고의 차선책이 될 수 있습니다.


 

 

*법적 책임면제고지: 이 글은 법률 조언이 아니며 저자는 이 글에 대한 일체의 법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법률 조언이 필요하신 분은 변호사를 찾으십시오.



이정운 변호사의 풀어쓴 캐나다법 이야기
칼럼니스트: 이정운 변호사
  • UBC 로스쿨 졸업
  • UBC 경제학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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