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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 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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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4-02-21 09:00

김보배아이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나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 계좌가 하나 있다. 이 계좌 잔고의 정확한 액수는 사실 계좌주인 나도 잘 모른다. 그 액수를 도통 모르는 점이 실은 매력적인데, 그 이유는 글을 다 읽고 나면 알게 되실 것이다. 수시로 적립이 되는 것만은 확실하며, 이 계좌를 개설한 지는 대략 삼년 정도가 되었다. 오늘부로 만천하에 공개하는 이 비밀 통장은 이름하여 ‘개똥 통장’이라 한다. 누구든지 손쉽게 계좌를 열 수 있다. 그동안 나만 알고(최측근 언니들 몇 명에게 말함) 지내던 극강 부를 축적하는 비밀을 갑진년 새해를 맞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값진 선물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소개해 본다.

아침 산책 애호가인 나는 아이들을 학교에 등교시킨 후에 부리나케 공원으로 향한다. 원래는 이름깨나 알려진 공원까지 갔으나 동선을 줄이는 차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작은 공원의 장점은 다른 동네 주민들은 올 리 없어서 한적하다는 것. 한 시간을 돌아도 아무도 지나가는 이가 없을 때가 부지기수라 적막하기까지 하여 혼자 걷는 것이 무서울 수 있다는 단점은 있다. 혼자 걷는 것을 호기롭게 여기는 나는 한적한 이 공원에 정을 붙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어제자 식은 커피 한 모금으로 남은 잠을 쫓은 다음 차에서 내린다. 연두 봄의 생 기운 속으로, 여름의 초록 숲속으로, 추색의 낙엽 잔치로 들어 간다. 나이 들수록 좋아지는 계절인 겨울의 산책이 특히나 행복한데, 혹한을 모르는 밴쿠버의 겨울은 우산을 들고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걸으면 명상이 따로 없다. 비아닌 눈이 내린 날은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길에 내가 만든 궤적만을 바라보며, 내가 연주하는 눈 밟는 소리를, 나만이 들으면서 고독을 마실 수 있다. 

비밀 계좌 이야기를 시작하다가 느닷없이 산책하는 이야기라니! 
자, 참을성을 갖고 들어주시라. 왜냐하면 이 산책을 하다가 그 계좌를 틀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몇 년 전에 있었던 더럽게 냄새나는 일을 끄집어내야 한다. 산책하다가 불특정 다수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어느날 나에게도 일어났었다. 기분 좋게 잘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신발 밑이 미끄덩했다. 아, 이런! 똥 밟았다! 순식간에 휴화산 휴지기를 끝장내는 엄청난 분노의 마그마가 로켓처럼 분출하였다. 개의 몸집마저 예측가능한 적지 않은 양의 배설물이었다. 차마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음을 아니, 모두 표현하지 않음을 고맙게 여겨주시길.

그 일을 겪은 이후로, 나의 최애 시간은 트라우마를 겪게 되었다. 청정 산소 흡입과 경쾌한 발걸음으로 어제의 노폐물을 씻어 내야 하는 고귀하고도 신성한, 선물 같은 나의 산책이 오로지 개똥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마약 단속반으로 전락해 버렸다. 나의 본능이 개의 배설물을 찾느라 전전긍긍했다. 어미 개의 것인지, 개새끼의 것인지를 나도 모르게 계속 찾고 있었다. 멀리서 확인 가능하다면 다행이었고, 적어도 2미터 전에 발견하여 즉시 보행의 방향을 틀어야 했다. 구획을 지날 때, 내 몸은 알아서 강렬히 진저리를 쳐댔다. 아, 개를 데리고 공원에 나오는 사람들은 왜 그리 많은지... 이 나라에 개는 또 왜 그리 다양하고 많은지… 게다가 개목걸이를 풀고 걷는 사람들이 왕왕 있었다. 황소만큼 큰 개가 쏜살같이 달려와 내 품으로 달려들 때도 있었다. 개줄을 풀고 걷는 부류들을 만나면 심장이 벌렁거렸다. 때때로 예의를 못 배운 개들은 내 뒤를 따라와 킁킁킁 내 냄새를 맡았다. “오홍홍, 우리 아이가 사람을 좋아해서요.” 공포를 삼킨 내 표정은 아랑곳없이 일방적으로 웃으면서 공립 공원의 개줄 정책을 모르지 않는 사람임을 밝힌다. 개를 자식처럼 여기는 캐나다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내가 이런 식으로 글을 적고 있어서 불편하지만, 어쩌랴, 나는 개와 친하지 않은 것을.

빼앗긴 산책에도 봄은 오는가! 개똥을 밟지 않은 날이라서 행복할 순 없었다. 개똥의 악몽 때문에 나의 행복지수가 바닥을 치는 것은 억울했다. 이 땅을 살면서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을 피할 수도 없었다. 종종 자식이 눈 똥을 치우는 엄마, 아빠를 만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상한 마음이 누그러들진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더 이상 불편함을 참으면서 산책을 이어 가다가는 수명이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오기에 비장함을 가미하여 결정을 내렸다. 개똥을 발견하면 내가 치우기로. 이 결정을 내리자, 나라는 사람이 지난 세월 더러운 일과 연관하여 비슷한 일을 실천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예를 들면, 공중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차마 말로 하기 싫은 장면을 맞닥뜨려서, 다른 칸으로 당연히 돌아설법한데, 나는 가다가도 다시 뒷걸음질 쳐서 들어가 물을 내렸다. 경우의 반은 물이 내려갔고, 반은 고장이었다. 시원하게 물이 컬컬컬 내려갔을 때 뭐랄까, 내 자신이 세상의 소금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들었다. 

세상의 소금으로 사는 날이 잦아 질수록 ‘이건 아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금 입자 안에 갇혀있던 쓰디쓴 억울함이 상소문을 써 내려갔다. 
“신이시여! 제가 똥을 치우겠습니다. 대신 한 건당 오만 원씩 주세요.”

그렇게 하늘에 상소문을 올리고 난 후, 길섶에 똥을 발견하면 반가웠다. 꼬박꼬박 오만 원씩을 통장에 적립해 나갔다. 어떤 날은 십만 원을 벌었다. 또 어떤 날은 오십만 원을 단 한번의 산책에서 번 날도 있었다. 어쩌다가 지인들과 함께 걷는 산책길에도 이 적립은 계속됐다. 동행인을 먼저 가라고 보낸 후, 세상의 소금 알바 일을 하고 종종걸음으로 뒤따라 가면 어김없이 동행인이 물었다. 그래서 두어 명의 최측근 언니들이 나의 비밀 통장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언니들은 예외없이 배꼽을 잡았다. 한 언니는 실컷 웃은 다음에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어째서 오만 원인가?” 나는 대답했다. “똥이 그대로 있었다면, 누군가가 밟아서 화를 내고, 하늘에 삿대질을 할 것이며, 이때 생산되는 부정적 에너지를 돈으로 환산했을 때 그 정도 된다”라고. 나의 사기꾼 같은 대답 때문에 둘이서 또 한바탕 눈물까지 흘리면서 배꼽을 잡았다. 

그 대화 이후로도 나의 소금 알바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똥을 치울 때 마다 나는 그 오만 원이 어디서 나와야 하는지 궁리하게 되었다. ‘개똥이 만약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서, 공원을 걷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운명적으로 그 똥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면, 똥을 치워준 나로 인하여 그 사람이 하늘에 삿대질을 안 하여 신이 안 받은 삿대질 값에 해당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사기같은 대답을 논리정연하게 만들고 한참 에누리를 얹어서 그 정도 복의 양은 오만 원 정도가 마땅했다. 그래서 신은 생돈을 찍어서 나에게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똥을 밟았어야 할 사람들이 받을 복 만큼 나에게로 오면 되었다. 

똥을 치우는데 대범해지자, 쓰레기를 줍는 데에도 뻔뻔해졌다. 도서관을 들어가는 길에 걸음 보조기를 끄는 할머니가 계신 것을 발견하면 얼른 뛰어가 문을 잡아 드렸다. 슈퍼마켓에서도 개똥을 치웠고, 버스 안에서도 소금 알바 일은 넘쳤다. 시도 때도 없이 거침없이 개똥을 치우다 보니 통장 개설한 지 삼년 만에 잔고는 수천만 원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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