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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19-12-03 16:50

하태린 / 캐나다 한국문협 부회장
 싱겁게 끝났다
질펀한 침 범벅으로 끝난
한판 대결은
상추의 익숙한 꺾기 조르기 기술로
고추, 마늘, 쌈장으로 무장한 삼겹살 도전을
보기 좋게 물리쳤다
도전자는 푸른 치마폭에 질식당한 채
앙~하니
공룡 이빨의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곧바로 던져졌다
잘게 바숴진 삼겹살은 어두컴컴한 나락으로
패대기쳐진 것이다
동굴 입구에 덮어놓고
소주잔만 통째로 들이붓고 내빼는 사람들
삼겹살만 있으면 됐지
상추야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라는 말투는
으레 패자에 대해서만 칭찬 일색이고
단지 치마를 걸쳤다는 이유 하나로
오히려 승자에겐 인색하게 구는 것이다

이는 결코 정당화할 수 없는
일종의 모독행위로 간주된다
저 밭두렁 언저리에서
붉으락푸르락하니 뾰족뾰족 일어서는
붉은 치마나 푸른 치마의 혼(魂)들은
예의 보고만 있을 수만 없다는
일종의 반발 행위이다
농부가 씨앗을 덮고 있던
흙 이불을 토닥일 때
길고 째진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눈꺼풀을 번쩍 뜬다
이어 못 참겠다는 듯
붉고 푸르죽죽한 체머리를 몇 번 흔들고는
몸을 홱 일으키며 흙무덤을 박차고 나오는 것이다
그녀,
죽어도 죽지 않는 불굴의 치마 부대,
시퍼렇게 눈을 부릅뜬 그녀들은
늘 이렇듯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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