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숙려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또는 흘러가며 더러는 잊혀지고 더러는 오래오래 더불어 우정을 나누며 살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슴을 맞대고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고, 정당하게 충고할 수 있으며 때맞추어 도우며 함께 걸어갈 친구를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봄비처럼 촉촉이 만물의 소생을 도우듯 가슴을 열어 맞을 수 있는 친구 한두 명 있다면, 인생은 풍성한 가을을 맞은 듯 행복하리라 본다.
누구나 그러하겠으나 나 또한 친구가 많은 편이다. 어린 시절 소꿉친구나 선후배의 학교 친구, 아이들 엄마 친구 동네 이웃 친구 문우들, 살아오면서 정을 나눈 친구가 어디 한두 명이 겠는가 마는 그중에서도 가슴을 묻을 수 있는 친구는 따로 있다. 사리를 알게 되어 남의 말에 현혹되지 않을 인생 후반에서, 인생 길벗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아껴가는 아름다운 친구이다. 날마다 안부를 묻지 않아도 늘 그 자리에 있어 주고, 언제나 그림자처럼 마음 곁에서 느낄 수 있는 친구, 가슴이 저린 날엔 따뜻이 손잡아 주는 그런 친구다.
젊음이 아직 남은 날에 나는 내 삶의 반쪽을 잃어버리고 몹시 힘들어 한적이 있었다. 시간은 세월이 되어 속절없이 흘러 그날을 덮어 가고 있었지만, 내 가슴에 남은 친구의 아름다운 우정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이후 인생길에 친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며 살고 있다. 친구는 나를 위하여 함께 울었고 위로했고 힘이 되었으며, 지금도 함께 밀어주며 당겨주며 인생길을 걷고 있다.
어느 날 턱에 닿도록 세상 피곤이 덮쳐왔을 때 나는 그냥 그 친구의 가슴에 쓰러져서야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그때 친구는 나를 덮어주고 평안을 주었다. 참된 친구란, 줄 수 없는 것을 주고, 할 수 없는 일을 해 주며, 괴로움을 당할 때 외면하지 않으며, 비밀을 간직해 주는 이런 덕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언제나 고마운 내 친구는 이러하다. 서로의 눈빛만 보고도 피곤의 중증을 알아 처방을 내려주는 친구가 있어 나는 행복하다.
명심보감에 “길이 멀면 말馬의 힘을 알게 되고 날日이 오래면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나는 날이 갈수록 친구의 우정에 평안을 느낀다. 좋은 친구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아서 인생을 함께 바라보는 잔잔한 호수와도 같다. 아내를 고를 때는 층계에서 한발 내려서고, 친구를 고를 때는 한발 올라서라고 했던 탈무드의 말이 아니더라도 역시 나의 친구는 나보다 한발 위에 있는 것이 사실이기에 나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그 어떤 조건 없이 포용하며 감싸줄 수 있는 우정은 정精이 아닌 의義에 불타는 고백하지 않는 정열일 것이라 여긴다.
춘추시대 제 나라 사람 관중과 포숙아가 나눈 관포지교管鮑之交는 우리에게 참으로 교훈이 되는 아름다운 우정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관중은 “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다” 라고 했다. 나를 알아주는 벗이 있다는 것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정이 메말라 가는 이 시대이고 보면 의義는 더욱 찾기 힘든 일이 되고 있다. 이 세대에 관포지교 같은 우정을 내게 주는 친구에게 감사하며 나 또한 친구의 부탁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 덕성으로 살고자 한다. 향기가 풍기는 방에 들어감 같이 친구의 우정엔 가감加減이 없기에 오늘의 나를 행복하게 한다. 금과 같이 변하지 않고 난초와 같이 향기로운 금란지계金蘭之契 의 우정이 나에게 있는 한 나는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나를 잊어버리지 않는 벗, 미워하지 않는 벗, 그리하여 사랑하는 막역지우莫逆之友 하나쯤 있다면 가슴에 휘파람이 도는 삶의 위안이 되는 일일 것이다. 이 아침 가슴에 있는 친구와 더불어 휘파람새 지저귀는 호젖한 산책길에서 우정의 꽃다발을 나눌 수 있다면, 인생길의 즐거운 한때가 되리라 여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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