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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7-02-12 00:00

해마다 2월의 어느 날 즈음이면 나는 앓는다. 이 2월의 앓음은 5년 전부터 시작됐는데, 해가 갈수록 더욱 심하게 앓는다. 이즈음이면 달던 술도 향기를 잃고 술잔을 쥔 손엔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목구멍을 타고 넘는 술은 하염없다, 하나도 달지 않은데.

겨울의 한복판, 2월의 아침은 더디게 열리고 바람은 아직 차기만하다. 눈이 내리지 않아도 세상은 하얗다. 해마다 나는 2월의 시퍼런 아침에 대고, 2월의 차가운 바람에 대고, 또 2월의 하얀 세상에 대고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을 새로 새긴다. 가슴 깊은 곳에 사무치는 아버지의 음성이 하얗기만 한 것처럼, 아버지의 묘갈명은 흰색으로 새긴다. 아버지가 떠오를 때마다 하얀 색이 함께 떠오른다.

6월의 신록이 눈부시던 날, 30년 넘게 자신을 병수발한 아버지를 두고 어머니는 먼저 세상을 마감했다. 고별미사를 마치고 어머니를 실은 영구차가 성당을 떠날 때, 아버지는 그때까지 꾹꾹 누르고 있던 목을 놓았고, 동시에 참던 울음이 큰 소리로 터져 나왔다. 성당 앞 골목에 쩌렁하게 울리던, 아버지의 영혼 저어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처절한 울부짖음은 어머니와의 이별만을 향하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의 오랜 신념이 마감하는, 아버지의 삶의 목표가 떠나가는 것을 향해 있었다.

아버지를 뒤로한 채 어머니를 화장(火葬)하고 돌아온 저녁, 허기진 산 사람들은 식당에 들었다.

거기서 다시 만난 아버지는 통절한 울부짖음을 다 토해내고 마치 껍데기만 남은 듯, 깊고 무거운 침묵 속에 있었다. 그리고 서로 눈을 마주치기도 서러운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아버지는 빈 잔을 들어 소주병을 가리켰다. 젊어서 술 꽤나 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남아 있었을 뿐, 아버지가 술을 향해 잔을 내미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투명한 소주가 가득 채워진 잔을 얼마나 꼭 쥐고 있었는지, 잔을 쥔 아버지의 네 손가락 손톱 끝이 하얗게, 새하얗게 저며 들었다. 홀로 남겨진 세상 앞에 아버지는 가늘게 떨고 있음이 분명했다. 목 넘기는 소리도 없이 연거푸 세 잔을 다부지게 비워낸 아버지의 낯빛은 하나도 상기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하얗게만 변해갔다, 다문 입술까지. 그리고 식당을 나서 집에 돌아올 때까지도 아버지는 긴 침묵에 있었다. 그 뒤로도 속을 헤아리기 힘든 아버지의 침묵은 지속되었다.

그러고 몇 계절이 지나고 겨울, 기어이 어머니를 따라간 아버지의 소식을 먼 이국 땅에서 들었다, 바로 2월이었다. 서둘러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면서도, 일찌감치 어두워진 고국의 겨울 밤을 가르며 아버지의 영안실을 향해 갈 때도 그냥 담담했다. 차창으로 보이는 바람 창백한 거리도 견딜 만했다.

세상에 이토록 실감나지 않는 일이 있을까. 지금에야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생생해지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엄연하고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현실 앞에서 그저 담담하기만 하고 도무지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영안실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은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는 채, 나를 아버지에게로 이끌었다. 그때까지도 담담하고 실감하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삼베 때깔 고운 수의(壽衣)에 고깔까지 쓴 아버지가 이승에서의 가슴 졸이고 애태우던 긴 세월을 마감하고, 마지막으로 고단한 육신을 누인 곳은 목관(木棺)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감은 얼굴은 험난한 세월의 흔적이라곤 티끌만큼도 찾을 수 없이 고왔다.

그토록 앙칼지게 아버지를 할퀴던 세월은 다 어디로 비껴갔는지. 아버지의 이마를, 아버지의 볼을, 아버지의 입술을 차례로 쓰다듬으며, 유난히 하얀 얼굴이 꼭 아이 같구나 하는 순간, 미처 면도를 못한 아버지의 짧고 까칠한 수염이 손가락 끝에 따가웠다. 그제서야 서러움에 복받친 울음이 터져 나왔고 아버지의 까칠한 수염은 눈물 속에 점점 아스라해져 갔다. 아, 아버지.

멈추지 않는 눈물을 훔치며 기도했다. 이 다음에 내가 죽을 때는 꼭 면도할 시간만큼은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 아들이 덜 서럽도록.

*필자 김기승은 1979년부터 극단76극장, 극단 실험극장, 환 퍼포먼스 그리고 캐나다로 이민오기 직전 PMC 프로덕션 등을 중심으로 공연계에서 활동했고 연극, 뮤지컬, 영화, 콘서트, 라디오 등 100여 편의 작품들에서 연기, 연출, 극작, 기획 등을 맡아왔습니다. 제목 '추조람경'(秋朝覽鏡)은 당(唐)나라 설직(薛稷)이 쓴 시의 제목으로, 제자(題字)는 필자가 직접 썼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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