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낙타 세 마리

박정은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4-03-08 10:48

박정은 / 사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복권이 윷놀이 상품으로 걸렸다구정을 맞아 주유소에서 일하는 한국인 직원들과 모여 윷놀이를 하는데남편이 복권을 상품으로 건 거였다주유소에서 복권을 팔기만 했지난 한 번도 복권을 사본 적이 없었다딱히 복권에 욕심은 없었지만그래도 기왕에 하는 윷놀이 열심히 해보지 싶었다열성껏 윷을 던진 결과 결국 몇 장의 복권이 손에 들어왔고난 그걸 받자마자 긁어봤다그런데 당첨 방법이 복잡해 얼마가 됐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그래서 보통 주유소에서는 손님이 복권을 가져오면 스캔으로 찍어 얼마가 됐는지 확인한다고 했다당장 옆에 스캔이 있는 것도 아니고직원에게 물어물어 분석해 본 결과 15불이라는 당첨 금액이 나왔다너무 신이 난 나는 복권을 쳐들고 남편을 향해 외쳤다. " 15불 됐어!" 그러자 남편이 콧방귀를 끼며, "내일 스캔해 봐서만약에 네가 15불이 됐으면 내가 20불 얹어준다."라고 자신있게 말했다왜 내 말을 안 믿냐고 강력히 항의하는 내게 남편이 던진 한마디, "넌 낙타 세 마리잖아~." 난 그 말과 함께 바로 꼬리를 내리며 찌그러졌다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낙타 세 마리와 얽힌 나의 복권 이야기는 이러했다.

 


옛날 한국에는 주택복권이라는 게 있었다. TV를 통해 방영되는 복권 추첨은 돌아가는 숫자판을 화살로 쏘아 나온 여러 개의 숫자가 정확히 일치하면 당첨되는 방식이었다복권이라고 하면 정말 그것밖에 모르고 살던 시절이었다그런데 어느 날 즉석 복권이라고 하는긁는 복권이 새로 등장했다하지만 그런 게 나왔다고 말만 들었지한 번도 사본 적이 없었기에 난 그게 어떻게 당첨되는지는 전혀 몰랐었다여하튼 그때가 서울대학병원에서 한참 간호사로 일할 때였다아침 7시에 출근해 평소처럼 근무하는데내게 환자 인계를 해주고 방금 퇴근했던 나이트 간호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전화를 받은 내가 "안 자고 왜 전화야?"라고 묻자마자나이트 간호사인 A가 무척 흥분한 목소리로 외치듯 내뱉었다.

 

"박 쌤~! 나 복권 당첨됐어~!"

 

"진짜무슨 복권?"

 

"그 긁는 즉석 복권 있지내가 방금 그걸 긁었거든근데 이게 그림이 똑같은 게 세 개 나오면 당첨인데낙타가 세 마리 나왔어~."

 

날아가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A가 지금 방방 뛰고 있다는 걸 난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정확해?"

 

내가 되묻자제발 자기 좀 믿어달라는 식으로 그녀가 거의 울부짖듯 외쳤다.

 

"그래~. 낙타가 세 마리 나왔다니까."

 

그녀의 외침으로 봐선 복권 당첨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이었지만그래도 난 이럴수록 더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A에게 다시 물었다.

 

"낙타가 세 마리 나왔어도이게 암컷과 수컷으로 살짝 다를 수 있거든그러니까 정확히 다시 한번 봐봐."

 

내 말에 한참을 살펴보던 A가 여전히 흥분한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암컷인지 수컷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아무리 봐도 그림이 똑같아."

 

"그래그러면 이건 당첨이 확실한데근데 낙타 세 마리면 돈을 얼마나 주는 거야?"

 

"나도 그걸 모르겠어그래서 전화했어낙타 세 마리면 일억일까삼억일까?"

 

"거기에 안 쓰여 있어?"

 

"몰라안 쓰여 있어박 쌤나 일억 만 당첨돼도 당장 병원 그만둘 거야나 어떡해어떡해~!"

 

정확히 얼마인지도 모르면서이미 그녀는 그 당첨된 복권 금액을 타고 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얼마인지 그것부터 알아야 하니까일단 침착하고복권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봐."

 

내 말에 A가 곧바로 복권을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말했다.

 

"여기에 주택은행 전화번호가 있는 거로 봐서는낙타가 얼마인지는 은행에 전화를 해봐야 알 거 같아."

 

"오케이그러면 빨리 은행에 전화해 봐!"

 

빨리 전화하라는 나의 재촉에, A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직 은행 문 안 열었어그리고 나 지금 너무 떨려서 전화를 못 할 것 같은데나 대신 전화 좀 해줄 수 있어?"

 

"알았어그러면 내가 해줄 테니까빨리 병원으로 다시 와."

 

"알았어금방 갈게."

 

복권에 당첨됐기에 택시비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고통화를 끝낸 A 간호사가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총알처럼 날아왔다분만장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오는 A 간호사의 얼굴은 흥분에 겨운 나머지 그 붉기가 거의 붉은 사과에 가까웠다즉석 복권을 손에 꽉 쥔 채로 내게 달려온 그녀가 날 끌어안더니방방 뛰며 분만장이 떠나가도록 외쳤다.

 

"박 쌤나 복권 당첨복권 당첨이야어떡해~. 나 어떡해~?"

 

방방 울려 퍼지는 그 소리에 신생아실 간호사가 뛰어왔고당직 의사도 당직실 문을 열며 뛰어나왔다그렇게 A 간호사가 복권에 당첨됐다는 소식은 전화를 타고 순식간에 일파만파 병원에 퍼지기 시작했다그 소식에 병동에서까지 A를 축하하러 달려온 간호사들로 분만장은 거의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총대를 메기로 했던 난 그 중심에 서서 A 간호사의 손에 들린 복권을 뺏어 들고침착하게 낙타 세 마리를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낙타가 수컷인지 암컷인지 확인하기 위해 예리한 눈으로 낙타의 배 밑을 몇 번이고 훑어봤지만, A의 말처럼 점하나 틀리지 않았다.

 

"이건 정확히 당첨이야!"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A 간호사를 둘러싼 모두가 손뼉을 치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인제 병원 그만두니까 쌤은 너무 좋겠다."

 

"병원 그만두면 뭐 할 거예요?"

 

모두가 부러움에 찬 목소리로 A에게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그 흥분을 가라앉히느라 난 손을 번쩍 쳐들며 모두에게 외쳤다.

 

"조용조용지금 은행에 전화해 봐야 하니까다들 조용!"

 

나의 외침에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전화기 옆으로 모여들었다환자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도 침착함을 유지해야 하는 게 간호사였다직업이 간호사인 만큼 나는 그 침착함을 십분 발휘해 차분한 손길로 주택은행 전화번호를 눌렀다.

 

은행 직원이 전화를 받자마자침착하자는 내 마음과는 달리 나의 입에서 따발총처럼 튀어나온 말은,

 

"여기 낙타가 세 마리 나왔는데요이거 얼마예요?"

 

"?"

 

"제 친구가 지금 복권에 당첨이 됐거든요."

 

"."

 

"지금 낙타가 세 마리 나왔는데암컷인지 수컷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절대 그림이 다르진 않거든요."

 

"그런데요?"

 

"이 낙타 세 마리는 얼마예요?"

 

"거기 나와 있을 거 아녜요?"

 

"어디요없는데요?"

 

"옆에 긁어보면 얼마라고 나올 거 아녜요~."

 

답답해 죽겠다는 듯한 은행 직원의 대답에순간 싸늘한 느낌이 내 등골을 스쳤고숨죽인 채 내 주위를 둘러싸고 당첨금액만 기다리던 모두가 뻥 한 눈으로 서로의 눈을 쳐다봤다. "알겠습니다." 말하며 수화기를 내려놓는 내 앞에 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누군가 동전을 얼른 내려놨다난 그 동전으로 낙타 세 마리 옆을 긁기 시작했다....원이 나왔다그 뒤는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두 상상이 갈 것이다너무 큰 절망감에 여전히 얼굴이 사과처럼 벌게져 있는 A 간호사를 분만장 문 앞까지 배웅하며 내가 말했다.

 

"오늘 밤에 다시 근무 나와야 하니까 빨리 가서 자갈 때 버스 타고 가고오백원이라 택시비도 안 빠져."

 

다른 일반 간호사들보다 조산사 면허증까지 있었던 난 거기서 일 하나는 그래도 딱 부러지게 하는 간호사였다그런데 그 일로 인해그날 복권 당첨 바람잡이를 했다는 이유로 나는 '분만장 띨빵 간호사 1'로 등극했다그러고 며칠이 지났을까몇 명의 간호사들과 모여 내가 환자 인계를 하고 있는데한 닥터가 나를 보더니 갑자기 내게로 직진해 걸어왔다그 닥터가 간호사들을 뚫고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내 앞으로 바짝 다가오더니살짝 몸을 숙여 무슨 비밀이라도 말하듯 아주 은밀하게 내게 말했다.

 

"박 간호사이거 가지고 주택은행에 가면 차 두 대하고 낙타 한 마리 준다니까이거 내가 줄 테니까 가서 받아와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가 내 손에 즉석 복권을 꽉 쥐여주고는 돌아섰다그렇게 돌아서 멀어져가는 그의 등짝이 흔들리는 거로 보아얼굴을 안 봐도 그가 키득거리고 있음을 난 알 수 있었다그가 내 손에 쥐어주고 간 자동차 두 대와 낙타 한 마리가 나온 이미 긁은 즉석 복권을 보며옆에 있는 간호사들 또한 웃음을 참느라 킥킥거리기 시작했다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표정으로 그 꽝이 난 즉석 복권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떨구며 중얼댔다.

 

"~속 놀리게 생겼구먼망했다!"

 

그 뒤로도 내 주위 사람들은 그 이야기만 나오면 배를 쥐고 꼬꾸라졌다그렇게 그날의 복권은 돈벼락이 아니라내게 웃음벼락을 안겨주었다.

 

주유소를 하다 보면 정말 많은 사람이 와서 복권을 산다당장 돌아가실 것 같은 노인들도 매일 와서 사간다코에 산소를 꽂고지팡이에 의지해 다리를 절며반신불수의 몸으로도 힘겹게 오셔서 꼬박꼬박 복권을 사간다위태로워 보이는 그분들에게 복권을 팔 때마다우린 복권을 쥐고 나가는 그분들 뒤에서 기도한다. "제발 복권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되면 저분 그 자리에서 바로 심장마비로 죽습니다제발 살려주세요그래도 꼭 뭔가 주고 싶으시거든 쓰지도 못할 돈벼락 말고저에게 주셨던 것처럼 웃음벼락이나 내려주세요."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수영복 입은 일기 2023.11.01 (수)
누군가 묻는다. 일기와 수필의 차이점은 무엇이냐고. 누군가 대답한다. 일기는 나만간직하고, 나만 읽을 수 있어 화장기 없는 민 낯이거나 발가벗은 나체이어도 괜찮다. 하지만수필은 남 앞에 서는 것이기에 나체의 일기에 수영복 정도 입혀 놓은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 양수에서 맨몸으로 살다, 세상에 태어나 강 보에 싸이고, 배냇저고리에서수의까지, 우리는 사는 동안 수많은 옷을 입는다. 내가 살면서 입었던 옷 중 제일 불편했던것이 정장...
허정희
풀잎처럼 살다 간 삶도 있고파도치는 외딴 바위에서홀로 외로이 살다가는 독수리처럼홀로인 삶도 있다 파도가 주름진 얼굴로바닷가에 도착하면먹으려는 새와살려고 온 힘을 다하는 물고기처럼불빛이 새어 나오는 밴쿠버 공항엔밤조차 잊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깨가 아프다고 말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말도 하지 못하고 집도 없이 집시처럼 떠도는 철새의 날개가노을 빛에 더 어둡다 어둠이 짙게 드리운 길 위를 가는...
전재민
텀블러 2023.10.23 (월)
원래넘어지는 게 정상이다날 때부터 꼿꼿이 제 발로 서는 사람은 없다어머니는 나더러 아기 적 내려놓기만 하면울음을 쏟아냈다 한다 수없이 넘어지고 굴러가며 쏟아지고 비워지고 다시 채워져 진화한 것이다 마침내 태어날 때 약하고 단순하던 홀로 서지도 못하던 그 존재는 이미 희미할 뿐 수 없이 넘어지고또 일어나며 해온 수련은 나를 단단하게 변신시켰다 뜨거운 것은 뜨거운 대로차가운 것은 차가운...
이인숙
   지난 9월 한달 여를 근 7년만에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모처럼 고국 나들이 길에 설레임과 좋은 추억들도 많았지만, 돌아와 생각해보니 가장 힘들었던 것을 꼽아보자면 단연 ‘키오스크’와의 독대(獨對)하는 시간들이었다.  팬데믹 이후 가급적 대면접촉을 피해야하고, 그만큼 인건비와 업무 부담도 줄일 수 있기에도입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순간순간 여행의 발목을 잡아오는 키오스크 복병의 매복과 공격에...
민완기
소통의 변화 2023.10.23 (월)
이상한 꿈을 꿨다. 지금도 팔과 몸 여기저기가 결린다. 꿈에서 내 방이 하나 더 새로 생겼다. 그때는 꿈인지도 몰랐다. 방 안쪽에 못 보던 문이 하나 더 있길래 살짝 열어봤더니 원래의 내 방만한 공간이 또 하나 안으로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그러지 않아도 집이 점점 좁아져서 고민이었는데 또 하나의 내방공간이 새로 생겼으니 이게 무슨 횡재인가? 근데 가만. 이방을 뭘로 쓰지? 나만의 서재로? 아님 응접실? 작업실? 실험실? 영화감상실?...
예종희
갈 참 냄새 2023.10.23 (월)
아버지는 우리 지붕이었다항상 지붕아래 튼튼한 울타리로 계셨다아버지 옆에 앉아 있으면갈 참향기로 다가오셨다 겨드랑이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수많은 날들로열매 맺는 갈참나무로 사시며내 안에 너, 네 안에 나무 한 그루따순 숨소리 다발 묶어 등짐 지고우리들 마음에 갈참나무로 뿌리내려 사셨다 이제는 동그마니 바람으로 숨소리 내는억새가 하얀 손 사례 치는 언덕에갈 참냄새가 나는 아버지 집이 있다
강애나
한글나무 2023.10.16 (월)
어느 날 오후언어로 표현하는그대 삶의 모든 편린들이 노래로 불려질 때우리의 꿈나무에게 내림굿판을 벌여야 하지 않을까.우리는 밝힐 수 있으리라.글을 가진 세종의 자손이라는 자랑스런 핏줄들을.우리들은 쓰러진 글자를 일으켜 세우고 틀린 글자를 고치면서언어를 잃지 않는 작업이 얼마나 큰 노동이 될 것이라는 것을외면할 수는 없다.완전을 추구하는 새로운 사회라도 더불어 살면서지조 없는 슬픈 역사를 만들어 갈 수는 없으며마주보는...
송요상
    주방영양학 교실 독자님들, 평안하시지요? 주방 영양학 교실, 심 박사가 안부 드립니다."당신이 먹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You are what you eat)"라는 속담을 아직 기억하시지요? 1825년, 프랑스의 미식가 브릴라 - 사바랭 씨는 그의 걸작 『미각의 생리학』(Physiology of Taste)라는 저서에, "네가 무엇을 먹는지 말해 주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 줄게"라는 말에서 시작됐습니다. 이 주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심정석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