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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앞에서 2019.02.27 (수)
도킨스와 하라리, 베르베르와 이정모가 사이 좋게 어깨를 밀착하고 있다. 사이 좋게? 인지는 사실모르겠다. 시비를 걸거나 영역다툼을 하지 않고 시종 점잖게 어우러져 있으니 나쁜 사이는 아닌 것같달 뿐.  책들은 과묵하다. 포개 있어도 붙어 서 있어도 일생 서로 말을 걸지 않는다. 책들은 다 수줍음을탄다. 자리를 바꿔 달라 보채지도 않고 어디로 데려가 달라 꼬리치지도 않는다. 즉각적인 피드백을양산하는 다중 미디어들이 창궐하는...
최민자
열매에 대하여 2018.10.22 (월)
익지 않은 열매는 왜 푸를까?  답은 익지 않아서이다. 말장난하냐고? 아니, 진언이다. 무림의 고수에게 칼날의 광휘를칼집 안에 감추고 내공을 다질 시간이 필요하듯, 열매들도 무르익기 전까지는 이파리와비슷한 보호색으로 위장하여 본색을 감출 필요가 있다.열매의 첫 번째 사명은 번식에 있으므로 씨가 여물기 전에 곤충이나 새에 먹혀서는 낭패다.덩샤오핑의 대외 기조 정책이었던 도광양회韜光養晦가 식물들에게는 초 짜 상식인 셈이다....
최민자
저물 녘의 독서 2018.09.10 (월)
스마트 폰이 부르르 떤다. 딸애의 호출이다. 외출할 일이 있으니 아기를 잠깐 맡아 달라한다. '기본임무 수행을 제한 받고 명령에 의해 지정된 지역으로 즉각 출동 행하는'비상사태, 이쯤 되면 내겐 '진돗개 하나'다. 읽던 책을 던져두고 부리나케 일어선다.​ 생후 6개월, 쌀 한말 무게도 안 되는 아기는 진작부터 힘이 천하장사다. 삼십 년 가까이 한동네 붙박이로 살던 나를 제 집 옆으로 끌어다 붙일 만큼 태어나기 전부터...
최민자
2월이 간다 2018.02.26 (월)
창이 밝아졌다. 안개에 갇힌 듯 어스름한 시야가 선명해지고 물러 있던 산이 다가앉아 보인다. 육안으로 느끼는 빛의 감도도 나날이 조금씩 달라져간다. 지금 내 창에는 하늘하늘한 시폰 커튼만 걸려있다. 그조차 거추장스러워 양 옆으로 젖혀둔다. 부드럽게 일렁이는 레몬 빛 햇살. 가을이 바람으로 먼저 와 닿는다면, 봄은 우선 빛으로 오는 것 같다.   유리창을 투과해 들어온 빛이 거침없이 내 방을 접수해버린다. 겨우내 가슴속에...
최민자
붕어빵 먹는 법 2017.11.30 (목)
붕어빵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화제가 있다. 어디부터 먹느냐 하는 것이다. 그야 당연히 머리부터지,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꼬리부터 먹는다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숫제 뱃가죽부터 먹는다. 붕어빵 하나 먹는 법도 사람마다 다르다.   예전에 나는 꼬리부터 먹었다. 단 팥이 많은 머리 쪽부터 베어 물면 뜨거워서 입술을 델 것만 같았다. 맛있는 쪽을 먼저 먹고 나면 팥이 들지 않은 꼬리 쪽은 먹기 싫어질 것도 같았다....
최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