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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외로움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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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0-12-28 11:36

최민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이른 새벽, 이슬이 맺힌 풀숲 사이로 나는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멀리서 들려오는 계곡물 소리가 간밤 불면으로 멍해진 머리 속을 차고 맑게 헹구며 지나간다. 밤새 열변을 토하던 벗들은 아직도 깊이 잠들어 있다. 세상과도, 자기 안의 고독과도 화친하지 못한 채, 짧은 삶을 마감해야 했던 한 작가에 대하여 사람들은 제각기 할 말이 많았다.

숲으로 향해 가는 내 발걸음을 마른 풀줄기가 잡아당긴다. 아직 이르니 동 틀 때까지 기다리라는 건가. 괜찮다고, 머지않아 해가 떠오를 거라고, 달래 듯 어르듯 헤치며 걷는다. 늦도록 두런대는 사람들 때문에 잠을 설친 숲의 정령들에게는 돋쳐 오르는 이른 햇살이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골짜기 사이에 가로놓인 나무다리를 건너간다. 나무가 삐거덕, 아픈 소리를 낸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뼈마디 부딪치는 통증을 지그시 참아내던 어머니처럼, 다들 그렇게 남몰래 조금씩은 삐거덕거리며 사는 모양이다.

잎이 져 버린 숲 한가운데로 어느 새 깊숙이 들어와 있다. 중 저음의 베이스처럼 깊고 따스한 갈색, 세월 탓일까. 신록의 무성함 보다 가을 숲의 수척함이 더 깊이 와 닿는다. 화려한 색채를 쓴다 해서 그림이 강렬해지는 것이 아니 듯, 눈부신 것만이 마음을 끄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가만히 나무에 기댄다. 등허리께로 와 닿는 거칠거칠한 수피의 감촉. 그렇지만 한 켜만 벗겨 보아도 촉촉하고 부드럽고 연한 속살이 감추어 져 있음을 나는 안다. 인터넷 메일박스에 당도한 사람들의 마음에서도 자주 그런 나무냄새를 맡는다. 상처받기 쉬운 사람의 속마음. 사람들은 사이버에서 더 정직하고 자기 다워진다. 갑각류처럼 단단한 껍질로 무장한 사람일수록 더할 수 없이 보드레한 영혼의 속살을 감추며 살고 있음을 엿보게 될 때, 연민 비슷한 감동이 일곤 한다. 교감할 상대를 찾지 못한 견고한 고독- 존재는 다 외로움을 탄다. 제각기 보이지 않는 마음 한가운데에 고독이라는 이름의 길들지 않는 짐승 한 마리 씩을 키우며 살아가는 게 인생 아니던가.

고독, 교감, 이런 말들을 되뇔 때마다 오래 전에 읽은 까뮈의 단편 <간부(姦婦)>가 떠오른다별 생각 없이 살아온 중년의 여자가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법대생이었던 남편은 행상을 하는 철저한 생활인. 함께 있어도 교감이 사라져버린 그들의 관계는 이미 관성에 지나지 않는다.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낯선 방, 피로와 권태에 찌들어 돌아눕는 남자 옆에서 여자는 홀로 생각에 잠긴다. 사랑의 얼굴은 어떤 것일까. 마주 바라보지 않고도 더듬어 찾는 습관적인 사랑 외에 다른 사랑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여자는 홀로 망루에 오른다. 표류하는 불빛처럼 쏟아져 내리는 사막의 별들을 바라보며 망루 바닥에 몸을 누인다. 무한히 깊고 높은 하늘. 그 하늘이 그녀에게 내려온다. 외로운 마음이 잦아들고, 지나온 날들이 사라지고, 자신의 존재마저 잊혀진 자리에 소용돌이치며 내려오는 별빛. 온 하늘이, 온 우주가 그녀의 안으로 스며들어온다. 하나의 개체와 전 우주가 하나 되는 완벽한 합일. 여자는 비로소 충만함을 느낀다. 광대무변한 우주를 간부(姦婦)로 삼을 수 있다면 세속의 외로움쯤이야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다시 나무를 올려다본다. 고개를 90도로 꺾어야만 끝을 헤아릴 수 있을 만치 우듬지가 높은 나무는 허리를 살짝 비틀며 무심한 듯 하늘을 받치고 있다. 저만치 살아올 동안 얼마나 많은 말들을 참아내야 했을까. 어쩌면 나무는 외로웠을 것이다. 도저한 수직상승의 의지로 하여 더 많이 쓸쓸했을 것이다. 수직으로 서서 버티는 것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기댈 수가 없지 않은가.

별안간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이 나무에게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건네고 싶어 진다. 팔짱을 끼지도 마주 안을 수도 없고, 서로의 어깨를 빌려줄 수도 없는, 서서 버티는 것들의 외로움과 위대함에 대하여 작은 위로라도 전하고 싶은 것이다.

나무의 언어를 모르는 나는 까칠한 등허리를 가만히 쓸어준다. 존재와 존재 사이에 가로놓인 단절감. 막막하다. 동네 공원의 할머니들처럼 등을 쿵쿵 부딪쳐 본다. 등줄기를 바짝 들이대며 부닥치고, 부닥치고, 또 다시 부닥친다. 간절한 육탄공격이다. 몸이란 때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것들끼리의 소통수단이기도 하지 않던가.

나뭇가지 끝이 가상하다는 듯 여릿여릿 진저리를 친다. 가늘게 갈라진 하늘이 흔들린다. 키 큰 나무 하나와 키 작은 여자 하나가 등을 마주 대고 서 있는 아침, 새 소리조차 잦아든 듯 하늘도 이윽고 잔잔하다. 큰 나무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관목들이 늦가을 이른 햇살을 받고 부스러진 낙엽사이로 파랗게 일어선다.

숲을 나와 숙소의 식당으로 향한다. 안개에 쌓인 듯 어렴풋해 보이는 앞산의 능선이 더없이 신비롭다. 얇은 화선지를 켜켜이 포갠 듯 양감(量感)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먼 산 풍경을 마주하고 걸어간다. 나무와 나누어 가진 신 새벽의 교감 때문일까. 이상하리 만치 몸이 가볍다. 숲으로 걸어 들어온 여자의 안으로 숲이 가만히 걸어 들어온 게다.

"정직하게 말해 봐. 아침에 숲에 가더니 누구랑 뒹굴다 왔어?"

등판에 붙은 검부러기를 찬찬히 털어 내는 일행의 짓궂은 농담에 나는 그저 싱겁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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