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많이 들지만, 아이 키를 몇 cm라도 더 키우는 게 후회가 덜할 듯해서요.”
엄마 A(42)씨는 7개월 전부터 초등 5학년 아들을 서울 한 유명 성장 클리닉에 데려가 ‘성장 치료’를 시작했다. “더 어릴 때 대학 병원에 갔을 때는 치료가 필요하진 않다고 했는데, 요즘 들어 아이가 여드름이 나고 또래보다 키는 작은 걸 보니 조바심이 났다”며 “효과가 있는지 요즘 키가 좀 큰다”고 했다. A씨가 아들의 성장 치료에 쓰는 돈은 매달 약 100만원. 치료비는 전액 ‘비급여’다. “병원에서 2차 성징을 늦추는 성조숙증 치료 주사와 성장호르몬 주사를 같이 맞으면 성장판이 닫히는 시기를 늦추면서 그 사이 키를 키울 수 있다고 해서 두 주사를 같이 맞고 있다.”
의료계와 제약업계에 따르면,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이처럼 성장 클리닉에서 성조숙증 주사와 성장호르몬 주사를 동시에 맞히는, 이른바 ‘하이브리드 키 성장 치료’가 번성하고 있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과거에는 성장호르몬 주사를 많이 맞혔지만, 최근에는 성조숙증 주사도 병행하는 곳이 급증하고 있다”며 “특히 강남 엄마들을 중심으로 두 주사를 같이 맞는 게 최신 성장 요법처럼 알려지면서, 무작정 ‘성조숙증 주사도 맞혀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늘었다. 거절하면 마치 최신 기법에 뒤처진 의사로 취급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성조숙증아닌데… ‘키 크는 주사’로 둔갑
지난해 10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작년 병원급 이상 의료 기관이 심평원에 성조숙증 치료를 청구한 건수는 64만8528건으로 2019년보다 46.4% 늘었다. 익명을 요구한 소아내분비내과 교수 B씨는 “비만 아동이 늘고 성조숙증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성조숙증 검사가 늘어난 영향이 크다”면서도 “기본적으로 키에 대한 걱정과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조숙증이 나타나면 키가 덜 자랄 가능성이 커지는 건 맞는다. 보통 여아는 만 10세에 가슴이 커지는 방식으로, 남아는 만 12세에 고환이 커지는 방식으로 2차 성징이 시작된다. 성조숙증은 여아의 경우 만 8세, 남아는 만 9세 전 이런 증상이 나타난 경우다. 대한소아내분비학회는 “성조숙증의 경우 사춘기가 빨리 시작되면 처음엔 또래보다 일찍 키가 커서 성장이 빠른 것 같지만, 골 연령이 높아져 사춘기가 정상으로 시작되는 아이보다 성인 키는 오히려 작을 수 있다”고 한다. 조기에 성조숙증을 발견해 치료 주사를 맞으면 2차 성징을 늦춰 성인 키가 작아지는 걸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일부 병원에서 성조숙증이 아닌 어린이에게도 성조숙증 주사를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성조숙증이 아닌 어린이에게 성조숙증 주사를 투여했을 때 키 성장에 도움이 되는지는 아직 논란이 있는데, 엄마들 사이에서는 성조숙증 치료 사례가 알려지면서 마치 성조숙증 주사가 무조건 키를 키우는 것처럼 오해가 퍼졌다”고 말했다. B 교수는 “일부 의사가 의학적 근거 없이 성조숙증 주사를 남발하는 것”이라며 “소아과 내에서도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마땅한 대책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부모가 “비급여라도 할 테니 놓아달라”고 요구하면 거절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성조숙증 주사는 보통 주 3~4회에 1회씩 만 11~12세까지 맞는다. 진단을 받아 투여하면 보험이 적용돼 회당 6만~9만원이지만, 비급여로 투여하면 12만~18만원까지 늘어난다. 성조숙증 환자뿐만 아니라 키 성장 목적으로 비급여로 투여하는 어린이까지 급증하면서, 국내 성조숙증 치료 시장은 5년 새 1100억원대에서 1800억원대로 성장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성조숙증 주사 건강보험 적용 연령 기준을 기존 9~10세에서 8~9세로 낮추는 방안을 추진하다가 소식을 접한 부모들의 강한 항의를 받고 철회했다. 문제가 되는 건 비급여 시장이 급증하기 때문인데, 정부가 급작스레 급여 부분을 건드리는 실책을 범한 것이다.
◇“‘작은 키’에 대한 차별·혐오 더 커져”
부작용은 없을까. 대한소아내분비내과학회는 “성조숙증 주사는 사용된 지 30년이 넘었고 부작용이 거의 없는 안전한 약”이라는 입장이다. 드물게 주사 맞은 부위가 아프거나 무균성 농양, 과민 반응 등이 있다. 하지만 소아과 전문의들은 “이는 성조숙증 환자에게 투약했을 때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일부 성장 클리닉에서는 성조숙증 주사와 성장호르몬 주사를 동시에 투약할 경우 탈모, 관절통, 피로감 등의 부작용을 안내하고 있다. 성조숙증이 아닌 어린이에게 투약했을 때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이 있는지는 아직 명확한 정설이 없는 상황이다.
B 교수는 “의학적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데 주사를 남발하는 의사도, 키가 큰다고 하면 무작정 치료를 받으려는 부모도 모두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부모로선 자녀들이 혹시나 키가 작아 부당한 차별을 당할까 걱정하는 마음을 이해한다”며 “작은 키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이 이 사태를 낳은 것”이라고 말했다.
연애·결혼 시장은 물론 고용·취업 시장 등에서도 키와 외모로 인한 차별이 심해지고 있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외국에서도 키와 체중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있지만, 한국은 유독 이런 편견이 극으로 치닫는 ‘쏠림 현상’이 심하다”며 “과거와 달리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경제력도 향상됐고, 서비스 직종이 늘면서 젊은 남성들도 키에 대해 과거보다 자유롭지 않은 분위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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