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수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어우, 짜.김치가 너무 짜.” 19살 딸이 겉 절이 김치를 먹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어떡하지, 요즘 내 입이 이상해…맛을 못 보겠어.” 갱년기가 왔는지 요즘 따라 입맛도 밥맛도 없는 내게 커다란 파도 같은 기억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예전에 엄마에게 했던 말이었다. 엄마가 갱년기를 심하게 앓고 있을 때, 난 엄마의 아픔이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음식이 짜다 달다 라고만 투정을 했었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고 “안 먹어.”하면서 밥 대신 군것질을 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엄마는 본인이 갱년기를 앓고 있는 것도 모르고 죽을 때가 다 됐다면서 한숨을 쉬고 그러다가 인생을 되짚어 본다는 게 그만 남편 탓과 자식 탓으로 돌리면서 짜증도 내고 애꿎은 김치에다 설탕을 잔뜩 부어가며 성을 냈다.
거의 3년 만에 딸과 함께 한국으로 출국하면서 난 비행기 안에서 다짐을 했다. 절대로 엄마 음식에 토를 달지 않겠다고 말이다. 예전처럼 김치가 짜거나 음식의 간이 세다 해도 무조건 아무 말 하지 않고 맛있게 먹어 치울 것만 같았다. 사실 엄마의 음식 솜씨는 동네에서 제일로 좋았다. 오죽하면 식당을 해보라고 동네 사람들이 성화를 했을 정도다. 그런 엄마의 음식이 제일 그립고 또 소중하다는 것을 난 머나먼 이국 땅에서 살면서 깨달았다.
지팡이를 짚고 걸어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공항에는 나오지 못한 엄마는 나와 딸의 마중을 대신해 상 다리 부러져라 잔치 음식처럼 큰 상에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피곤하지…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
엄마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신발을 벗기도 전에 와락 내 손을 잡았다. 난 몸이 불편하고 늙은 엄마의 흰머리를 보자 울컥해서 일부러 배고픈 척을 했다.
“엄마, 갓김치도 있지?”
“그럼, 너 온다고 해서 많이 했는데…싱겁게 했어..또 짜다고 할까 봐.” 엄마는 서둘러 다리를 절며 밥상 앞으로 다가가 갓김치를 얼른 내 앞에 놓았다. 난 설렘 반 기쁨 반으로 얼른 젓가락 들고 갓김치 하나를 입안에 넣었다. 갓김치는 너무 맛있었다. 간도 딱 맞고 아삭거리는 식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행복하게 했다. 원래부터 갓김치를 좋아해서 어릴 적부터 밥상 위에 올라오면 밥과 갓김치만 먹었다. 외국에서는 갓김치를 먹기가 어려워서 유초이를 사다가 갓김치처럼 해 먹었는데 역시나 맛은 없었다. 한국에서 먹는 갓김치는 엄마의 손맛이 들어가서 더욱 맛있는 거였다. 그렇게 며칠을 밥과 갓김치 엄마표 밑반찬을 먹으며 행복하다고 아우성을 치다가 슬슬 햄버거도 먹고 싶고 치즈가 잔뜩 들어간 피자도 생각이 났다. 그래서 엄마에게는 약속 핑계를 대고 딸과 함께 햄버거도 사 먹고 느끼한 치즈가 들어간 돈까스도 먹었다. 문득 새로운 추억을 위해 2박 3일을 전라도 여수를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엄마를 설득해서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너무 오랜만에 한국에서 KTX를 타는 거라 무척이나 헷갈리는데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는 엄마를 보자니 속이 터지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크고 자란 딸은 할머니를 잘 보고 있으라 했더니…정말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난 혼자서 기차표에 적힌 번호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다가 열차가 곧 떠난다는 방송을 듣자 너무도 초조해 졌다. 그런데 멀리서 걸어오는 엄마를 부축이며 내 눈치를 보는 딸의 얼굴이 몹시나 못마땅해서 빨리 좀 오라고 냅다 소리쳤다. 다행히 철도에서 일하시는 직원의 도움으로 번호를 찾아 기차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와 엄마, 딸의 냉전은 슬슬 아지랑이 마냥 피어올랐다. 미리 예약한 호텔에 도착한 후, 난 다리가 불편한 엄마에게 더욱 신경을 썼고 알아서 척척 해주지 않는 딸에게는 불평을 쏟아냈다.
“what do you want me to do??”
“알아서 해야지, 나이가 몇 살이야?” 딸과 내가 자꾸만 티격태격하자 엄마는 불편한 기색을 보였고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딸과 얘기도 하고 여행도 해서 좋았는지 엄마가 당뇨 때문에 끊었던 술을 드시고 싶었는지 막걸리 한 병을 기분 좋게 마셨다. 문제는 그 다음날 이었다.
관광 명소를 다니면서 자꾸만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엄마가 너무 걱정이 되었다. 엄마는 늙어서 화장실을 자주 가는 거라며 신경 쓰지 말라했고 난 어디에 볼거리가 있는지 눈을 떼지 못하고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용의 동굴이라 써있는 곳으로 엄마를 모시고 갔는데 가는 길만 험하고 볼 것은 하나 없어서 너무 실망스러웠다. 다리도 아프고 속도 편치 않았던 엄마는 급기야 호텔에서 끙끙 앓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 기차 안에서 난 밤새도록 잠을 설치며 엄마에게 신경 쓰느라 너무도 피곤했고 여행 내내 할머니 얼굴만 눈 빠지게 바라보던 딸은 다시는 여행을 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옛말처럼 역시 여행은 삼대가 함께 하면 안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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