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연주실에는 한국에서 이민 올 때 가지고 온 호두까기 인형이 있다. 예술의 전당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뮤지컬 “호두까기 인형”을 보고 나오는데 그 주인공 인형을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키대로 세워 놓고 판매를 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작은 것은 장식용이고 어느 정도 키가 큰 것부터는 진짜 호두가 까질 것 같아서 조금 큰 것으로 샀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사가지고 이민 올 때 고이 모셔 와서(?) 내 방에 두고 있는데 제자들이 오면 흰 수염도 잡아당기고, 호두까기 인형 옆에 매달려 있는 작은 호두까기 인형이 움직이는 줄 알고 팔도 돌리고 당기고 해서 나의 인형은 부상 투성이가 되었다. 수염은 본드로 단단하게 붙이고, 꼬마 인형 팔은 본드로 붙여도 그새 망가뜨려서 테이프로 아예 붙여 놓았다. 인형의 부상이 심해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제자들에게 선언을 했다. “이 인형은 1년에 한 번만 만질 수 있는데 그 때가 바로 정월 대 보름날이야. 그 날 진짜 호두를 까게 해줄게”
이민을 와서 생활하다보니 음력을 점점 잊게 되어 처음 15년 동안은 음력설도 지키고 추석도 지냈는데 아이들이 결혼을 하고 나니 그 나마 지키기가 어려웠다. 설날과 추석이 휴일이 아니니까 우리 부부끼리만 지내기도 뭐하고…. 아이들과 함께 보내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구정보다는 신정을, 추석보다는 추수감사절을 지내게 된다. 하지만 정월 대보름은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로써 크게 무엇을 하지 않아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지금까지 부럼깨기와 오곡밥에 나물을 넣어 비빔밥 정도는 먹으며 지내고 있다.
정월 대보름에는 대표적인 것이 마을 제사 지내기, 달맞이 소원 빌기, 더위팔기, 다리 밟기, 액막이 연 날리기, 달집태우기, 쥐불놀이, 줄다리기 등이 있고, 독특한 음식도 빠질 수 없다. 다섯 가지 곡식으로 오곡밥을 지어먹고 열 가지 나물로 반찬을 만들며 단단한 견과류를 입에 넣고 부럼 깨물기를 한다. 차가운 술을 남녀노소가 함께 마시는 귀밝이술, 솔잎을 깔고 떡을 쪄먹는 솔 떡도 대보름 음식이다.
보름날, 밤·잣·호두·땅콩 등 껍질이 단단한 과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과일들을 총칭하여 ‘부럼’이라 하고 이것을 먹는 관습을 “부럼을 먹는다.” 라고 한다. 부럼이라는 말에는 굳은 껍질의 과일을 총칭하는 뜻과, 부스럼의 준말인 종기라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또 부럼을 깨물며 '일 년 열두 달 동안 무사태평하고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 주세요' 하고 기원도 한다.
깨물 때는 여러 번 깨무는 것보다 단번에 큰 소리가 나게 깨무는 것이 좋다고 하며 첫 번째 깨문 것은 마당에 버린다. 이렇게 하면 1년 동안 부스럼이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이가 단단해진다는 속설이 있다. 부럼으로 쓰이는 견과류에 풍부한 불포화지방산이 피부에 영양을 공급하기 때문에 생겨난 풍습이다. 또한 견과류를 깨무는 것은 소홀히 하기 쉬운 치아 건강을 점검하는 효과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부럼을 깰 때 이가 다칠까 겁이 나서 단단한 것은 피하고 땅콩으로 대신하고 호두는 호두까지 인형이 담당한다. 며칠 전 대 보름 날 널찍하게 신문지를 깔고 그 가운데 호두까기 인형을 놓고 정월 대 보름 호두까기 행사(?)를 했다. 제자들과 어머님들과 함께. 다들 “어머, 이것이 장식용이 아니고 진짜 호두를 까는 인형이었어요?” 라면서 다들 신기한 듯 호두를 깐다. 어떤 아이는 자기 오빠 것까지 까서 챙겨가기도 한다. 어머니들도 바로 까서 먹으니 고소하고 엄청 맛있다고 하시면서 좋아하는 모습에 나도 보람을 느낀다.
여기에 사는 우리들처럼 동서양 문화가 서로 섞여 있듯이, 서양의 인형을 통해 호두를 까면서 우리나라의 명절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도 있어서 교육적으로도 참 좋은 것 같다. 하지만 인형도 이가 많이 상하는지 점점 늙어가는 것이 애잔하기는 하다. 또 산악회에서는 산꼭대기까지 나물과 큰 다라를 들고 가서 참기름까지 넣고 보름달을 보면서 비빕밥을 나누어 먹는다. 그럴 때면 한국에서도 못해 본 것을 캐나다에 와서 멋진 캐나다의 자연 속에서 하이킹 회원들과 한국의 정을 나누는 것도 정말 행복하다.
올해는 오곡밥, 나물반찬, 부럼 등 전통적으로 즐겨왔던 음식을 만들어 온가족이 함께 나눠먹고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자리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또 조금 색다르지만 부럼을 깨면서 ‘생뚱맞게 나타난 코로나 바이러스야, 이젠 우리 곁을 떠나서 다시 평온한 생활로 돌아가게 해줘’ 라고 기원도 해 본다.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박혜정의 다른 기사
(더보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