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2월이 간다

최민자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8-02-26 08:52

최민자/캐나다 한국문협 자문위원
창이 밝아졌다. 
안개에 갇힌 듯 어스름한 시야가 선명해지고 물러 있던 산이 다가앉아 보인다. 육안으로 느끼는 빛의 감도도 나날이 조금씩 달라져간다. 지금 내 창에는 하늘하늘한 시폰 커튼만 걸려있다. 그조차 거추장스러워 양 옆으로 젖혀둔다. 부드럽게 일렁이는 레몬 빛 햇살. 가을이 바람으로 먼저 와 닿는다면, 봄은 우선 빛으로 오는 것 같다. 
 
 유리창을 투과해 들어온 빛이 거침없이 내 방을 접수해버린다. 겨우내 가슴속에 누적되어 있던 음습한 기운까지 걷어낼 기세다. 여민 옷깃을 풀어헤치고 넉장거리로 드러눕는다. 눅진한 심신을 봄볕에 널어두고 젖은 빨래를 말리듯 나를 말리고 싶다. 
 
 손톱을 세우고 매섭게 할퀴던 바깥바람도 이제는 많이 누그러졌다. 이 무렵의 바람에는 달래나 씀바귀처럼 맵싸하면서도 톡 쏘는 기운이 있다. 희다 못해 푸르스름한 매화의 향기라도 묻어 올 것 같다. 그 청신함이 좋아 나는 일부러 2월의 바람 속을 혼자 걷곤 한다. 투명한 냉기 속을 거슬러 걷다 보면 머리 속도 어느 새 차고 맑아져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 서 있는 듯 홀로 엄숙해지기도 한다. 우연히 만나 함께 걷다가 바람은 바람 길을, 나는 내 길을 가는, 그 만남과 헤어짐이 좋다.   
 
 2월은 봄이 아니다. 그렇다고 겨울도 아니다. 겨울 속을 흐르는 봄인지도 모른다. 겉은 차고 속은 따스한, 자존심 강한 여인이라 할까. 사리를 가를 때엔 이치에 어긋나는 법이 없어도, 보이지 않는 구석에 서면 홀로 눈물이 헤픈 여자. 토라져 새치름한 옆모습이 날 선 바람 같아 보여도, 말없이 내미는 화해의 손을 아주 외면하지는 못하는 여자. 2월은 그런 여인 같은 달이다. 여린 햇살 한 자락에도 서슬이 풀어져 금세 물이 되어 녹아버리는 잔설처럼, 못이기는 척, 져 줄 준비가 되어있는 마음 약한 지어미 같은 달이다.  
2월은 또한 정중동(靜中動)의 달이다. 겉으로는 잠잠한 듯 평화로워도 내밀한 술렁거림을 잠재울 수는 없다.
 
  비탈에 서서 푸른 숨을 삼키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겉모습과 속생각이 다른 것들의 침묵은 언제나 위태롭다. 지난 가을 묵은 잎을 무심히 펄럭거리며 서 있던 언덕 위의 신갈나무도, 길모퉁이 감나무 고목도, 스멀거리는 봄기운을 어쩌지 못해 땅 밑에서는 남몰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 발 놀림이 간지러워서 흙 속 씨앗들이 몸을 비튼다. 흙의 관능과 빛의 에너지가 은밀하게 도모하는 해토머리의 반란. 반란은 이미 시작되었다. 
 
 2월의 햇볕이 여릿여릿하다 해서 얕보아서는 안 된다. 부드러운 것이 오히려 강한 법. 생명을 일깨우고 씨앗을 부풀리는 위대한 빛은 한여름 땡볕이 아닌 초봄의 햇살이다. 완강하게 얼어붙은 겨울 흙 사이에 훈김을 불어넣고, 잠에 취한 나무들을 흔들어 깨운다. 눈이 녹고 흙이 헐거워지고 움츠렸던 생명들이 기지개를 켠다. 얼레지와 바람꽃, 노루 귀 꽃 싹들이 숲 속 덤불 사이로 어깨를 들썩이는 때도 지금이다. 세상의 부드럽고 힘센 것들은 처음에는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기운을 결집해 나간다. 봄도, 햇살도, 여인의 사랑도 시작은 작고 미미하지만 마침내는 온 세상을 그득 채우고 말지 않던가. 잠과 꿈, 긴장과 설렘, 스러지는 것과 일어서는 것이 가만가만 교차하는 간이역 같은 2월, 나는 그 2월이 좋다. 
 
 우수가 지나는 다음 주말쯤엔 봄 마중을 나가 봐야겠다. 얼음이 풀리는 냇가에 서면 물소리가 반가울 것이다. 물오른 버들개지도 볼 수 있으리라. 부드러운 은백색 솜털 밑으로 봄기운이 사뭇 붉게 번져, 가느다란 수술 끝에는 노란 꽃밥이 소복하게 올라와 있을 것이다. 부풀어 갈라터진 겉껍질이 털북숭이 머리 위로 밀려 올라간 모습이 투구를 쓴 중세기 기사 같아 보일 것이다. 
 
 봄은 마음에만 와 있을 뿐, 창 밖 바람 끝은 아직도 차다. 차고도 따스한 달. 은밀한 술렁거림의 달, 하고 싶은 말을 가슴에 담아두고 때를 기다리는 여인 같은 달, 이제 그 2월이 간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머리가 허연 사내 하나가 털이 하얀 강아지 한 마리와 동네 골목을 산책 중이다.산책하고 싶어 한 게 개였는지 사내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강아지가 앞장서고 사내가 뒤를 따른다. 강아지가 길모퉁이에 멈춰 서 있다. 아랫도리를 낮추고 볼일을 보는 개를 사내가 조용히 기다려준다. 꽁초 한 개비 마음 놓고 못 버리는 인간의 거리에 천연덕스럽게 응가를? 무슨 상관이냐고, 갈 길이나 가시라고, 녀석이 흘끔 위 아래로 훑는다. 녀석이 일어선다....
최민자
그리움 2024.03.08 (금)
최민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전지를 갈아 끼워도 가지 않는 손목시계처럼 그는 그렇게 그녀라는 길 위에 멈추어 있다. 그녀와 관련된 기억들이 그에게는 여전히 아프고 쓰리다. 이별의 모서리는 언제나 날카로워 돌아볼 때마다 마음이 베이지만 그녀라는 모퉁이를 통과하지 않고 우회하는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진한 눈썹, 둥근 이마, 상큼하면서도 허스키한 탄산수 음색이 생각나 아직도 심장이 쿵, 떨어져 내린다 하였다....
최민자
아침 안개 2023.10.11 (수)
  그는 거물이야 하늘과 바다를 합방시키고 밤과 낮의 경계를 허물지 사람이 만든 구획을 지우고신의 업적조차 무화시켜 버려 논둑이며 밭고랑을 후루룩 삼키고 강물을 통째로 들이마시는 그는미처 씹지 못한 봉우리 하나 허공에 둥실 뱉어 놓기도 해그는 고단수야 숨소리도 없이 진군해 와서 오랏줄도 없이 포박해 버리거든 품어 안는 척 발을 묶는사랑법이 내가 알던 누구와 기막히게 닮았어 겹겹이 진을 치고 포위해보아도 끝내 네 안으로...
최민자
골목 2023.05.02 (화)
   골목은 눈부시지 않아서 좋다. 휘황한 네온 사인도, 대형마트도, 요란한 차량의 행렬도 없다. ‘열려라 참깨!’를 외치지 않아도 스르륵 열리는 자동 문이나, 제복 입은 경비원이 탐색하는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어 내리는 고층 빌딩도 눈에 띄지 않는다. 길목 어름에 구멍 가게 하나, 모퉁이 뒤에 허름한 맛집 하나 은밀하게 숨겨두고,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일상의 맥박  삼아 두근거리는, 웅숭깊고 되바라지지 않은 샛길이어서...
최민자
새와 실존 2023.02.02 (목)
 산 비둘기 한 마리가 베란다 난간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주면서 땅콩 몇 알을 접시에 놓아두었던 것인데 다른 놈들은 오지 않고 이 녀석만 온다. '새 대가리'가 사람 머리보다 기억력이 나은 건지 내가 깜박 준비를 못했을 때에도 잊지 않고 찾아와 난간을 서성댄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새가 브런치를 즐기는 동안 나도 천천히 차 한잔을 들이켠다.새들에게는 역사가 없다. 물고기도 그렇다. 새나 물고기가 종적을...
최민자
빈 듯 찬 듯 2022.10.12 (수)
   5년 넘게 땅속에서 묵었을 매미 소리를 모카커피에 타서 마신다. 오늘 아침 내 특제 메뉴다. 매미 소리는 먹기 좋게, 적당히 분절되어 커피 잔에 녹아 든다. 어떤 소리는 튜브에서 쥐어짜듯 찔끔찔끔 흘러나오고 어떤 소리는 톰방톰방 방울져 떨어진다. 짝에게 닿아야 할 노랫가락을 내 잔 속에 빠뜨렸으니 녀석들은 끝내 짝짓기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선율이 흘러나온다. 파가니니인지 텔레만인지, 얼른 기억이 나지...
최민자
모기란 놈은 왜 어리석게 사이렌 소리를 내며 공격을 하는 것일까. 경계경보 없이 단번에 공습하면 성공률이 훨씬 높을텐데 말이다. 앵앵거리는 비행물체 때문에 기어이 한밤중에 불을 켜고 앉는다.모깃소리는 모기만 하지 않다. 엔진을 가속시킬 때 발생하는 소음을 제어할 만큼은 기술력이 진보되지 않아서인가. 발사되는 로켓이 내는 굉음이 요란스레 어둠을 진동시킨다. 어쩌면 저들은 인간에게 경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안의 두려움을...
최민자
책장 앞에서 2022.03.14 (월)
도킨스와 하라리, 베르베르와 이정모가 사이좋게 어깨를 밀착하고 있다. 사이좋게?인지는 사실 모르겠다. 시비를 걸거나 영역다툼을 하지않고 시종 점잖게 어우러져 있으니 나쁜 사이는 아닌 것 같달 뿐.   책들은 과묵하다. 포개 있어도 붙어 서 있어도 일생 서로 말을 걸지 않는다. 책들은 다 수줍음을 탄다. 자리를 바꿔 달라 보채지도 않고 어디로 데려가 달라 꼬리치지도 않는다. 즉각적인 피드백을 양산하는 다중 미디어들이 창궐하는...
최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