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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꽃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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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0-10-05 17:16

최민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1. 숨어 피는 꽃
꽃차를 마신다. 향긋한 기운이 입 안 가득 녹아 든다. 다시 한 모금 머금어 본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맛이 이러할까. 끓인 계곡 물에 꽃을 띄우고 한 소절 시구로만 가미하였으니 맛이야
그저 밍밍할 밖에. 향기로 기분으로 마실 일이다.
엊그제 산행 중에 오솔길에 흩뿌려진 작고 햐얀 꽃송이들을 만났다. 금세 떨어질 듯 생기 있어
보여 주섬주섬 집어 올려 코끝에 대어보았다. 향기가 참 달았다. 차를 끓여보면 좋을 성싶어 한
움큼 차를 우린다는 게 마음에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쪼끄맣고 하얀 꽃들에게 악의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불온한 기운이 좀 있다 한들 계곡에서 길어온 정한 석간수가 해독을 해주고도
남을 것이다. 흐르는 물로 대강 헹구어 신문지 위에 널어 두었다. 생 것이 가지고 있는 비릿한
물기는 바람이 거두어 가고 새들새들한 꽃잎에는 향기만 남아 있다.
어쩌다 찾은 산이지만 갈 때마다 다른 꽃들을 만나게 된다. 저만치 비껴 피어 있던 것도 아는
체를 해주면 부끄러운 듯 반색한다. 잎새 사이에 몸을 숨기고 향기만 내보내는 꽃들도 있다.
짝사랑 선생님께 익명의 편지를 띄워 놓고 가슴 두근거리던 지난날의 나처럼, 가까이 다가가면
무안을 탈 것 같아 애써 그 얼굴을 확인하지는 않는다.

빛깔이 흰 꽃들은 대체로 달콤한 향내를 지닌다. 벌 나비를 유혹할 만한 화사한 모양새를
지니지 못한 그들에게는 향기만이 생존의 비결일지 모른다. 겉으로 내세울 자랑거리가 없어 결
고운 심성 하나로 세상을 살아내는 사람들처럼.
호젓한 산길을 걸어 들어갈 때 바람결에 언뜻언뜻 묻어오던 향기, 늦가을 풀섶에서 코끝을
스치며 달아나던 바람, 그 바람의 갈피마다에서 나는 어딘 가에 숨어 핀 작고 하얀 꽃들을 본다.
크고 화려한 꽃이라면 그렇듯 소극적이고 상대를 미혹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너무 잘나거나
개성이 강한 사람에게 선뜻 마음을 열지 못하는 나는,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향기가 강한
꽃에게도 쉬 정이 가지 않는다. 꽃이건 사람이건 일시에 상대를 뇌쇄 시키는 강한 매력보다는
만날수록 새록새록 정이 드는 쪽이 좋다.

2. 박꽃 같은 웃음
그 여자는 꼭 박꽃처럼 웃는다. 초저녁 박꽃같이 하얗게 웃는다. 그녀가 웃을 때면 화장기
없는 얼굴이 일시에 환 해지며 가는 눈이 더 가늘어진다. 여간해서는 웃음소리가 새지 않는데도
이따금 은 입을 가리고 웃는다. 수줍음이 묻어나는 무공해 웃음. 나는 그 웃음이 좋다.
친정에서 농사지어 온 완두콩이나, 아침에 따온 단감 하나. 판축물로 받은 작은 화장비누를
살며시 건네며, 그녀는 그렇게 소리 없이 웃는다. 한 교실에서 글공부를 하면서도 달리 베풀어준
것이 없는 내게, 그녀가 보이는 맹목의 호의는 나를 자주 부끄럽게 한다. 어느 때엔 진돗개 백구
이야기가 적힌 동화책을, 또 어느 때에는 요리책이 달린 작은 가계부를 봄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 에야 주춤주춤 내밀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볼까 봐 나한테만 몰래 건네 주면서 그녀는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인다.
그냥...드리고 싶어서요. 그 다음에 따라오는 것이 예의 그 박꽃웃음이다. 순하디 순한 얼굴에
번지는 환한 미소를 바라볼 때마다 마른 들을 달려온 풀 향기 같은 것이 금방 가슴으로 전해져
온다. 깨끗한 그 웃음이 좋아 나도 그렇게 따라 웃어본다. 그저 잘디잔 메밀꽃 만큼이라도 그
순백을 흉내 내고 싶어 자꾸 따라 웃어보지만, 아마도 그 하양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빛깔인 둣 하다.

3. 접시꽃 당신
아파트 화단에 접시꽃이 피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하얀 꽃이다. 다른 꽃들이 울긋불긋
수선을 떨어도, 다소곳하고 의연하게 서 있다. 가까이 마주 서니 연한 향내가 번져온다. 땅속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수액으로 말없이 향유를 빚는 꽃들, 생명을 향기로 가꿀 줄 아는 꽃들의
지혜로운 침묵이 부럽다. 꽃 가까이 코를 대고 맑은 숨을 쉬어 본다. 범아일체의 경지는
아니어도 꽃 숨이 내 숨인 듯 마음이 환해진다. 내가 언젠가 꽃이 된다면-생명의 윤회를
믿어보고 싶어 부질없이 상념에 잠긴다. 맑고 밝은 흰빛이었으면,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이었으면, 아니 그저 아무렇게 피어서라도 향기만은 품어봤으면,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정말로 꽃이 된 듯 즐거워진다.
바람이 분다. 접시꽃이 방싯 고갯짓을 한다. 바람을 안고서 있는 꽃대가 가늘게 가늘게 도리질을
한다. 향기는 품어 안는 게 아니라 풀어 나누는 것이라고, 공들여 가꾼 생명의 진수를 내어주는
일이라고 그것들은 가만가만 일러준다. 꽃이 육신이라면 향기는 영혼이기에 향기를 나누는
삶이란 영혼을 나누는 삶이라는 것을 꽃으로부터 배우곤 한다.
작은 벌 한 마리가 접시꽃 사이를 넘나든다. 꽃이 활짝, 환대를 한다. 제 귀한 것을 나눔으로써
상대에게 자기의 존재를 깨우치는 지선지고의 처세술을 꽃들은 어디에서 터득하였을까. 더
많이 움켜쥐고, 더 크게 소리를 높여야 세상이 나를 알아준다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꽃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할까. 향기를 품지도, 나누지도 못하고 사는 나는 하얀 접시꽃의 웃는 얼굴을
마주 대하기가 겸연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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