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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부자가 아니어도 큰부자로 사는 사람”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5-11-13 14:21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28- 장인의 길 40년, 도예가 김정홍씨
그는 어딘가 특이한 사람처럼 보인다. 돈이 주인 행세를 하는 세상에 살면서도 돈을 마냥 섬기지 않는다. 넉넉한 것 같지는 않은데, 도움을 받기보다는 베푸는 쪽에 늘 가깝다. 이곳 밴쿠버에서 한국 문화를 논할 때 저절로 떠올려지는 한 사람, 바로 도예가 김정홍씨(사진)에 대한 이야기다.



“인생이 불행해지는 건 바로 욕심 때문”
문화 축제의 현장에 한번쯤 들러본 사람이라면 김정홍씨가 누구인지 쉽게 알아챘을 것이다. 그는 한인 문화의 날에서 혹은 한국의 아름다움이 소개되는 다문화 축제의 공간에서 “도자기 나눠주는 아저씨”로 통한다. 행사장 한켠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부스에서 그는 흙의 숨결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도예품을 즉석에서 만들어 냈고, 이 초벌 직전의 “씨앗”들을 사람들에게 대가 없이 건네곤 했다. 그의 부스 앞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앙증맞은 도자기를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환히 웃는 사람들로 붐볐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붐빌 것이다. 


매번 문화 행사가 열릴 때마다 도자기를 무료로 나눠주고 계십니다.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특별한 건 없어요. 그저 우리만의 상감기법(도자기 등의 겉면에 무늬를 새긴 후 생겨난 홈에 다양한 재료를 채워 넣는 기법)을 이곳에서도 보여주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자기 것을 공짜로 내준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을텐데요. 그것도 매 행사 때마다 말이죠.
어쩌다 한번 있는 행사일텐데요, 뭘. 흙값 몇 푼에 나와 내게서 배운 학생들의 정성이 보태지면, 나머지 누군가가 즐거워 합니다. 이게 내겐 행복이에요.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사람들한테 도자기를 공짜로 나눠주는 이유가 그게 다인가요?
음, 완전 공짜라고는 할 수 없어요. 몇 년 전부터 해온 건데, 한국어를 모르는 타문화권 친구들은 한글로 자기 이름을 쓸 수 있어야 도자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또 아주 좋아하던데요. 자기 이름을 한글로 쓸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나 봐요. 물론 베껴쓰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생활비는 매년 늘고…. 아시잖아요, 돈 없이는 살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걸.
그렇지요. 나 같은 경우엔 도예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거기에서 약간의 생활비가 나옵니다. 개인 도예전은 5년에 한번꼴로 하고 있어요. 이때 작품이 거래되면 또 그게 생활에 보탬이 되지요. 그런데 말이에요. 우리한텐 그렇게 큰돈이 필요 없어요. 아내랑 단 둘이 살고 있는데, 나가는 돈이 별로 없거든요. 술은 직접 담가 마시고, 먹는 것도 화려하지 않아요.

욕심이 별로 없으신 모양입니다.
감히 얘기하자면 인생이 불행지는 이유는 다 욕심에 있다고 생각해요. 욕심 탓에 뭔가 늘상 신경써야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틀어지지요. 욕심 많은 사람은 자기한테 이익이 될 것 같은 사람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게 되어 있어요. 반대의 경우엔 무시할테고…. 난 그런 게 없으니까 그저 편안해요.

나름의 “행복론”을 갖고 있을 것 같은데요.
거창한 건 없어요. 내가 어떤 정답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내 얘기가 어떤 교훈처럼 포장되는 것도 별로에요. 그래도 굳이 얘기하자면 그냥 내 주변 사람들 모두가 나를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행복해지던데요.







“흙의 미세한 기운이 손에 느껴질 때…”

다시 도자기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도예와의 인연은 언제 시작됐습니까?
1973년, 내 나이 거의 서른 때였어요. 경기도 광주에 있는 한 활석 공장에 볼일이 있어 갔는데, 그곳에서 도자기 하는 사람과 만나게 됐어요. 그런데 그이가 “김형, 나랑 도자기 한번 해봅시다”라고 그러는 거에요. 그 길로 이천으로 내려갔고,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도예가로부터 사사를 받았어요. 

장인의 길을 택하신 거군요.
그런 셈이지요. 그러다 나만의 공방을 차렸는데, 이게 쉽지가 않았어요. 소위 거래처가 없다 보니까 빚만 쌓여갔죠.  한국 민속촌의 도예 책임자로 일하면서 이 빚을 다 갚았어요. 그런 뒤 다시 이천으로 내려갔지요.

당시 도자기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사진 등을 보고 전통 자기를 원형 그대로 만드는 것, 그러니까 전통 자기를 모방하는 일이 흔했어요. 창작과는 거리가 멀었지요. 난 나만의 기법을 개발하려고 애썼어요. 그 결과 붓이 아닌 손끝을 이용해 초벌을 끝낸 도자기에 문양을 입힐 수 있게 됐습니다. 이게 나한텐 큰 자랑이에요.

한국에서의 삶은 어떠셨습니까?
뭐가 어때, 여기랑 별반 차이 없었지. 술 좋아했고, 누군가 작품을 의뢰하면 작업을 시작하고, 그런 부탁이 없으면 쉬고, 뭐 그렇게 살았어요. 그때도 지금처럼 너무 애쓰면서 살지는 않았어요.

꽤 늦은 나이에 이민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들 둘이 있는데, 유학을 가고 싶어 했어요. 둘 다 군대도 다녀오고 대학도 마친 상태였는데 말이죠. 큰 아이는 프랑스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둘째는 캐나다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다 IMF 사태가 터졌지요. 프랑스는 유학생들한테도 공립교육 혜택을 줘서 상대적으로 별 부담이 없었지만, 캐나다는 아니었죠. 매번 송금을 해줘야 했는데, 그게 부끄러웠어요. 당시 금 팔아서 나라 구하자는 분위기였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송금을 하려 하니까 낯이 좀 뜨거워지대요. 그래서 아예 캐나다로 가자, 그렇게 결심했습니다. 2001년 7월, 기업이민으로 왔어요.

자녀 교육 때문에 밴쿠버에 오신 셈이군요.
그런데 아이가 미성년자가 아니라서 같이 이민 신청을 하지 못했어요. 이민과 관련해서 우리 부부가 아는 게 거의 없었거든요. 어찌됐건 두 아이 모두 지금은 한국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첫째 아이는 미대 교수로 재직 중이고, 작은 아이는 영어학원을 운영하고 있어요.

한국에서도 도예가로서 입지가 탄탄했을텐데, 왜 자녀와 함께 귀국하지 않았나요.
기반을 다시 옮긴다는 게 그게 어디 쉽나요. 밴쿠버가 마음에 들었고, 우리 부부 둘이서만 여기서 살아보자고 마음을 굳혔지요. 도예 교실을 열었고, 대학과 중고등학교에서도 도예 강의를 여러 차례 했어요. 한국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 제자도 꽤 됩니다. 그게 자랑스럽죠.

작가도 배출하셨지요.
현재까지 세 명인데, 그 중 두 사람이 중국인이에요. 제자들 모두 작품 활동에 열심입니다. 그게 나한텐 또 다른 기쁨이, 자랑거리가 됩니다. 멀리 캘리포니아에서도 내게 도자기를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있어요.

도예…, 쉽게 배울 수 있는 영역은 아닌 것 같습니다.
끈기가 없으면 못해요. 문래에 흙을 똑바로 세우는 데만 통상 한 학기가 소요되곤 하니까, 학생들 입장에서는 많이 지겨울 수밖에요. 그러다 어느날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됐어요. 양손이 아니라 손 하나만을 사용하면 흙을 쉽게 세울 수 있게 된다는 걸 말이죠. 이런 얘기를 한국의 교수 친구들한테 하니까 날더러 술취했냐고 되묻더군요. 그런데 가능했어요. 어찌됐건 우리 도예교실에선 지루한 과정을 많이 단축시킬 수 있었지요.

도예의 장점은 무엇일까요?
흙의 미세한 균이 손에 닿았을 때 좋은 기운이, 좋은 감정이 생긴다는 얘기가 있어요. 학생들을 보면 정신적으로 상당한 안정을 찾는 것 같습니다. 도자기는 집중해서 만들어야 하니까, 자연스레 명상이 이루어지도 하지요. 

아이디어가 많으신 것 같습니다.
가진 것은 많지 않지만 즐거운 생각은 늘 하고 있습니다. 이래 보여도 특허도 하나 있었어요. 가마를 만들어서 불을 때면 굴뚝으로 나가는 열이 상당해요. 그 열을 이용해 초벌작업을 할 수 있는 방식을 만들었지요. 이걸로 “이중 도자기 가마”라는 이름의 특허를 낸 적이 있습니다.

특허를 이용해서 사업을 했더라면 경제적으로 더욱 윤택했을텐데요.
그런 쪽으로는 내가 생각을 잘 못해요. 특허도 특허 유지 비용이란 게 하도 비싸서 지금은 포기한 상태입니다. 그래도 후회 같은 것은 없어요. 과거의 일은 그냥 잊어 버려요. 돈에 대한 것은 더 빨리 잊지요.

밴쿠버에서 “도자기 깨기” 이벤트를 여러 차례 진행하셨지요. 이 또한 신선한 아이디어로 받아들여졌는데요.
도자기를 깬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어요. 완전함을 위해 불완전함을 버린다는 의미도 있을테고, 흙에서 온 도자기를 다시 흙으로 돌려보낸다는 의미도 있겠지요. 우리들도 어차피 흙으로 돌아갈 거에요. 그렇지 않겠어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스스로를 부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 전에 메이플리지로 이사했어요. 도예교실을 새로운 곳으로 옮긴 거지요. 차 하나 빌려서 혼자 슬슬 짐을 나를 생각이었는데, 불가능하더군요. 집에 흙만 10톤 가량 있는 거에요. 앞으로 몇 년 간은 흙 구할 걱정 없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양이지요. 그 흙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아, 나는 정말 부자구나.


이 특이한 도예가는 정말 돈욕심이 없는 듯했다. 도예교실 수강비를 물었더니 두 달에 250달러라고 했다. 캐나다의 값비싼 예체능 교육비를 감안하면, 매우 싼 가격이다. 그것도 재료비를 포함해서다. 이런 얘기 신문에 쓴다고 하니, 그는 살짝 쑥스러워 하는 눈치다. 그러면서도 도예, 우리의 한국 청자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남겼다. 수강생들은 “김정홍 도예 교실”에서 이름난 도예가 뿐 아니라 큰부자가 아니어도 큰부자로 사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전화 (604)256-4533, ((604)817-5840. 주소 1163 203 St. Maple Ridge.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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