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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꼭 한번 돌아가고픈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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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4-04-08 14:50

민완기 / 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장
1.
23세. 
대학을 마치고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들어간 나의 첫 직장은 강북구 미아동 소재 S여중이었다. 첫 출근 날 아직 군대도 미필인 시절, 솜털이 뽀얀 홍안의 청년이 여중생의 수업을 들어간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리셨는지 교감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러 세워 다짐을 하신다.
“민 선생, 오늘 수업을 들어가게 되면 무조건 민 선생은 딸이 하나 있는 애 아빠라고 자기 소개를 하시고, 학생들이 딸 이름을 혹시 묻거든 ‘들레’라고 하세요.”라며 오리엔테이션을 해주신다. 졸지에 ‘들레 아빠’가 되어 시작된 나의 짧은 1년간의 국어교사 시절은 참으로 한 편의 영화만 같다.

출근시간 교문을 들어서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무실을 향하고 있으면 우측 고등학교 건물(당시 브라스 밴드가 유명했던 S여상)의 창문이 활짝 열리며 ‘어이, 총각’하고 나를 불러세운다. ‘어떤 놈이야?’하고 소리를 치며 쳐다보면 어느새 창문은 쾅 하고 닫히며 숨어서 웃는 소리가 들리곤 하였다.

부임 후 맞은 첫 식목일 아침, 교정 뒷동산에 같이 입사한 동료 교사 6명이 기념 식수를 하였다. 그 때 심은 수종이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않지만 구덩이에 물을 흠뻑 주고 발로 흙을 밟으며 나중에 훗날 꼭 한번 이 나무를 찾아보리라 다짐했던 기억이 있다. 나무를 함께 심은 동기중에 한명이 학교장을 마치고, 이미 연전에 퇴임했다는 소식을 학교 웹사이트 연혁난을 통해 읽으며, 40년전 그 나무는 과연 죽지않고 지금까지 그 자리에서 잘 자랐을까, 얼마나 커 있을까 문득 자꾸 궁금해진다.

2.
27세.    
석사정훈장교로 임관하여 발령을 받아 자대 배치된 곳은 강원도 양구군 동면 임당리 155mm 포병 대대였다. 막 임관하여 결혼한 초짜 중위에게 군인 아파트 관사 차례가 돌아오지 않아, 부대 앞 ‘골마을’에 장작을 때는 방 한 칸을 구하여 영외 거주로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보증금 없이 월세 만오천원을 주고 구한 신방은 소여물 끓이는 가마 딸린 부엌이 있는 뒷채였는데 도저히 장작을 땔 수가 없어서 주인 내외분께 사정을 해서 자비로 새마을 연탄 보일러를 깔고 소꿉장난같은 신혼 살림을 시작하였다. 

살림이라고 해야 쓰다가 버리고 갈 요량으로 비키니 옷장 하나, 약국에서 쓰는 박카스 넣는 냉장고 하나, 부루스타 하나, 출퇴근용 자전거 하나가 전부였다. 부대로 출근하고 나면 아내는 주인 내외분을 도와 농사일을 돕거나 새참을 논에 나르며 생전 처음으로 ‘전원일기’를 찍으며 지냈다. 휴일이 오면 목욕 가방을 들고 한시간에 한번씩 오는 시골 버스를 타고 양구 읍내에 나가 목욕을 하고, 장을 보고 맛있는 군것질하고 오는 것이 가장 큰 낙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집 앞 비포장 논둑 위를 자전거 뒤에 아내를 태우고 둘이서 넘어질새라 꼭 붙들고 동네를 누비고 다니던, 쏟아질 듯 별빛이 찬란했던 그 최전방 시골 촌 동네 논둑길이 꼭 한번 다시 가보고프다.  

3.
33세
제대하고 기업체에 취직해서 직장을 다니며 사내 아이 둘을 낳고 그야말로 전쟁같이 사는 중에 처음으로 온 가족이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다. 당시 시카고에 교환교수로 나가 있었던 동서와 처형 덕분에 꿈의(?) 미국땅을 밟아보게 된 것이다. 지금도 시카고 죤 행콕 빌딩의 위용과 눈부신 오대호 호수의 색깔, 레이크쇼어 드라이브 위에 끝도 없는 차량 행렬, 생전 처음 맛 본 마운틴 듀 음료의 향취가 또렷하기만 하다.

마침 친한 고등학교 1년 선배 한 분이 외교관 신분으로 영사관에 근무를 하는 터라, 어느 주말 양쪽 가족 모두가 위스콘신주 Dells라는 곳으로 1박 2일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그 때 3시간 정도 드라이브하며 가던 중에 잠시 내렸던 어느 휴게소에서 마주친, 한국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강렬한 햇빛과 리얼 스카이 블루의 하늘색과 잔디의 푸르름에 압도되어 어떻게 이런 색갈이 존재하는지 한동안 놀랐던 순간이 생생하다. 그로부터 10년 세월 후에, 캐나다 이민을 결정하게 된 어쩌면 단초가 된 날 인지도 모르겠다.

위스콘신 강줄기를 따라 유람선을 타고 만난 팬케이크를 눌러놓은 듯한 바위와, 구비구비 기암괴석들과 풍광들을 보며, 그리고 유람선 선장과 안내를 맡았던 금발의 소녀가 보여준 환한 미소, 그 무엇보다도 나를 압도한 한국과는 사뭇 다른 눈부신 햇살과 하늘빛이 언젠가 이곳을 꼭 한번 다시 찾아오리라는 다짐을 했었던 것 같다.

後記: 42세되던 해, 캐나다 이민을 오게 되고, 어느 날 한글학교 동료교사 분의 부군이 한의를 공부하셔서 하루는 진료도 받을 겸 집에 초대를 받아 방문한 날, 그 분 따님이 인사를 드리러 2층에서 내려와서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어머 민 선생님 아니셔요? 들레는 잘 있나요?” 하던 드라마 같은 에피소드는 후일을 기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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