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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추억의 창고, 그 속에 감사할 것이 넘칩니다”

권민수 기자 m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0-10-15 14:36

[창간특집-밴쿠버 이민사를 기록한다4]늘샘 반병섭 목사∙ 김정자 사모

“사람들 대접하는데 시간 보낸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지금 보니 사람들에게 대접 받으며 살아온 거였어요. 참 감사한 일이지요.”

늘샘 반병섭 목사와 김정자 사모와 인터뷰 말미에 들은 말이다. 오랜 세월을 통해 정제된 깨달음은 단순하고 명료한 듯 싶다.

1969년 밴쿠버 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로 시작해 한인 이민사의 산 증인으로 살아온 부부와 내외가 자주 찾는다는 써리의 한 골프클럽 하우스에서 두 시간 대화를 했다.

인터뷰 대상자가 고령자 일 때는 항상 그 분들의 체력적 한계 때문에 장시간 기억을 헤아리는 인터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반 목사 내외는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생생한 기억의 샘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 목사는 오랜 세월 동안 밴듀슨 가든 시비건립, 연합교회 관련 중재자역 등 많은 일을 이뤘다. 인터뷰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기획의도에 맞춰 개인이민사 부분만 요약했다.  권민수 기자 ms@vanchosun.com

 

69년에 밴쿠버로 오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67년까지 9년 반 서울 동원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건국대에서 국문학을 공부했는데, 공부를 더해야 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내가 병원(성애의원)을 운영해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있어서 목회와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도시샤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를 공부하고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미국 시카고 루터신학교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아내가 뒷바라지를 많이 해줬지요. 공부를 마치고 밴쿠버를 거쳐 귀국하려는데, 당시 막 설립된 밴쿠버한인연합교회에서 청빙이 들어왔습니다. 그때 청빙위원이 심선식 박사였어요. 그 분 부인이 제 처의 의대 1년 후배였고, 제가 부산에서 결혼할 때 참석하기도 했지요. 그런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때 청빙을 받아들여서 가족이 모두 이민 오신겁니까?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고2 이던 큰딸(성혜씨)부터 초등학교 4학년이던 막내(성우씨)까지 4녀1남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문제, 지난 20년간 병원 운영을 해온 아내 덕분에 어려움 없이 아이들을 뒷바라지 해왔는데 그 병원을 포기하는 문제… 기도했습니다.

목회자와 교회가 많은 한국보다 막 이민이 시작된 캐나다에 한인교회에 목회자로 쓰임 받는다면 그것이 영광된 사역일거라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남편을 먼저 생각해 목회에 순종하겠다 했습니다.

그래서 69년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이상철 목사가 초대 목사셨고, 제가 2대 였습니다”

 

가족 분들 정착은 어땠습니까?

“교단(연합교회)에서 사택을 주었기 때문에 처음 정착할 때는 부담이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정부가 이민자에게 반출할 수 있게 제한했던 액수가 1200달러에 불과했고, 또 목사사례비가 여섯 식구 생활에 맞는 액수는 아니어서 저도 잠시 햄 공장에 나가 일했고, 아내도 일본인이 운영하는 리치몬드 생선공장에 나가 일하고, 스키복 공장에서도 일했습니다.

둘째(성은씨)와 셋째(성미씨)가 딸기 따는 일을 해서 학용품비를 벌기도 했는데, 이 모습을 보고 다른 아이들도 농장에 나가 일했습니다. 안스럽기도 했는데,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자위했습니다.”

 

사모님은 생선공장에서 어떻게 일을 하시게 됐습니까?


“저희 세대가 일본말은 하니까. 공장 전화번호를 보고 무턱대고 전화해서 일본말로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어요. 사정이 통해서 생선공장 가니까 칼 하나 쥐어줬습니다.

남자들이 커다란 냉동 청어를 작업대 위에 올리면 알 빼내는 일을 3일 정도 했어요. 여러 인종 여자들이 수다 떨며 일하는 분위기에서 한국사람 성실하고 손 빠른 걸 보여주겠다고 결심하고 한눈 팔지않고 열심히 일했더니 따로 불러요.

모아진 알을 신선도에 따라 관별하는 더 손쉬운 일을 맡게 됐어요. 임금이 시간 당 10달러로 당시 물가수준에서 적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빅토리아에 생선공장에 새먼알 포장하는데 원정 가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교회에서 대접하는데 쓰기도 했습니다”

 

부임 초기에 교회분위기는 어땠습니까?

“40가정 정도 한인이 있었는데, 교회가 하나만 있으니, 신자고 비신자고 주일에는 교회에 모여 하나로 뭉쳤습니다. 한국에서 가져온 돈도 없고…다들 어려우니까 모여서 정이라도 나눠야 했지요.

온 가족이 교회에서 직분을 하나씩 맡아 했지요. 처는 찬양대를 큰 아이는 썬데이스쿨을 맡아서 꾸렸습니다.

저는 공항 마중 나가고, 집과 학교 알아봐주고 이삿짐 나르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 일이 당연히 목사 몫으로 인식돼 있었어요. 이민자 마중을 자주해 이민부 관리들도 ‘렙 밴(Rev. Ban)’으로 저를 알고 있었습니다.

기억 중에… 연아 마틴 상원의원이 ‘꼬맹이’였고, 손병헌 재향군인회 회장이 청년부 회장이었고… 그랬습니다. 1971년에는 20명을 모아놓고 한글학교를 한인사회 최초로 개설했습니다.

교재는 주밴쿠버 총영사관에서 받았습니다. 한인회는 1966년에 시작된 상태였는데, 5대 회장까지는 교회 친교실에서 회장을 뽑았지요. 밴쿠버 한인 노인회는 1975년에 교회 안에서 준비해서 76년에 발족했습니다”

 

당시 밴쿠버로 이민 오는 분들이 어떤 분들이었습니까?

“60년대에 와있던 사람 중에는 의대 유학생 출신으로 의사가 된 이들이 많았고, 70년대 후반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왔습니다.

70년대 후반에 온 사람들은 밴쿠버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해 1년 안돼 토론토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포트 하디의 목재공장이며 북쪽의 광산지대에 일하면서 돈 벌어서 밴쿠버로 오는 꿈을 가진 한인도 많았습니다. 한때 경비행기를 타고 이런 한인들을 찾아 BC주 순방을 하기도 했습니다.

빅토리아나 프린스 조지 등으로 찾아가면 한인 가족이 노소할 것 없이 옷을 차려 입고 맞아주셨고, 그 가정에서 예배를 들였습니다.

70년대에는 젊은 사람들이 오니까 결혼을 해야 하는데 거리가 머니까 소포결혼이 유행했습니다. 한국 본가에서 정하거나 선을 본 신부가 밴쿠버로 와서 신랑하고 결혼하는 것인데, 주로 저녁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다들 일을 하고 바쁘니까 저녁에 퇴근하고 하객 한 명이라도 더 오라고 그리했습니다. 외국 나간다는 호기심에 오는 용감한 신부들이 많았는데,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가정 불화가 있기도 했습니다. 나이가 있다 보니 그런 사람들 대소사에 관여하게 되기도 했지요.”

 

노인회는 70년대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젊은 사람들이 일을 하려니 자녀를 보살필 사람이 없어서, 주로 처가 쪽, 장모를 초대해 모셔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인이 오니 남편이 따라오는 식이었지요. 그런데 이 분들이 차가 없어 어딜 다니지 못합니다. 그래서 밴쿠버 시내에 집을 하나 얻어 ‘베다니 회관’이라고 이름 붙이고 이 분들이 모여서 지내실 수 있게 했습니다.

노인돕기 사업을 한다니 정부에서 지원금이 나왔고 이 재원으로 운영했었습니다. 차를 빌려서 제가 운전해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었습니다”

 

82년 밴쿠버를 떠나서 92년 워싱턴 DC에서 밴쿠버로 돌아오셨습니다. 떠나실 때하고 다시 돌아왔을 때하고 어떤 차이를 느끼셨습니까?

“떠나기 전에, 75년 들어서 장로교, 침례교, 순복음교회가 들어와 한인교회와 목사가 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 한인연합교회는 이전에 본부의 지원을 받는 교회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교회로 자립을 했지요. 그 후에 떠났다가 돌아와보니 밴쿠버에 한인이 많이 늘어나 있었습니다.

모르는 분도 많았구요.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90년대 투자이민자와 그 이전 이민자의 갈등이 보였습니다.

이전 이민자는 고생하며 기반을 세웠는데, 투자 이민으로 온 분들이 고급주택과 차를 구입하는 것을 보면서 괴리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지요.

교회 쪽에서는… 이것 잘못하면 화살을 맞겠지만, 꼭 얘기는 해야겠는데, 교역자를 함부로 양성해서 질이 떨어지는 불투명한 목사도 생겼고, 또 교단간의 소소한 경쟁으로 한인사회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목사양성은 양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 이민 생활 41년이 되셨습니다. 이상적인 이민자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정리해본 이상적인 이민자는 한국과 캐나다의 장점을 잘 섞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양국의 나쁜 점만 모아놓은 사람 됩니다.

한국의 장점이라면 경로사상, 올곧은 도덕성, 의리입니다. 북미의 장점은 정직과 인권을 옹호하는 자세입니다. 이를 잘 섞으면 이상적인 인간이 될 것입니다. 요즘 이민사회를 위협하는 것은 가정의 파괴라고 생각합니다. 이민사회만 문제가 아니라 세계가 비윤리, 비건설적으로 흐르는데 이민사회도 영향을 받는 것이지요.

이럴 때 교회와 언론의 역할이 참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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