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최고의 밥상

정재욱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8-05-14 11:57

정재욱/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천천히 마이 무라이, 거선 이런 거 묵기 힘들 낀데.” 
(천천히 많이 먹어라, 그곳에선 이런 음식을 먹기가 쉽지 않을 건데.)

팔순 할머니가 막내 아들에게 아침상을 차리며 건넨 한마디다. 

아침 일찍부터 어머니가 쌀을 씻고, 딸그락 딸그락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아직 시차에 적응을 못한 탓인지 일찍 잠이 깨었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 멀리서 “두부 사려~, 비지”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두부 파는 아줌마의 정겨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잠깐 둘러 본 동네는 새롭게 올라간 건물들과 길가에 빽빽히 주차된 차들로 비좁았다. 많은 것들이 바뀌고 낯설었지만 마음은 시간을 거슬러 흙먼지를 휘날리며 신나게 뛰놀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그 당시, 매일 아침 벌어지는 아침 풍경은 전쟁터나 다름 없었다. 오 남매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고, 치매에 걸리신 할머니까지 돌보셨던 어머니는 초능력을 가진 슈퍼 히어로였다. 한 번만 차려도 될 밥상을 식구들 수 대로 각기 다른 스케줄에 따라 여러 번 차릴 때도 있었다. 차려 주신 밥상에서 비위가 약해서인지 냄새가 나는 김치를 싫어했고, 비린 생선도 먹지 않았고, 순대, 곱창이나 곰탕은 아예 손도 대질 않았다. 이것 저것 권하시며 많이 먹으라는 소리에 귀찮아 하며 내가 알아서 먹는다며 짜증을 내기도 했고 반찬투정을 하기 일쑤였다. 삼시세끼 밥상을 차리시는 일이 당연한 걸로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도 내가 제일 좋아했던 밥상은 어머니께서 손 수 담그신 물 김치에다 두부를 넣은 된장찌개에 밥과 함께 참기름 한 방울과 고추장에 비벼 먹는 거다. 지금 내 앞에 제일 좋아했던 밥상이 차려져 있다. 오랜만에 멀리서 자식이 왔다고 손수 만드신 김치에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넉넉히 담은 밥 한 공기를 정성스레 차리신 한끼였다. 어머니께서 차리신 밥상은 세상 어느 유명한 셰프가 만든 것보다도 옛날 임금님이 먹던 수라상보다도 더 맛있고, 내 입맛에 꼭 맞는 최고의 밥상이었다. 반 백 년의 세월에도 내 혀가 느끼는 맛은 여전했다. 매끼를 먹어도 질리지 않고, 아무도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하는 그런 맛이다. 뭘 하나 음식을 만들 때마다 멀리 캐나다에 살고 있는 자식이 생각 나신다는 어머니, 한국 출장 온 막내 아들에게 하나라도 더 챙겨 먹이려는 마음에 이것 저것 권하신다. 연세 드신 어머니가 항상 걱정이 되고, 거동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어머니 앞에선 아이가 된다. 아직까지 어머니가 손수 차려준 밥상을 내가 먹을 수 있다는 건 만으로 행복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밖에선 봄비가 촉촉히 내리고 있다. 며칠 남지 않은 한국 일정을 아쉬워 하고, 미세먼지가 빨리 씻겨 나가길 기대하며 창 밖을 바라본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홍안에서 노안으로>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나이에 비해 어려 보여 난처했던 적도 꽤 있었고, 나이 들어서는 비교적 젊게 보니 마음이 흡족할 때도 있었다.20대 초반 제대 후 복학을 했을 때의 일이다. 경기도 안양시 어느 변두리를 걷고 있었는데, 불량하게 보이는 학생 세 명이 나에게 다가와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한 명은 체격이 작았지만 뒤에 2명은 보통 체격...
이형만 외 2인
<고귀한 분실>  해마다 찬바람이 불어오고 단풍 꽃이 필 때면 우리 곁으로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이 있다. 이 고마운 손님은 산란기가 되어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헤치고 목적지인 모천까지 무사히 회귀하는 연어들이다. 알을 낳기에 가장 좋은 장소를 찾아 먼 바다에서부터 거센 강줄기를 거슬러 하천 상류 얕은 물가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은 그야말로 눈물겹다. 연어에게 주어진 태생적 생존 본능이라 하더라도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양현석 외 2인
  팔루스는 사진 모임에서 매년 세 네 차례 출사를 가는 곳이다. 팔루스는 미국 아이다호 주 서부 맞닿은 워싱턴주 동부에 위치한 밀밭 곡창지대이다. 구릉과 평원으로 끝없이 펼쳐진 이 곳의 아름다움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다. 새싹이 돋는 봄은 출렁이는 물결처럼 갓 태어난 푸른 밀들이 춤을 추고, 여름이 다가오면 노란 유채꽃들과 푸른 밀들이 축제를 벌이고, 가을엔 밀들이 베어진 대지가 마치 전라의 여인처럼 본래 대지의 아름다운...
박광일
그래도 봄은 온다 2024.03.25 (월)
경칩 지나 춘분으로가는 길모롱이 언덕 바지에불현듯 반짝이는보라 빛 고운 웃음소리긴 긴 겨울 잔인한 혹한 속에서그래도 봄은 온다고옹기 종기눈 녹은 양지녘에 모여 앉은여리고 작은 제비꽃 가족반짝이는 보라 빛 비단 실 입에 물고대지 위에 점점이희망이란 단어를 환하게 수 놓고 있다
임완숙
니스에서 3박 4일 2024.03.18 (월)
프롤로그쓰레기와 개똥이 널려 있는 지저분한 도시, 니스Nice의 첫 인상이다.트램 역에서 예약한 호텔로 걸어가는 길은 지중해의 아름다운 도시라는 환상에서 깨어나게 한다. 역 주변엔 노숙자와 개가 퍼 질러 앉아 있거나 누워 있어 개똥과 쓰레기 투성이고, 골목으로 들어갈수록 상황은 심각해 발걸음을 떼 놓을 때마다 주의가 필요하다.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며 도착한 숙소는 소박하지만 깔끔하고 종업원은 친절하다. 프랑스 말을 알아들을 수는...
강은소
3월의 일기장 2024.03.18 (월)
펼쳐보니뒤척였던 적보다 구겨졌던 적이 더 많았군요먼지 투성이로 처박혔던 것보다 나았다고혼자 위로도 해보지만눈 보라 쳤던 겨울밤에 웅크리던 낱말 들다시 덮을까요?여전히 봄은 멀어 보였죠나무 밑 다람쥐가 조심스레 도토리를 오물거리네요가난한 위장을찌그러졌던 속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듬더군요햇살이푸른 햇살이돌돌 말려 올라간 꼬리에 머무네요잔잔하게 바라봅니다조용히 덮었어요그리고 너덜거리는 일기장을 햇살에...
유장원
오래된 마음 2024.03.15 (금)
1‘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는 푸시킨의 시가 서두에 놓인 기사였다. 퇴근을 앞둔 마지막 교정이었지만, 이미 야근이 계속된 터라 피곤이 몰려왔다. 고골이 푸시킨을 200년에 한번 나올법한 작가라고 치켜세운 부분에서는 집중력을 잃고 교정지 위에 빨간 펜으로 기다란 선을 긋고 말았다. 그러다 나의 관심을 끈 건 뜻밖에도 푸시킨의 아내였다. 푸시킨은 러시아 상류층 사이에서 미인으로 소문났던 나탈리아 니콜라예브나...
고현진
추억 (안녕) 2024.03.08 (금)
  김회자 / 사)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창가에 앉아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비 소리에 섞여 흘러가는지    그리움이 강이 되어  가슴을 흔들어 놓고 한 줄기 빛처럼 비추는  지난날의 추억들이 퐁당퐁당 떨어진다   나를 과거로 이끄는  그리고 나를 현재로 되돌린 비의 속삭임이여 안녕.
김회자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