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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6시, 300여 명의 승객을 태운 선 윙의 로스 카보스행 비행기는 밴쿠버 공항을 이륙하고 있었다. 표지판의 안전 밸트 사인이 꺼지자, 우울한 겨울 날씨로부터 탈출을 시도한 승객들에게 샴페인을 제공하겠다는 기내 방송이 들려왔다. 비행기 안은 곧 따뜻한 남쪽 나라로 향하는 휴가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크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 겨울 옷을 벗는 사람들, 다정한 눈빛을 주고받는 연인들---. 정호승의 시집을 펴든 나는 “그대와...
조정
도시의 비 2017.04.01 (토)
비가 내린다도시의 비가 내린다 머리 위에가슴에아스라한 사랑 위에 비가 내린다 길가 마른 가지  갈래로등줄기 차갑게오욕의 갈증이 흐르고 검은 아스팔트 위로부서지는 푸른 빗방울못 다한애증의 포말 깜박이는 녹색 신호등 너머피어나는 안개 몰이아득한 회한의 그리움에어둠이 내리면 거리의 따뜻한 창 너머지나는 불빛흐릿한 미소 너와 내가 스치는정사각형 도시의 광장에하얀 꽃비가 내린다우리의 별꿈이 내린다 
김석봉
 두 딸이 대학에 진학해 도시로 가고 나니 방이 두 개가 비었다. 햇볕이 잘 드는 방을 골라 서재를 만들려고 짐을 옮기는데 방 벽에 딸이 붙여 둔 문구가 보였다. ‘Dream, until your dream comes true. (너의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꿈을 꿔라!)’ 딸은 매일 이 문구를 보며 꿈을 꾸었나 보다. 글자가 가려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책장을 배치했다. 딸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엄마인 내게도 꿈이 있으니까.       어른이 되어 슬픈 것 중에 하나는 그...
박정은
봄비에 젖으면 2017.03.25 (토)
자박자박 봄비 내리는 길지난겨울 그림자 해맑게 지우는 빗방울 소리 흥겨워 발걸음도 춤을 추네 반 토막 난 지렁이 재생의 욕망이 몸부림치고 시냇가 버드나무 올올이 연둣빛 리본 달고 나 살아났노라 환호성 하네 늙수그레하던 세상 생명수에 젖어 젖어 기지개 쭈욱 쭉 젊어지는 중이네 나도 초록빛 새순이 될까살며시 우산을 접어보네.
임현숙
얼마 전에 동유럽여행을 다녀왔다. 독일, 헝가리, 오스트리아 등 6개국을 짧은 일정에 돌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이었지만 보고 느낀 것은 많았다. 그중 하나가 그들의 화장실 문화다. 별로 깨끗한 편도 아니면서 대부분 유료화장실이어서 이용하는 데 불편이 컷다. 한 사람당 0.5유로(750원 정도)의 이용료도 만만찮은 데다가, 잔돈 계산 때문에 길게 줄을 서야 했고, 그러다 보니 급한 사람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몇 년 전에...
권순욱
샛바람 강 건너온다눈비 젖던 나뭇가지에수상하게 올라탄다꽃몽울 쌔근쌔근뽀시시 웃음 한창마파람 논밭 질러온다낯익은 산과 들판은짙푸르게 차려입고밤늦도록 무도회장으로갈바람 산 넘어 불어온다낙엽 지는 밤길에볼이 붉은 동자승(童子僧) 서넛밤새워 걷고 걷고 또 걸어새벽녘 아케론* 강기슭에 이르려나높바람 절벽아래 달려온다계곡에 부러 나는 적설(積雪)깊어가는 하얀 침묵, 술 취한 바람이침묵을 잘근잘근 씹는다바람은 오고바람은...
김시극
新春斷想 2017.03.11 (토)
  밴쿠버에 이민을 와 16년을 넘게 사는 동안 금년 겨울처럼 많은 눈을 보긴 처음인 것 같다. 그것도 공교롭게 주말을 끼고 폭설이 내린 날이 많아, 매 주일마다 작은 교회에서는 심지어 예배인원을 걱정해야 한다는 말까지 들릴 정도로 이상 폭설이 지속되었다. 시절은 어느새 3월로 접어들어 우수, 경칩을 지나 바야흐로 새순과 어린 싹이 고울 시절에 그야말로 ‘춘래 불사춘’인 셈이다    이번 겨울이 일기(日氣)만 그러했던가?...
민완기
눈보라 2017.03.11 (토)
눈의 터널을 건너 온 하얀 밤의 할리팍스옛 도시의 스토브에접어둔 그리움들을 모아 늦도록 태운다 뜨거워도참을만 해서 참나무고만 고만한 삶 키재는 도토리 나무근심 많은 신문지들가지 많은 삶의 껍데기들활활 높고 거센 숨결 밤새 몰아쉬고나무가지 안고 몸서리치는야수 같은날  한기가뿌리째 타는뜨거움 안겨줄 천둥불이 온다면그 곁에밤새도록 무너지고 싶어라 무수히 눈 맞추며깊도록 잠못 이루는투명한 하늘과푸른 눈보라
전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