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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無我) (2)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최종수정 : 2005-12-05 00:00

아무튼 우리의 자아(自我)란 이처럼 실체가 없기에 우리가 거기에 집착할 가치가 없는 것, 거기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에 대한 집착과 자아중심주의가 모든 말썽과 사고의 근원임을 자각한 윤리적 판단을 형이상학적 이론으로 뒷받침해 준 셈이다. 우리의 자아가 이처럼 허구라는 것을 통찰하게 되면 우리는 그만큼 자유스러워지는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사실 이 무아의 가르침이 '논리적 귀결'이라 했지만 그것은 불교 논리로 보았을 때 하는 이야기이고, 불교인이 아닌 사람이 더 큰 틀에서 볼 때에는 철학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내포되어 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카르마(業)의 원리에 의하면 지금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나중 내가 그 책임을 진다는 이야기인데 무아의 가르침처럼, '나'라는 것이 없다면 도대체 나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은 누구인가? ‘나’라는 것이 없다면 내가 행동한 과거를 기억하는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등등이다. 

사실 '무아'와 같은 가르침이 이론적으로 일관성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은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화급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했다는 비유에 그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독화살에 맞았다. 친척과 친구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곧 의사를 불러 그 독화살을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를 거절하고, 이들이 이 독화살을 자기 몸에서 뽑아내기 전에 이 독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활이나 화살이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등등을 미리 알아야겠다고 했다. 이 젊은이의 태도가 올바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이론이나 논리적 적합성을 따지기 전에 우선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이 급선무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겪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우선으로 다루는 실용적 태도와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다. 

부처님이 형이상학적 사변이나 이론을 위한 이론을 기피한 사실은 이른바 '부처님의 침묵'(the Silence of the Buddha)이라는 것에서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부처님은 1) 세상은 영원한 것인가, 영원하지 않은 것인가, 영원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영원하지 않은 것이기도 한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아니한 것도 아닌가 하는 등의 14가지 질문을 '대답할 수 없는 질문'(avy?k?ta)이라 여기고 외면했다. ‘부처가 외면한 그 열 네 가지 질문'인 셈이다. 왜 이런 질문을 외면했을까? 부처님이 무지했기 때문일까? 회의론자나 불가지론자였기 때문일까? 학자들 중에는 부처님이 궁극 실재에 대한 이론적이나 사변적인 명제 속에는 어쩔 수 없이 내재할 수밖에 없는 모순율을 간파하고 대답을 기피한 것이라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궁극적인 것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하면 벌써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제한성 때문에 그 말은 이미 그 궁극적인 것에 대한 올바른 표현일 수가 없다는 주장이다.

예수님도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했을 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자님도 제자들이 죽음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 그는 "삶에 대해서도 아직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 수 있겠는가" 했다. (『논어)11:11)  결국 실재에 대한 이론 자체는 영원한 진리 자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필자가 지은 책 중 하나의 책명이 ‘예수가 외면한 그 한 가지 질문’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제목도 세계 종교사의 이런 보편적 사실에서 힌트를 얻어 붙인 것이다. 

물론 우리가 자유를 얻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이론이나 가르침이 있다. 이런 것들이라 하드라도 불교에서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자유를 얻는데 도움을 주는 '수단' 혹은 불교 용어로 '방편'(方便)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가르친다. 말하자면 이런 가르침도 결국 강을 건너기 위한 하나의 '뗏목'이라는 것이다. 일단 강을 건넜으면 그 뗏목은 거기다 두고 우리의 갈 길을 계속해야 된다. 강을 건너게 해준 그 뗏목이 고마워 그것을 계속 지고 다니겠다고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했다. “너희들은 이 뗏목처럼 내가 말한 교법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 도가 사상에서 장자(莊子)도 이런 경우를 두고 "물고기를 잡는 틀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 물고기를 잡았으면 그것은 잊어야 합니다."고 했다. 이른바 '득어망전'(得魚忘筌)이라는 것이다.



오교수의 속담풀이
오교수의 속담풀이.
  칼럼니스트:오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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