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클래식을 시작하려는 후배들에게”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6-02-05 13:37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38-음악가 우수현
행복한 사람을 만났다. 타인의 평가 혹은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대상에 만족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자기 이름 뒤에 따라붙는 직합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며 또 좋아하는 일을 계속해서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큰 의미를 둔다. 클래식 음악가이지만 자신을 속칭 “딴따라”로 묘사하고, 또 그렇게 불리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행복한 바이올린 연주자, 우수현씨(사진)를 만났다.



“평생을 즐길 수 있는 일, 그게 음악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이른바 그의 “스펙”은 세속적인 자랑거리로 충분히 활용될 만하다. 독일 라이프찌히 국립음대에서 연주 및 교육학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이후 드레스덴 최고 연주자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 시절 각종 국제 콩쿠르에 참가해 입상했으며, 세계적으로 알려진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독일 생활을 정리하고 밴쿠버로 돌아오고나서도 “밴쿠버메트로폴리탄오케스트라 악장”이라는 꽤 그럴싸한 명함을 여전히 보유 중이다.

그런데 이 남자의 행적 중 일부는 세상의 통념과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 정기 독주 연주회를 통해 관객과 소통하면서도, “아마추어 세계”에 발을 담그고 함께 연주하는 것을 즐긴다. 성당의 소박한 오케스트라에서도 앳된 단원들과 어울리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클래식이라고 명명된성(城)에, 스스로만 고상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과 끼리끼리 감금되고 싶지 않아서다. 




사진 제공=우수현


언제였어요?, 바이올린을 처음 접한 게.
시작은 유치원 때였어요. 아버지의 영향이 컸지요.

음악가 집안이었나요?
그건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음악을 워낙 좋아하셨어요. 객석이라는 음악 잡지도 탐독하셨고, 테이프 하나가 늘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음악을 듣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게 바이올린을 한번 배워보라고 권하신 것 같아요.

출발점은 아버지였겠지만, 그래도 음악가의 길을 계속해서 걷겠다는 건 본인 선택이었겠지요?
어렸을 때의 꿈은 계속해서 바뀌잖아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한국에서 초등학교 마치자마자 밴쿠버로 이민 왔는데, 바이올린만큼은 줄곧 놓지 않았어요. 연주하는 게 좋았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사이의 갈등 같은 건 늘 있었지요. 저는 건축 쪽에 소질이 많았습니다. 세컨더리 시절에는 BCIT에서 관련 코스를 접해봤을 정도로 관심도 꽤 있었구요.  

그런데 건축이 아닌 왜 음악이었어요?
10대 시절의 은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노년의 선생님이셨는데 밴쿠버유스심포니에서 지휘를 맡으셨던 분이었어요.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함께 연주하는 걸 무척이나 즐기셨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내가 선생님 나이가 됐을 때도 지금 선생님처럼 뭔가를 온전히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 뭔가가 결국 음악이었군요.
평생 즐길 수 있는 일을 하자, 이것이 제가 내린 결론이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의 조언은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클래식 음악만 전공해서는 먹고 살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선생님의 의견이었어요. 제자의 앞날을 걱정하셨던 거죠. 하긴 작년인가 줄리어드 학장도 자기 학생들한테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클래식 음악 전공자에겐 보장된 미래 같은 것 없다는, 그러니 틈 날 때마다 배관이나 전기 기술 같은 걸 배워두라는 그런 얘기였죠. 

은사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삶의 방향이 달라지진 않았군요.
당시에는 클래식을 공부할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어요. 물론 저에 대한 선생님의 근심은 잊지 않았어요. 그래서 음대 졸업한 선배들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또 무슨 일을 하게 되는지 늘 궁금해 했던 것 같아요. 재학 시절 오케스트라에 입단한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오케스트라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종의 직장인 셈이었으니까.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어느 학교로 진학할 것인지 고민하던 차에 제 선생님 소개로 미국 커티스 음대를 졸업한 선배를 만나게 됐어요. 그 선배가 묻더군요. “나 독일로 유학 갈건데, 너도 관심 있니?” 그 질문 자체가 제겐 하나의 충격이었어요. 커티스를 졸업한 사람이 또 뭘 배울 게 있나, 독일이 음악 쪽으로 그렇게 대단한 나라인가, 이런 의구심이 들었지요. 그래서 독일을 선택하게 된 거에요. 독일 대학은 학비를 받지 않는다는 얘기에 마음이 흔들린 것도 있지만.



“듣고 듣다 보면, 또 하나의 세계가 보일 것”


유학 생활을 어땠습니까?
라이프찌히가 독일에서의 첫 대학은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다른 대학에 갔는데, 상상과는 달리 수준이 높지 않았어요. 이건 아니다 싶었지요. 그러다 1년 후 라이프찌히로 옮기게 됐고, 그곳에서 참 많은 걸 배우고 느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줄 수 있나요?
일단 음악가에겐 주변의 자극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라이프찌히에서는 학생들 대부분이 국제 콩쿠르에 준비합니다. 매일 같이 연습에 매달리지요. 저와 함께 밤새 보드카를 마신 헝가리 친구가 다음날이면 숙취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연주에 몰두해요. 두세 시간만 자고 말이죠. 그 모습을 보면 저도 분발할 수밖에 없지요.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기억은 오케스트라 게반트하우스에 입단해 일할 수 있게 된 점이에요. 그때 지휘법 등도 접할 수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제겐 너무 소중한 자산이 됐습니다.

우수현이 밴쿠버로 왜 돌아왔을까, 그게 솔직히 좀 궁금해요. 밴쿠버의 클래식 시장, 즉 일할 기회가 독일에 비해 훨씬 없었을텐데….
일단 제 아이들을 밴쿠버에서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여기에 독일로 떠났을 당시의 제 다짐도 돌아온 이유가 됐지요. 기가 막힌 선생님이 되어 돌아오겠다는, 그런 다짐이었지요.

바이올린 지도자로서 상당히 바쁘지요?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스튜디오를 지키고 있어요. 연습과 레슨, 이 둘을 번갈아 가면서 하고 있지요.

아직도 그렇게 연습을 많이 합니까?
바이올린 연주자의 전성기는 10대 후반에 시작해서 20대 중반이면 끝나요. 그 후부터는 자신과의 싸움이죠. 처절히 연습해야 기량 주는 속도를 늦출 수 있어요. 

레슨을 하다보면 음대에 진학하려는 학생들, 혹은 그 부모로부터 진로와 관련된 질문을 자주 받게 될 것 같습니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제가 오히려 반문해요. 대학 졸업 이후는 생각해 봤냐고. 이 질문에 대부분 답을 못하지요. 당장 눈앞의 결실, 그러니까 학교의 간판만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럼 음대 진학시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요?
진학하려는 학교의 졸업생들이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게 일단 중요합니다. 그래야 자기의 방향이 보이니까요. 들어가려는 학교와 관련된 오케스트라는 어떤 곳들이 있는지, 그 오케스트라가 주립인지 시립인지 그런 것도 다 조사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기 한 가지 덧붙이자면, 희망 대학 교수와의 레슨 궁합도 한번 봐야 합니다. 교수의 지도 스타일이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학교 생활이 무척 힘들어지니까요. 학생들 대부분은 오디션 때 교수들 마음에 들려고만 애쓰는데, 이건 올바른 태도가 아니에요. 교수의 레슨 방식이 자신한테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중요한 문제니까요. 그리고 음악하는 친구들이 재즈, 팝, 가요 할 것 없이 많이 들었으면 해요. 자꾸 듣다 보면 내 안에서 일종의 양념장 같은 게 생겨요. 머릿속에서 만들어내고 싶은 맛이 생긴다는 거죠.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음악은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프로 음악가의 세계는 조금 빡빡해 보입니다. 사람들은 거의 다 1등만 기억하니까요. 
음악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는 사람들에겐 뭔가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추어로 음악을 하든, 프로 연주자로 활동을 하든 말이죠. 

어떤 선물을 얘기하는 건가요?
음악의 힘은 대단해요. 제 경험인데, 초등학교 졸업하고 밴쿠버에 정착했을 때 저는 갑자기 말 없고 소심한 아이가 돼 버렸어요. 당연하지요. 영어를 잘 못했으니까. 그러다 선생님 소개로 밴쿠버유스심포니에 가입하게 됐고, 들어간 첫 날 맨 앞줄에 앉혀지게 됐어요. 그런데 다음 날부터 저를 얌전한 동양 아이쯤으로 보던 녀석들이 제게 말을 걸기 시작하더군요. 친구가 생긴 거였어요. 이게 다 음악 덕분이었다고 생각해요. 

인맥을 쌓을 수 있었다, 이 얘기지요?
아마추어와 프로가 함께 어울리는 오케스트라가 있어요. 수준이 매우 높지요. 이곳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중엔 판사도 있고, 의사도 있고, 은퇴한 조종사도 있어요. 이들이 음악, 그러니까 오케스트라를 통해 하나가 됩니다. 그 친분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일 거에요.

음악가로서 우수현씨의 꿈은 무엇입니까?
클래식에 대한 편견을 허무는 것, 나의 음악을 통해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변화시키는 것, 이게 오랜 바람입니다. 클래식에 대한 편견은 세상이 만든 게 아니에요. 클래식하는 사람들의 잘못이 크죠. 저는 클래식 음악을 잘 포장해서 그걸 파는 사람으로 불려도 상관없어요. 사람들이 재밌게 음악에 접근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즐겁게 음악 듣기, 구체적으로 말해 클래식 공연이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는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요?
팝 가수들이 신기한 음악을 선보일 때, 사람들은 어색하면서도 계속 듣습니다. 그렇게 계속 듣고, 듣고, 또 듣다 보면 음악이 저절로 소화가 됩니다. 클래식 음악도 마찬가지에요. 들어서 자신이 아는 노래가 되면, 연주회에서의 감상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겁니다.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사진 제공=우수현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46_ 건축사 박경래
한인사회에서는 “1.5세”라는 용어가 있다. 태어난 곳은 한국이지만 캐나다에서 학창 생활의 전부 혹은 일부를 보낸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에겐 공통의 기억이 있다. 자신의...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45_시인 오석중
시(詩)에 연애를 걸기 시작한 건 열여섯살 때였다. 쓰고 싶은 것이 있었고 그래서 썼다. “시 한번 참 잘 쓰네”라는 얘길 듣게 되면 기분이 좋아져서 또 쓰게 됐다. 일상의 깨달음이 시어로...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44 _ 이우석 6·25참전유공자회 회장
“토피노, 한국과 캐나다의 연결고리”밴쿠버아일랜드가 품은 여러 보석 중에서도 “토피노”는 자연색에 가장 가깝다. 밴쿠버에서는 좀처럼 접할 수 없는 파도의 높이와 소리를 보고...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43- 고(故)최귀암 장학금 최은선씨
비교를 통해 느껴지는 상대적 우월감 혹은 박탈감은 내겐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오직 나만을 들여다보니 내가 가진 수많은 것들이 축복처럼 다가왔고, 그것을 남과 나누는 기쁨을 알게...
“내 성공의 기쁨은 언제나 잠시 뿐이었다”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42
낯선 달리기 대회가 열린다. 주최 측의 설명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 땅의 소수자, 그 중에서도 장애인이 중심이 되는 대회”다.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 이른바 주류가 아닌 비주류에게...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41-유캔스케이트 유현아
미리 정해버린 마음속 한계선은 세월과 함께 더욱 선명한 색을 띤다. 확실히 이 선(線) 밖으로의 이탈은 가능성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단 그저 무모한 도전 쯤으로 폄하되곤 한다. 나이가...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40-세번째 영한 시집 <프레이저 강가에서> 출판한 시인 안봉자
옛날엔 그랬다. 좋은 것을 독점하면 뭔가 허전하고 이웃에게 저절로 미안해지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주머니는 늘 비워져 있기 일쑤였지만, 양배추로 만든 김치라도 낯선 땅 밴쿠버에 함께...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39
캐나다에 학문적 기반을 두지 않은 사람을 이곳의 교수 사회는 그닥 반기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낯설 새 이민자에게 좀처럼 취업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과 거의 같은 맥락이다. 어찌 보면...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38-음악가 우수현
행복한 사람을 만났다. 타인의 평가 혹은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대상에 만족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자기 이름 뒤에 따라붙는 직합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37-스티브 한씨
쉽게 달궈지고 또 그만큼 빨리 식어 버리는 양은냄비는 적어도 아닌 듯 보인다. 밴쿠버의 부동산 시장을 두고 하는 얘기다. 지난해의 주택 거래 열기는 확실히 “광기”로 읽힐 정도로...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36-진영란 무궁화 여성회 회장
이민 와서 기뻤던 일을 추억할 때도 혹은 쓰린 경험을 들춰낼 때도 그녀의 웃는 얼굴은 거의 한결 같았다. 지나간 일에 얽매이지 않는, 지금 주어진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는 사람만이 가질...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35-냅캐나다 기술 팀장 문두진씨
밴쿠버에서 일자리를 구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땅에서 키워지고 교육받은 1.5세나 2세 역시 높기만 한 취업 문턱 앞에서 한숨을 지을 때가 많다. 좀 더 암울하게 얘기하자면...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34-한국문협 밴쿠버 지부 김해영 회장
한국에서의 삶은,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의 밧줄을 팽팽하게 쥐고 있을 뿐이지 뒤를 돌아볼 겨를”은 좀처럼 허용하지 않았다. 성공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거의 한결같아 보였고,...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33-에버그린카이로프랙틱클리닉 박세환 원장
미지의 세계를 앞에 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믿음직한 가이드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려 든다. 운전할 방향을 명확한 어조로 지시하는 네비게이션이 있다면 낯선 길도 낯설게 다가오지...
서예가 춘강(春江) 서정건의 새해 메시지
그의 하루는 고요하지만 풍족하게 꾸며진다. 아내와의 아침 산책을 거르지 않고, 소박한 식탁에 오를 땅의 선물들을 직접 가꾼다. 고서(古書)를 통해 옛 스승들의 지혜를 더듬는 한편...
"친구가 되려는 마음, 공감하는 마음이 중요", 핫초코로 전하는 따뜻한 손길
"돕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하고 친구가 되려는 마음,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매주 토요일이면 밴쿠버 이스트 헤이스팅스가(East Hastings St.)에 젊은...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32- 오유순 이사장
그녀의 인생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남편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종교학자이고, 아들 셋은 저마다의 분야에서 흔들리지 않을 기반을 일찌감치 구축해 놓았다. 첫째는...
10년 경력의 전문 피트니스 트레이너 박진근씨
버나비 메트로타운에 개장을 준비하고 있는 굿라이프 피트니스(Goodlife Fitness)에 건장한 체격의 한인이 눈에 띈다. 굿라이프 피트니스 세일즈 매니저 박진근(35)씨다. 한눈에 봐도 몸이...
망치 잡는 것이 즐거운 완벽주의자, 리노베이션 전문가 노성문씨
지난 9일 리노베이션 공사가 한창인 웨스트밴쿠버의 한 주택.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건장한 한인 청년들이 시선을 잡아끈다. 대부분 20~30대인 이들은 쌀쌀한 날씨에도...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31-요리 전문가 우애경
그녀의 삶에서 무료한 구석은 찾아보기 어렵다. 요리 전문가로서 케이터링 사업에도 열심이지만, 그만큼 자원봉사 활동에도 충실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곳 한인사회에서“재능 기부자...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